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과 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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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502회 작성일 19-11-21 18:38본문
등불과 같은 말씀
시119:105~112
2019. 11/17. 11:00(추수감사주일)
도상(途上)의 존재
천상병 시인은 인생을 ‘소풍’이라고 했고, 박목월 시인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고 했다. 한 마디로 인생이란 길 위의 존재라는 뜻이다. 인생은 길이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길을 소풍처럼 즐겁게 걷고, 어떤 사람은 정처없이 걷고, 어떤 사람은 고행하듯 걷는다. 또한 순례하듯 걷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걷든 길에는 온갖 걸림돌이 많이 놓여있다. 그리고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넘어져서 다치기도 한다. 이런 인생길에서 나는 누군가 걸려 넘어져서 다치게 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누군가의 앞에 놓여있는 걸림돌은 치워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불교에서는 우리를 걸려 넘어지고 다치게 만드는 대표적인 걸림돌을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이를 ‘탐진치’(貪瞋癡)라고 부른다. 탐(貪)은 욕심이고, 진(瞋)은 성냄이고. 치(癡)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삶을 사는데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형상화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꾸며놓은 것이 「서유기」라는 중국고전소설이다. 여기에 현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가 등장인물로 나오는데, 당나라 승녀 현장법사가 이 세 인물(손오공, 사오정, 저팔계)과 함께 서역으로 불경을 가지러 가는 구도여행(求道旅行)이다. 바로 이 세 주인공이 탐진치를 상징한다. 어리석은 손오공, 성을 잘 내는 사오정, 탐욕스러운 저팔계. 서유기의 큰 맥락은 결국 ‘마음 다스리기’ 여정(旅程)인 셈이다. 이들은 여행을 하다가 아주 흥미로운 곳에 이르게 된다. 바로 ‘통천하’(通天河)다. 넓고 큰 강인데, 이 강에는 온갖 잡귀가 살고 있다. 그리고 이 강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든지 다 가라앉힌다. 심지어는 새의 깃털도 가라앉게 만든다. 우리 양미자 님의 그림자도 가라앉혀 버린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뜨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이 강을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통천하(通天河)를 건너야
그러나 딱 하나 뜨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진리를 구하다가 좌절한 사람의 해골이다. 그래서 그들은 해골을 모아서 뗏목을 만들어 그것을 타고 건너갔고, 성공적으로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소설의 교훈은 참된 삶에 이르기 위해선 마음(탐/진/치)을 잘 다스려야 하고, 아울러 무수히 많은 사람의 희생(해골 뗏목)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주일 ‘내 길의 빛과 같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이 지향하며 나아가야 할 목적(적)과 방향을 제시하고 가르쳐준다고 했다. 그런데 목표와 방향만으로 안전한 목적지의 착륙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서유기에서 진리를 구하다 요괴에게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해골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들 역시 현장법사 일행처럼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달려왔지만 통천하를 건너지 못했다. 그런데 현장법사 일행은 가라앉지 않고 물위를 떠다니는 진리를 구하다 희생된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 통천하를 건넜다.
통천하는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통천하는 인생의 상징이고, 이 세상의 상징이다. 이 세상도 공중권세를 잡은 자 사단의 권세아래 있고, 사단의 수하인 잡귀의 집합소가 이 세상이다. 중력이 대기권에 두루 힘을 미처 모든 존재를 잡아당기고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은 사단의 세력이 주님의 나라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좌절시켜 주저앉게 만든다. 중력의 법칙을 극복하는 것이 부력인 것처럼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는 비결은 주님의 말씀뿐이다(마4:1~). 그래서 본문은 내 길의 빛 앞에 ‘내 발의 등’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방향을 제시해주는 빛도 중요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장법사 일행이 진리를 구하다 좌절한 한 사람 한 사람의 해골을 모아 뗏목을 만들어 통천하를 건넜던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 매순간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사단의 지배아래 있는 통천하와 같은 인생의 바다를 성공적으로 건널 수가 있다.
등과 빛의 차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 본문 105절의 전반부 말씀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발의 등’에서 ‘발’은 히브리어로 ‘레겔’(רגל)인데, 여기서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 손이나 발, 눈, 귀는 쌍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쌍수를 사용한다(대부분의 외국어에는 단수, 복수, 쌍수가 있음). 그런데 본문은 발을 ‘라글라임’(רגליים)이라는 쌍수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수형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저자가 착각하여 이렇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렇게 한 것이다. 그것은 발걸음 하나하나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네르’(נֵר)는 ‘등’이나 ‘등잔’을 의미한다. 이것은 뒤에 나온 ‘빛’(אור)과 다르다. 이 빛은 근원적인 빛으로 태양처럼 발광(發光)에서 나오는 빛이다. 스스로 뿜어내는 빛이다. 반면에 등은 사람이 직접 불을 붙여야하고, 또한 들고 다니면서 사용해야 한다. 개인적 용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 정도면 말씀이 ‘내 발의 등’이라는 의미가 확실해 질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 영접하여 믿는 순간 근원적인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사는 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인생의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밝히 보여준다. 이것이 내 길의 빛과 같은 말씀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러한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아는 것과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내 발의 등과 같은 말씀’이다. 이 말씀의 등을 켜서 들고 한 걸음 한 걸음을 비추면서 매일 순간순간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내 길의 빛이 제시하는 방향과 목표를 향해 올바르게 갈 수가 있다. 참고로 구약시대 성막 안에 일곱 ‘촛대’(מְנוֹרָה)가 있었는데, 이 촛대와 등이 어원이 같다. 그리고 제사장의 중요한 사역 중에 하나가 이 촛대의 불을 꺼지지 않게 하는 것, 즉 촛대의 불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몸이 성전(막)이고, 우리를 제사장이라고 한다. 제사장의 중요한 사역이 제단의 불은 물론 성막 안에 있는 촛대의 불을 꺼지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임재하신 성전된 우리의 몸을 밝히는 것, 발걸음 하나하나를 인도하는 등불을 켜서 비추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래서 본문의 저자는 결심을 한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106).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마음, ‘해보겠다는’ 마음, ‘하겠다는’ 마음이 중요하다. 물론 결심해도 흔들리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결심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크다. 그러니 결심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실패할지라도 실패한 그 자리에서 또 결심해야 한다. 다른 한 가지는 말씀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저자는 말씀을 지키기로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는 내 즐거움이 됨이니이다.”(111). 여기서 ‘즐거움’을 뜻하는 ‘싸손’(ששון)은 ‘매우 즐거워하다.’는 뜻으로 가장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표현이 시119편에 12번이나 반복이 되고 있다. 말씀 자체가 그의 가장 큰 행복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저자의 말씀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이 행복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이렇게 말씀을 즐거워하니까 다음 고백이 따르게 된다.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112). 마음을 기울인다는 것은 말씀에 마음을 붙들어 맨다는 뜻이다. 말씀에 온통 마음을 쏟아 붙는, 즉 말씀에 몰두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 말씀은 발걸음 하나하나를 비추는 등불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하 경험(Aha-experience)
무언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나 발견의 순간을 심리학적으로 ‘아하 순간’(Aha-moment)이라고 한다.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탕에 들어갔을 때 물의 넘침을 보고 부력(浮力)의 원리를 발견하고 너무 기뻐서 ‘유레카’를 외쳤다는 그 순간을 뜻한다. 바로 그 순간을 아하 순간이라, 혹은 ‘아하 경험’(Aha-experience)이라고 한다. 신학자 제임스 로더(J. Loder) 교수는 시40:7이 다윗의 ‘아하 경험’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했다. 여기서 다윗은 ‘이 책이 나를 위해 쓰여졌다니!’ 하고 외치면서 무릎을 쳤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윗의 믿음이 새로워지고, 다윗의 감격과 감동과 감사가 시작된다고 했다. 모든 말씀이 발걸음 하나하나를 비추는 등불이고,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비추는 인생길의 빛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이후 다윗이 어떻게 살았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것이 말씀에 대한 ‘아하 경험’이다.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의 감격과 감동이 있어야 말씀에만 집중하는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통천하와 같은 이 세상에 가라앉지 않고 하루하루 매순간순간 발걸음 하나하나에 말씀의 등불을 비추며 성공적으로 건널 수가 있다. 그러므로 본문의 저자처럼 평생 말씀을 지키며 따르겠다는 결심과 말씀에 삶을 완전히 붙잡아 매고 말씀에 집중하는 삶을 살겠다는 태도를 갖자! 이런 결심과 태도가 우리를 말씀에 대한 아하 경험으로 이끌고, 이 경험이 말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의 감격과 감동을 통해 말씀에만 집중하는 말씀의 사람, 발걸음 하나하나를 말씀으로 인도받는 삶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에게는 도달해야 할 목적지와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내 길의 빛과 같은 말씀’을 통해 제시받았다. 이제 한 걸음 한 걸음 ‘내 발의 등과 같은 말씀’의 인도를 받는 일만 남았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말 그대로 감사로 물든 삶,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 또한 말씀에 대한 아하 경험에서 비롯된다. 감격스럽고 감동적인 말씀에 대한 경험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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