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과 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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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889회 작성일 19-10-03 18:55본문
검과 같은 말씀
히4:12
2019. 9/29. 11:00
마음을 찍는 사진기
어느 마을의 시장에 사람의 마음을 찍는 사진기가 있었다. 그 지역의 유명한 정치가를 찍었더니 돈 다발이 찍혔다. 돈 많은 사장님을 찍었더니 술과 여자가 찍혀 나왔다. 어떤 남자는 늑대가 찍혀 나오고, 어떤 여자는 여우가 찍혀 나왔다. 엄마의 손을 잡고 시장 구경을 나온 아이의 마음에선 장난감이 찍혀 나왔고, 아이 엄마의 마음에선 가족의 모습이 찍혀 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시장에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사나이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생각했다. ‘틀림없이 무시무시한 흉기가 찍혀 나올거야!’ 사나이가 사진기 앞을 지나갔다. 천사처럼 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만 찍혔다. 정말 이런 사진기가 있어 지금 여기에 있는 나와 여러분의 마음을 찍는다면 어떤 모습이 찍혀 나올까? 소망만 말하겠다. 나는 여러분의 마음에서 주보에 나온 활짝 웃으시는 우리 주님의 모습이 찍혀 나오고, 커다란 성경책이 찍혀 나오고, 주님의 십자가가 찍혀 나오고, 주님의 못 자국이 찍혀 나오고, 주님의 나라와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찍혀 나오고, 영혼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찍혀 나왔으면 좋겠다. 예배하는 모습, 찬양하는 모습, 섬기는 모습도 찍혀 나왔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는 평소 무슨 생각을 많이 하고 사느냐,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느냐에 대한 것이다. 아무튼 누군가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지어낸 이야기지만 실제로 우리 마음을 찍고 있는 사진기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우리를 판단하실 때도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 성경은 바로 그분의 말씀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이란 사진기를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계속 찍고 계신 것이다. 누가 지금 예배시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를 찍고 계신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 사진기의 셔터 누르는 소리가 안 들리는가? 소위 경건한 사람은 이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이와 같은 기능을 말하고 있다. 당시로선 사람의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칼이었다. 때문에 말씀을 ‘칼’(의료용)에 비유한 것이다. 만약 본문이 우리 시대에 기록되었다면 X-ray나 MRI에 비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의료용 칼처럼 우리의 내부를 해부해서 훤히 다 들여다보고, 다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의 특징
본문은 하나님 말씀의 특징을 ‘살아 있는 말씀’(12)이라고 한다. 이는 참으로 지당하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도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은 것은 주변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주변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킨다. 시들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면 금방 생기가 돋는다. 살아 있는 물을 만나니까 소생하게 되는 것이다. 같은 물이라도 죽은 물은 화초를 살려내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는 것도 같은 의미다. 주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말씀이기에 살리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병든 자를 고치고, 장님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다시 살게 한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에 ‘활력이 있다.’(12)고 말씀의 또 다른 특징을 말한다. 이는 말씀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울게 하고, 웃게 하고,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한다. 움직이게 한다. 변화를 주고, 회개하게 하고, 구원을 받게 한다. 고치고, 치료하고,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세우고, 헌신하게 하고, 섬기게 한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것처럼 불처럼 우리 안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을 태우기도 하고, 해머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단의 진지나 거인 골리앗을 부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말씀이 살아있고 활력이 있기 때문이다.
두 날을 가진 검(two-edged sword)
본문은 이와 같은 말씀의 역동성을 ‘날선 양 날을 가진 검’에 비유를 하고 있다. 말씀을 ‘검’에 비유한 곳이 본문 말고 엡6:17절이 있다. 에베소서에 나온 검으로서의 말씀은 당시 로마 군인이 사용했던 ‘살상용’ 무기를 뜻한다. 하지만 본문에 나온 검은 살상용이 아니라 고치고 치료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의료용’ 칼을 뜻한다. 그러면 당시에 이와 같은 의료용 칼이 있었나? 이미 주전 800년 전에 인도에서 외과수술(성형수술)이 있었고, 그 때 사용되었던 수술도구도 그림으로 그려져 전해지고 있다. 그러니 성경저자도 수술도구인 칼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아무튼 말씀이 수술용 칼처럼 사람의 내부를 샅샅이 해부를 하는데, 심지어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갠다.’는 것이다. 여기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는 모든 인간성을 나타내는 수사적 표현이다. 이를 용어 축적법이라고 한다. 같은 내용인데, 용어 반복을 피하기 위해 다른 용어를 사용하면서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이다. 시편 119편이 좋은 예다. 말씀에 대한 다양한 용어(율례, 법도, 규례, 법, 말씀 등)를 사용하면서 말씀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말씀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가서 거기에 숨은 것까지 다 파헤치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뜻이다.
말씀의 이와 같은 특징을 통해 저자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우선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나의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나의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관통하여 살피시는 분,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다 보시고 다 아시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존재다(13). 숨길 것도 없고 숨길 수도 없는 존재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얼마나 악하고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죄인인가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서면 이 모두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의 문제점과 죄악을 다 들춰내신 이유가 심판의 근거로 삼기 위함이 아니다. 적어도 본문에서는 그렇다. 그 이유는 고치고, 치료하고, 회복하여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나를 회개로 이끌어 주님의 은혜와 복이 다시 흐르게 하기 위함이다. 어느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파리〉라는 시다.
엄마, 엄마
내가 파리를 잡을랑께
파리가 자꾸 빌고 있어!
‘여러분, 이 아이가 파리를 잡았을까요? 못 잡았을까요?’ 못 잡았을 것이다. 살려달라고 비는데 어떻게 잡았겠는가? 아니 어떻게 잡을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잘못했다고, 용서해달고 회개하면서 비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외면하시겠는가? 그래서 회개를 가장 안전한 길, 형통의 비결, 생명을 보장 받는 비결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런 회개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깨달아야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 앞에, 즉 나의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노출시켜야 한다. 그러면 말씀이 나의 죄를 보게 하고 알게 하여 회개하게 만든다. 그래서 치료하고 회복시켜 열매가 풍성한 복된 인생으로 세우신다.
‘후탁’교인
예전에 ‘후탁’교인이란 말이 나돈 적이 있다. 한 주 내내 성경책을 한 구석에 두었다가 주일 아침에야 비로소 표지에 쌓인 먼지를 ‘후~ 불고, 탁! 쳐서’ 들고 교회로 가는 사람이라는 조크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지퍼’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주 내내 성경을 지퍼로 잠가두었다가 주일날 들고 가는 사람이다. 실제로 이런 사람이 많다. 성경을 가지고는 있지만 전혀 읽지 않는 사람이 허다하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호박도 찌를 수 없고, 무도 자를 수 없는 ‘종이’ 칼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역동적인 날카로운 칼이 아니라 녹이 슬대로 슨 채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작가 카프카의 말이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큰 충격과 깊은 울림을 주는 말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꽁꽁 얼어붙은 마음, 돌처럼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도끼다! 문제는 우리가 늘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에 도끼는커녕 파리채만도 못하게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예리한 칼로 우리에게 작용할 수 있을까?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항상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해야 한다. 말씀이 좋아서 온통 거기에 마음을 쏟고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살아있는 말씀이 역동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말씀이 불이 되고, 말씀이 해머가 되고, 말씀이 도끼가 되고, 말씀이 예리한 칼이 되어 우리를 변화시킨다. 다음은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껌 같은 사람〉이란 시다. 말씀이 칼처럼 임한 사람도 껌처럼 변하게 된다.
껌은 빳빳하지요.
그러나 입속에 넣으면
사르르 녹지요.
아무리 나쁜 사람도 껌과 같지요.
모두가 나쁜 사람이라고
팽개쳐버려도
누군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주면
껌과 같이 사르르 녹겠지요.
딱딱한 마음이
껌과 같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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