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과 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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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385회 작성일 19-12-13 09:27본문
거울과 같은 말씀
약1:22~25
2019. 12/8. 11:00
생존배낭
내가 학교 다닐 때만해도 우리나라는 지진 안전지대라고 배웠다. 몇 년 전 포항지역에서 지진이 연거푸 일어난 후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보도가 각종 매체를 통한 쏟아지고, 북핵문제로 전쟁 위기설까지 퍼지면서 불티나게 팔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비상가방(일명 ‘생존배낭’)이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지진과 전쟁 위기설로 불안감이 확산된 탓이다. 지금도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보면 여러 종류의 비상배낭이 게시되어 있다. 싸게는 수만 원대에서 비싸게는 수십만 원대까지 다양한 세트가 나와 있다. 도대체 그 안에 어떤 물건이 들어있나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대개 이런 것들이었다. 침낭, 담요, 비상식량, 휴지, 라이터, 세면도구, 방한복, 나침반, 호루라기, 휴대폰 보조배터리, 손전등, 미니 라디오, 비상약 등. 말 그대로 꼭 필요한 생활필수품, 아니 생존필수품이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엔 여기에 빠진 것이 하나있었다. 그것은 성경이다. 성경이야말로 생활필수품이고, 생존필수품이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산소와 같은 소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소망의 닻, 소망의 별, 소망의 날개, 소망의 줄(끈)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성경을 거울에 비유하고 있다. 거울처럼 우리를 들여다보는 것이 말씀이라는 것이다. 한자로 말하면 성경(聖經, Holy Bible)은 성경(聖鏡, Holy Mirror)이다. 그렇다. 성경은 나를 비춰보는 거울과 같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생긴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할지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어떻게 아름답게 단장하면 좋을지도 판단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보면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속일 수가 없다. 그리고 어떻게 달라져야 될지 알 수 있고,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인생을 점점 아름답고 가치있게 가꿀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을 이렇게 정의해 볼 수 있다.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서 사는 삶이다. 그러면 우리가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서 살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1. 성찰(省察)
성찰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살피는 것입니다. 어느 철인(哲人)이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기가 힘들다. 심지어 자신의 외모도 거울을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심지어는 상대방이 말을 해줘도 믿지가 않는다. 내가 직접 보지 않은 일을 쉽게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거울을 처음 보고서 무척 신기해했다. 여자들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게 누구야? 입이 왜 이렇게 크지? 볼이 좀 더 올라가면 더 예쁠 텐데……’ 곁에서 누군가 ‘그게 너야!’ 하고 말하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남자들도 거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이 나더러 더러운 사내라고 말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 또 이런 사람도 있었다. ‘이게 누구지? 너무 못 생겼잖아!’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그게 바로 너야!’ 라고 말하자 화를 벌컥 내며 거울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이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외모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거울은 내면의 모습은 볼 수가 없다. 내면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볼 수 있다하여 말씀을 거울에 비유한 것이다. 말씀의 거울을 통해 우리의 영혼과 인격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말씀에 이런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마치 예리한 수술 칼로 인체를 샅샅이 해부를 하듯이 말씀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감찰하며 드러낸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된다. 그래야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두 손 들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게 된다. 나의 죄를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찾게 되고 부르게 된다. 이런 말이 있다. 국어를 잘 하려면 주제 파악을 잘 해야 하고 수학을 잘 하려면 분수를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얼마나 부족하고 추하고 악한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분수를 알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게 되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게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매일 말씀의 거울 앞에서 사는 삶이라고 한 것이다.
2. 회개
이와 같은 철저한 자기 성찰은 회개로 이어진다. 거울을 보고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방치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즉시 씻고 닦아내게 된다. 침을 발라서라도 닦아내게 된다. 요즘 외모에 관심이 많아서 작은 잡티만 생겨도 제거하고, 주름도 펴고, 점도 빼고, 피부도 벗겨낸다. 거울을 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말씀의 거울을 자주 보면 자신의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을 즉시 회개하는 것이다. 행2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심을 담대히 증거했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의 반응이 어떠했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장본인이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7). 말씀의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에 놀라 이렇게 외친 것이다. 며칠 전만 해도 나사렛 예수는 마땅히 죽어야할 이단자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목 박으라고 외쳤다. 그런데 베드로를 통해 말씀을 듣고 보니 나사렛 예수님이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였다는 것이고, 그 메시야를 자신들이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자 이런 성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외친 것이다. 그래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탄상하게 된 것이다.
영화「벤허」 (Ben-Hur)를 잘 알 것이다. 1959년에 만들어진 영화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의 저자는 루 월리스(Lew Wallace)다. 그는 장군출신으로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지독한 반(反)기독교적 인사였다. 그가 얼마나 기독교를 증오했던지 이런 결심을 하게 됐다. 성경의 모순을 파헤쳐 기독교를 말살할 수 있는 명저를 저술하자! 이런 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하다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읽을수록 자신이 작아지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결국 그는 회개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을 저술하게 된다. 소설「벤허」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 최고의 기독교 명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소설과 영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을 진지하게 노출시킨 사람은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벤허의 저자처럼 회개할 수밖에 없다.
회개는 실천이다.
그런데 회개는 단순히 뉘우침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돌아서는 행동이다. 행동으로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회개다. 그래서 회개는 실천이다. 말씀의 거울을 보고 깨달았으면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자기기만을 하는 것과 같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 실천하지 않으려면 왜 거울을 보느냐는 것이다. 거울을 본다는 것은 실천이 전제되어 있다. 문제가 있는 지를 살펴서 고치겠다는 목적으로 거울을 본다. 더 예쁘고 멋지게 단장하려고 거울을 본다. 말씀의 거울인 성경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읽고 보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목적은 삶의 변화다. 삶의 변화는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실천이 따라야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난다. 세례요한의 회개설교를 듣고 많은 유대인이 죄를 뉘우치고 세례를 받기 위해 나아왔을 때 요한은 외쳤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눅3:8). 그러면서 그들이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들을 제시했다(3:11~14).
소금을 관상용으로 쌓아둔 사람은 없다. 성경 역시 감(관)상용이 아니라 실천용이다. 19세기 복음전도자 무디(D. L. Moody)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해보고 하나님이 그대로 성취하시고 축복하심을 경험했다. 20년 전 미국 시카고 무디신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캠퍼스 구내 무디 기념관에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헌성경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봄)그 성경의 여백에서 T. P. 약자표시를 많이 보았다. T는 Tried(‘실천해 보았다’)의 약자이고, P는 Proved(‘검증되었다’)의 약자다. 무디는 그저 말씀만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보고, 그것을 삶의 검증하여 그 축복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렇다. 매일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을 바로잡아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여 검증하는 삶의 반복이어야 한다. 오늘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이다. 두 번째 주일은 ‘회개’의 의미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자는 것인데, 그 준비가 회개다. 회개는 소극적으로 비우고 소재하고 수리하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주님의 뜻을 구하고 찾고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말씀의 거울 앞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함으로 맞이할 준비를 잘 갖추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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