빵과 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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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101회 작성일 19-11-29 15:40본문
빵과 같은 말씀
마4:1~11
2019. 11/24. 11:00
빵과 전쟁
베들레헴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마을 이름이다. 그 뜻은 ‘빵집’이다. 집을 뜻하는 ‘뻬이트’(בֵּית)와 빵을 뜻하는 ‘레헴’(לֶחֶם)의 합성어다. 훗날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하늘로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라 하셨는데, 그러니 빵이신 주님께서 빵집(베들레헴)으로 오신 셈이다. 빵을 뜻하는 이 ‘레헴’(לֶחֶם)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어원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레헴은 ‘전쟁하다.’ ‘싸우다.’는 뜻을 가진 ‘라함’(לָחַם)이란 동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라함이란 동사에서 전쟁을 뜻하는 ‘미르하마’(מִלְחָמָה)라는 단어도 나왔다. 그러니까 빵(레헴)과 전쟁(미르하마)이 같은 단어(라함)에서 나온 것이다. 즉 어원이 같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빵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먹는 문제가 얼마나 삼각하고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목숨을 걸어야만 먹을 것(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도 먹는 문제가 중요한데, 수렵생활을 통해 겨우 먹는 것을 해결하던 시대를 생각해 보라! 먹는 것이 전쟁과 같은 일이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변변한 도구도 없이 거친 바다와 싸워서 물고기를 잡아야 먹을 수 있었고, 짐승과 싸워서 이겨야 먹을 것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목숨 걸고 높은 나무를 올라가야 먹을 열매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 먹는 문제는 전쟁과 같았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대부분의 전쟁이 먹는 문제 때문이었다. 먹을 것을 위해 자연과 싸우고, 짐승과 싸우고, 심지어는 이웃과 싸웠다. 이스라엘 지도에서 헐몬산에서 시작하여 레바논을 거쳐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집트 나일강까지를 초생달 지역(그 모양이 초생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부른다. 그 일대에서 유일하게 기름진 곳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였다. 그처럼 비옥한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곳을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고도 부른다(모세가 보낸 10명의 정탐꾼이 이렇게 평가함). 이 말은 그곳이 기름지니까 그래서 그곳을 차지하면 먹는 문제가 해결이 되니까 서로 그곳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오늘날도 세계 각 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모두가 먹는 문제 때문이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싸웠다면 오늘날은 먹을 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싸운다. 듣기 좋은 말로 ‘경쟁’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람을 직접 상하거나 해치지 않을 뿐이지 이 또한 전쟁이다.
인간은 빵 이상의 존재다!
성경도 이 사실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최초의 계명이자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선악과’(창2:16,17)도 결국은 먹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제한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인간은 먹는 문제 이상의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물질 이상의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존재에 부합하게 살면 먹는 문제가 보장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단 때문이다. 사단 역시 3장에서 하와에게 접근하여 먹는 문제로 시험을 한다. 무엇이든 다 먹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계명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얼핏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 것 같고, 사단은 모든 것을 허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단의 말에는 인간을 먹는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하려는 계략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사단은 철저한 유물론자다. 결국 인간은 여기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래서 아담 이후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 곧 땅과 사투를 벌여야 먹고 사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전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을 창3장 이전, 곧 타락 이전으로 회복시켜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주님께서 친히 그 모범이 되셨다.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에 사단이 첫 아담에게 했던 것과 같은 시험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주님께 했다. 본문이 그것이다. 40일 금식으로 몹시 주리신 주님을 찾아와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렇게 굶는 이유가 무엇이냐 당장 돌로 빵을 만들어 주린 배를 채우라.’고 충고를 했다. 여기에는 사단이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겉으론 주님을 위한 듯싶지만 무서운 흉계를 감추고 있다. 하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속아 넘어갔으나 주님은 단호히 물리치셨다. 사단의 이 충고는 주님을 먹는 문제에 매인 존재(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 자신에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신적 능력을 기껏 자신의 주린 배나 채우고 명예를 얻는데 사용한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계략이었다. 주님은 이를 단박에 알아차리시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 사람에게 빵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빵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사람다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타락 이전 상태로 회복을 선언하신 것이다.
말씀이 빵이다.
본문은 빵이 전부라는 사단의 주장에 대한 빵과 함께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주님은 구약의 ‘먹지 말라.’는 소극적인 금지명령을 ‘먹으라.’는 적극적인 허용명령으로 바꿔놓았다. 여기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은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성경이 곧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모든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나 사람이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일용할 양식으로 빵을 먹듯 말씀을 먹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 선언에는 ‘먹으라.’는 명령이 전제되어 있다. 빵(밥)을 먹듯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빵(원문은 빵으로 되어 있음)을 우리 성경이 ‘떡’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시대의 유목문화에서 빵은 우리 문화의 밥과 같이 주식이다. 성경 번역 당시 우리 문화에서 빵은 생소한 것이기도 했지만 간식거리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때문에 거기에 대치되는 것으로 떡을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만 떡을 밥처럼 먹지는 않는다.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먹는다. 이런 잘못된 번역이 우리나라 성도가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말씀을 밥 먹듯 읽어야 하는데 떡 먹듯 읽다보니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우연히 김영주 시인의 〈나는 그대의 밥이 되고 싶다〉는 시를 보았다. 짧고 단순한 시어로 된 동시와 같은 시다.
매일 그대와 나누는
그대와 마주하는
밥만큼만 그대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대에게 힘을 주는
따순 밥이 되고 싶다.
지나가듯 대충 두어 번 읽었는데, 번 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밥(말씀)으로 오신 우리 주님의 나를 향한 마음이 이와 같겠구나!’ 주님은 매일 나와 나누고, 나와 마주하고, 나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하신다. 나에게 힘은 주고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능력을 주는 따순 밥이 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 주님과 나누고, 마주하고, 항상 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해서 날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따라 사는 것이다. 밥처럼 항상 먹는 것이다. 말씀이 곧 생명의 빵(밥)이신 주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도 밥은 중요한 교제의 수단이다. 열 번 만나는 것보다 한 번 밥을 먹는 것이 더 가까워진다고 한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과 밥을 먹자고 하고, 친한 사람과 항상 밥을 먹고 싶어 한다. 또한 밥은 친한 사람과 먹어야 편하고 좋다. 마찬가지로 주님과 친해지고 싶다면 밥처럼 말씀을 먹어야 한다. 주님과 친한 사람은 말씀을 자꾸 먹게 된다. 말씀을 먹는 것이 좋고 편하다. 주님과 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밥처럼 날마다 나누고 마주하고 보는 사람은 주님과 친밀한 가운데 있기에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고 생명이 자라고 더욱 풍성하게 된다.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능력을 받아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나에게 힘을 주는 따순 밥과 같은 주님, 그 주님의 말씀을 밥처럼 먹자!
거북이 산자
‘거북이 신자’라는 말이 있다. 거북이는 원래 행동과 걸음이 늦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거북이 신자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늦게 발전하고, 늦게 행하고, 늦게 섬기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그러나 이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또 있다. 새의 경우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9일을 살고, 사람도 먹지 않고 12일을 산다고 한다. 개는 먹지 않고 20일을 산다. 그런데 거북이는 먹지 않고 자그마치 500일 동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거북이 신자’라는 말은 먹지 않고도 500일을 사는 거북이를 풍자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성도라고는 하지만 매일 말씀의 양식을 먹지 않고 사는 사람, 기도의 은혜 없이 사는 사람, 교회를 다니며 스스로를 성도라고 생각하지만 말씀과 은혜를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을 빗대어 오랫동안 굶어도 죽지 않는 거북이와 같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거북이와 같은 성도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불명예를 벗으려면 밥 먹듯 말씀을 먹어야 한다. 먹는 만큼 힘을 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일꾼을 뽑을 때 먹는 것을 보고 뽑았다. 우리 또한 주님 나라의 일꾼이다. 건강하고 일 잘하는 일꾼이 되려면 말씀을 잘 먹어야 한다. 영적인 생명, 영적인 권세와 능력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말씀은 영적인 삶을 위한 밥이다. 가난의 사막에서, 내적인 공허감의 사막에서, 감정의 혼돈이란 사막에서 말씀은 우리 끝없는 유랑길의 ‘따순’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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