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과 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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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397회 작성일 19-10-25 11:29본문
채찍과 같은 말씀
전12:11~12
2019. 10/20. 11:00
닭 울음과 망태
우리나라에서는 교회의 상징으로 십자가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마다 십자가 첨탑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교회 첨탑 위에 닭이 있는 것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화제로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던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첨탑 위에도 수탉이 앉아있다. 이스라엘에 가면 시온산 남동쪽 기드론 계곡과 게헨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갈리칸뚜’(Gallicantu)라는 ‘닭 울음’성당이 있는데, 여기도 첨탑에 닭이 있다.
이 배경이 되는 사건이 성경에 나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셨다. 식사를 마치고 주님께서는 당신이 잡혀가시면 제자들이 모두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장담했다.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의 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번엔 주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너는 새벽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거야!’고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펄쩍 뛰면서 부정했고, 자신은 주님을 위해 죽을 것도 각오가 되었다고 장담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었다. 유대병사가 와서 주님을 잡아가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다. 하지만 베드로는 주님이 잡혀간 곳으로 따라갔다. 그곳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했다. 그때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렸고, 베드로는 닭울음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집 밖으로 나가서 통곡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때부터 베드로는 닭울음소리만 들으면 통곡을 했다고 한다. 주님을 부인한 것이 부끄럽고 죄송해서, 그럼에도 회복시켜 제자가 되게 하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울었다. 이것이 유럽교회가 교회 첨탑에 닭을 올려놓은 배경이다. 한 마디로 주님의 말씀에 늘 깨어있자는 의미다.
베드로와 같이 내게도 나를 깨우는 사건이 하나 있다. 중 2학년 쯤 되어 공부는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다가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다행이 부모님이 글을 몰랐기 때문에 성적을 적당히 둘러댈 수가 있었다. 그런데 형에게 발각이 되었고, 형이 나를 집 뒤로 데리고 갔다. 맞을 각오를 하고 따라갔는데 형이 처마 안쪽에 걸려있는 검게 그을린 망태를 가리키며 누가 만들었는지 아냐고 물었다. 당연히 모른다고 대답했다. 형이 아버지에게 공부하기 싫다고 학교가기 싫다고 차라리 일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면서 때렸고, 아버지에게 흠뻑 매를 맞고 나서 만든 것이 저 망태라고 했다. 그래서 가끔 망태를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두고 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공부하지 않으면 자기처럼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때 형의 말에 충격을 받아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후로도 형의 망태를 보면서 나 역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형도 없고, 고향도 수몰(水沒)이 되어 형의 망태를 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내 마음 속에 형의 망태가 있다. 그래서 베드로의 닭울음소리처럼 나를 깨운다.
찌르는 채찍
본문에서, 전도서의 저자는 베드로의 닭울음소리와 같고, 나에게 형의 망태와 같은 것이 지혜자의 말씀이라고 한다. 저자는 지혜자의 말씀을 ‘찌르는 채찍’에 비유하고 있다. 이 채찍은 짐승을 다루는 도구로 가죽 끈 끝에 작은 쇠붙이나 짐승의 뼛조각을 붙인 긴 끈이다. 짐승이 길에서 벗어나거나 더 빨리 가도록 재촉할 때 주로 사용한다. 한 눈 팔지 않고 바른 길로 곧장 가도록 깨우치고 다그치는 도구가 채찍이다. 그러니 채찍은 ‘훈육’(訓育), 곧 징계와 훈련의 상징인 셈이다. 이것이 찌르는 채찍의 기능이다. 여기서 지혜자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찌르는 채찍은 ‘말씀의 기능’을 뜻한다. 성경은 말씀의 기능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3:16).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데 있다.’(딤후3:17). 한 마디로 ‘바르게’(징계) 하고, ‘온전하게’(훈련) 하는 것이 말씀의 기능이라는 뜻이다
바르게 함과 온전하게 함
신앙생활은 잘못을 바로잡아(‘바르게 함’) 모든 선을 행할 능력을 갖추도록 최신식으로 계속 업데이트를 시키는 것(‘온전하게 함’)이다(여기서 ‘온전하다’는 뜻의 헬라어 아르티오스αρτιος는 ‘완전히 적합한’, ‘최신식의’, ‘업데이트된’이란 뜻임). 징계를 통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바르게 만들고 훈련을 통해 최신식으로 계속 업데이트시켜 온전함에 이르게 만든다. 그 도구가 ‘찌르는 채찍과 같은 말씀’이다. 성경에 나온 수많은 신앙의 영웅이 모두 찌르는 채찍과 같은 말씀을 통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사람이 믿음의 세 번째 조상 야곱이다.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들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장자의 복을 약속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때를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다가 아버지(이삭)와 형(에서)을 속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집을 떠나 멀리 외삼촌(라반) 집에서 살아야했다. 그리고 20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형(에서)과의 화해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형과의 화해가 극적으로 이뤄졌다. 야곱은 다시 형과 헤어져 아버지 집을 떠나던 날 하나님과 약속했던 장소 ‘벧엘’로 향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야곱은 곧장 벧엘로 가지 않았다. 대신 세겜 성 근처 ‘숙곳’이란 곳에 짐을 풀고, 그곳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창33:)이고 붙이고, 그곳에서 살았다. 성경에 나온 어떤 지명보다 이름만 놓고 보면 이보다 거룩한 곳은 없다(‘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 이것은 야곱이 억지스럽게 이름만 이렇게 붙여놓은 것이고,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마 벧엘을 잊기 위한 야곱의 자기 합리화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곳에 머문 동안 야곱에게서 벧엘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찌르는 채찍을 보내셨다. 그의 외동딸 디나가 세겜 성주의 아들 하몰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다. 이쯤에서 야곱이 깨닫고 벧엘 행(行)을 서둘렀으면 좋았으련만 야곱은 그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그 다음에 더욱 고통스러운 채찍이 가하졌다.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화친을 빙자하여 세겜 성의 모든 남자를 살육하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창34:). 그때서야 비로소 야곱이 서둘러 숙곳을 떠나 벧엘로 향했다. 늦게라고 깨닫고 돌이키게 된 것이다. 이후로도 야곱은 찌르는 채찍과 같은 말씀으로 다듬어져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잠들지 마라! 깨어라!
하지만 성경을 보면 찌르는 채찍과 같은 말씀에 모두가 야곱처럼 반응한 것은 아니다. 햇볕을 받을수록 돌처럼 굳어지는 떡과 같이 찌르는 채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완고해져서 그대로 망한 사람도 많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당시 이집트 왕 바로가 대표적이고, 거짓 선지자 발람, 여리고 성의 왕, 심지어는 이스라엘 왕 사울도 여기에 속하고,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었을 때 북쪽 왕국의 왕들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남 왕국의 왕들도 여기에 속한 사람이 많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찌르는 채찍과 같은 말씀을 보냈지만 마음을 닫았다. 마음이 무디어지거나 죽으면 이렇게 된다. 잠이 든 사람은 일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 죽은 사람은 그 무엇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영적으로 잠이 들거나 영적으로 죽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이 찌르는 채찍과 같은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려면 영적으로 민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그것을 ‘기도’라고 말씀한다. 기도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셔서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다. 이는 ‘기도하라’는 말씀이었다. 기도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 영적으로 민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를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 말씀이다. 종이에 붙은 불은 금방 꺼진다. 하지만 기름종지에 꽂아두면 계속해서 타오른다. 이것이 말씀과 기도의 관계다. 기도의 불을 계속해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이 말씀의 기름이다. 말씀을 기름삼아 기도의 불이 계속 활활 타오르는 사람은 마음이 깨어 있고, 영적으로 민감하다. 이런 사람은 찌르는 채찍과 같은 말씀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다. 그래서 알고, 깨닫고, 고치고, 최신식으로, 계속 업데이트시켜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무뎌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잠들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기도의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말씀의 기름을 부읍시다! 그리하여 찌르는 채찍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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