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과 같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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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080회 작성일 19-11-08 07:38본문
꿀과 같은 말씀
잠24:13~14
2019. 11/3. 10:00(전교우 나들이, 여수 봉화산 산림욕장)
나는 꿀보다!
나는 꿀을 좋아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영향이다. 아버지가 꿀을 맹목적으로 좋아했다. 그렇게 좋아하게 된 이유가 있단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해수(咳嗽)가 심히 목에 가래가 많았다고 한다. 늦은 여름 날 나무를 해서 내려오다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더위를 식히고 있는데 계곡 바위틈으로 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올려다보니 바위틈에 커다란 벌집이 있고 꿀이 가득 들어있었다. 물속에 앉아 긴 작대기로 벌집을 쑤셨더니 벌집이 물위로 뚝뚝 떨어졌고 그것을 그대로 집어먹었다. 한참을 집어먹다 꿀에 취해서 그만 잠이 들었다. 얼마 쯤 시간이 지난 다음 답답해서 잠에서 깨어났는데, 구역질이 나서 토를 했다. 스스로 놀랄 만큼 엄청난 양의 가래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나자 속이 개운해졌고, 그날 이후 가래도 기침도 사라졌고, 한 겨울에 맨발로 다녀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토록 꿀을 좋아하게 되었고 나에게도 자주 권해서 먹다보니 나도 꿀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꿀 사랑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꿀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좋아하는 식품이다. 꿀은 이 지구상에서 상하지 않는 유일한 식품(이집트 피라미드에서 약 3천 년 전의 꿀단지가 발견되었는데 변질이 되지 않았다고 함)으로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꿀은 실제로도 몸에 좋은 유익한 식품이지만 ➀귀한 것, ➁좋은 것, ➂맛있는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 꿀 밤, 꿀 고구마, 꿀 사과, 꿀 호박, 꿀 배, 꿀 사탕, 꿀 떡 등. 이렇게 먹는 것에 ‘꿀’자가 들어간 것은 맛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맛이 있는 것을 ‘꿀맛’이라고 말한다. 또한 좋다, 귀하다는 뜻(유익하다)으로 꿀 팁, 꿀 정보, 꿀 직장, 꿀 보직, 꿀잠, 꿀단지란 말을 사용한다. 서양에서 배우자를 ‘허니’(Honey)라 부르고, 신혼여행, 혹은 신혼기간을 허니문(Honeymoon)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물론 요즘에는 꿀보다 맛있는 것이 많다. 문제는 맛있는 것 대부분이 맛은 있는데 몸에 유익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린 이런 것을 불량식품이라고 한다. 또한 몸에 유익한데 맛이 없는 것도 있다. 그런데 꿀은 맛도 있고 몸에 유익하기도 하다. 생각해보니 ‘꿀’이란 글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우리 교회 모든 지체가 꿀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디에서든 맛을 내는 사람, 좋은 사람, 귀한 존재, 유익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의 저자들은 이 맛있고, 좋고, 귀한 꿀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꿀과 같은 말씀’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눈이 열려야 눈에 들어온다.
영적인 것은 물론 이 세상의 근본은 눈이 열려야 눈에 들어온다. 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이 열려야 보게 된다. 열린 만큼 보게 되고, 열린 만큼 알게 되고, 열린 만큼 이해하게 된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겉으로는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이를 잘 보여준다. 동굴 안에서만 살던 종족 중에서 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동굴 밖을 나왔다. 동굴 안과 밖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빛이 있고, 색깔이 있고, 향기가 있고, 여러 종류의 생명현상이 가득했다. 세상이 시간마다 바뀌었다. 아침 다르고, 오전 다르고, 오후 다르고, 저녁이 달랐다. 그는 동굴로 다시 돌아가서 이 놀라운 사실을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옥에 갇혔다. 동굴세계는 다시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곰팡이가 슬고, 박쥐만 날아다니고, 습기가 가득하고, 항상 어둠침침한 동굴 안의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인 채 살아갔다. 무슨 말인가? 일단 동굴이라는 세계에 길들여지면 동굴 밖의 세계를 아무리 설명해줘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굴 밖의 세계에 대한 눈이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동굴바깥 세상에 대한 이해하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한 것이다.
건강한 신앙생활도 눈이 열려야 가능하다. 특히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주님이 곁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한다. 주님께서 죽으신 다음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랬다(눅24:).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들과 동행중에 계셨는데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예루살렘에서 일을 보고 시골로 내려가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풀어 설명해주셨지만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눈이 주님께서 떡을 가지고 기도하신 다음 떼어주실 때 열렸다(눅24:30). 마치 장막이 걷히듯 눈이 활짝 열렸다. 눈이 열리니까 지금까지 함께 했던 길동무가 부활하신 주님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때서야 주님을 알아본 것이다. 주님의 부활이 사실인 것을 보게 되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영적인 눈이 열리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적인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될까? 그것은 꿀과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한다. 오늘 본문을 비롯해서 성경에는 꿀을 말씀에 비유한 곳이 여럿 있다. 꿀처럼 말씀이 우리에게 최고의 맛과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최고의 맛을 주는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살게 하고,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가장 맛있고 유익한 양식이다. 본문은 ‘장래의 보장과 끊이지 않는 소망’(14)을 준다고 말씀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눈을 밝혀준다.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을 때다.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삼상14장). 왕의 아들 요나단의 기습으로 힘을 얻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뒀다. 그런데 이 때 왕이 엉뚱한 맹세를 해버린다. ‘블레셋 잔당을 완전히 물리치기 전에 어떤 음식물이든지 입에 대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 무슨 해괴한 맹센가! 잘 먹고 힘내서 싸우자고 해야지 먹지 말고 싸우라는 것이다. 지도자가 어리석으면 백성이 고생을 하는 법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수풀로 도망치는 블레셋 사람을 쫓아 수풀로 들어가니 숲속에 야생 꿀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맹세를 들은 이스라엘 사람은 배가 고픈데도 꿀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맹세를 듣지 못한 요나단이 꿀을 보고 지팡이로 꿀을 찍어 한 입 먹었다. 그랬더니 ‘눈이 밝아졌다.’(14:27).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기력이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꿀과 같이 단맛을 내는 열이 많은 음식은 인체에서 에너지원이 되어 기운이 나고 눈이 밝아지게 한다(동의보감, 사상의학). 몸이 따뜻해지면 마음도 따뜻해지고 활발해진다. 말씀이 바로 이와 같다. 기진맥진 영혼을 소성하게 하고, 어두운 눈을 밝게 해준다(시19:7,8). 그래서 성경의 저자들이 말씀을 꿀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고, 꿀보다도 말씀을 더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고, 또한 더 사랑하고 사모하라고 우리에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더욱 밝게 하는 것은 요나단이 꿀을 먹고 눈이 밝아졌던 것처럼 ‘꿀과 같은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이 기도하시고 떼어주신 떡을 받아먹을 때 눈이 열린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먹을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19:7,8). 우리의 영적인 눈을 밝히는 것이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에서 부활의 주님은 라오디아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 먼 것을 알지 못하느냐....내가 너를 권하노니....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7,18). 말씀의 안약(眼藥)을 사서 발라 눈을 뜨라는 말씀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서’라는 말씀이다. 이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을 뜨고 더욱 밝게 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서 발라 보게 하라!
세상에 공짜 없다. 사실 은혜도 공짜가 아니다. 받는 편에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누군가가 대신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지불한 것을 내가 거저 누리는 것을 은혜라고 한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도 구원을 위해 우리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는 것이지, 실제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이란 선물을 주시기 위해 목숨을 주셨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값비싼 희생의 결과물이다. 우리의 영적인 눈을 뜨기 위해서도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대가를 지불하면서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와 같은 소위 ‘말씀을 먹는’ 일련의 행위를 위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고, 정성을 쏟고,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긴급한 일에 쫓겨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게 된다. 잠언 저자의 말이다.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같이 찾으라.”(잠2:4). 말씀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가 요구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은을 구하고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사람처럼 말씀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말씀이 꿀과 다른 점은 누구에게나 단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씀의 맛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말씀의 첫 맛은 조약(助藥)처럼 입에 씁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몸에 좋다는 이유 때문에 조금씩은 먹습니다. 그러는 중에 말씀은 강냉이와 같은 맛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다지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단계가 지나면 말씀은 마침내 토종꿀 맛으로 변합니다. 이상하게도 많이는 못 먹습니다. 이유는 말씀 한자 한자가 내는 맛이 너무나 달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까지 이르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충만한 만족 가운데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말씀에 대한 맛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성숙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말씀에 대한 맛이 변하고, 신앙이 성숙한 사람에게는 말씀의 맛이 꿀맛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말씀을 위해 대가를 지불한 사람은 말씀에 대한 맛의 변화와 함께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먹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에 대한 맛의 변화와 함께 신앙성숙을 보장 받는 것은 물론 영적인 눈이 활짝 열려 더욱 풍성한 신앙생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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