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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과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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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217회 작성일 11-12-2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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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과 같은 사람

마2:10~12

2011. 12/25(성탄절)   11:00

네 번째 동방박사, ‘알타반’

일반적으로 상식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식과 사실이 다를 수 있다. 성경에 나온 동방박사의 수에 대한 이야기가 그 예다. 대부분이 동방박사를 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상식). 하지만 세 명이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사실). 단지 본문에 나온 세 종류의 선물(황금, 유향, 몰약)에서 세 사람을 유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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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의하면 동방박사가 네 명이었다고 한다. '알타반'이란 네 번째 박사가 있었는데, 약속 장소를 정하고 세 명의 박사들보다 늦게 출발했다. 그가 약속 장소에 거의 이르렀을 때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낙타에 싣고 주막을 찾아가 주인에게 그를 맡기면서 새로운 왕을 위해 준비한 세 가지 예물(루비, 청옥, 진주) 중에서 루비를 주며 그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장소로 갔지만 세 명의 박사들은 벌써 떠나고 없었다. 그는 별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는데, 박사들은 이미 사흘 전에 경배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갔고, 태어난 왕 역시 애굽으로 피신하고 없었다. 그 때 그는 갑작스런 말발굽 소리와 비명소리,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갔다. 군인들이 아기를 죽이려는 것을 보고 그는 남은 두 가지 예물 중 청옥을 꺼내 군인에게 주어 그 아기를 살렸다. 그리고 왕을 찾으러 애굽으로 내려갔으나 그는 끝내 왕을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왕을 찾아 33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그 왕이 골고다에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마지막 남은 진주로 왕을 구하겠다고 골고다로 달려가다가 노예로 팔려가며 울부짖는 소녀를 만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왕을 구하려던 그 진주를 주고 그녀를 구해주었다. 이제 그에게는 아무런 예물도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왕께 경배하려고 평생을 찾아다녔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한 채 이렇게 죽게 되었고, 그분께 드리려고 준비한 보석마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때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알타반! 너는 정말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이다. 난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이나 받았다. 네가 소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다. 네가 만난 불쌍한 사람들이 곧 나였느니라.” 그리고 알타반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두었다.

 

선물이 되는 삶

초대교회시절 섬기는 삶의 중요성을 교훈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 생각한다. 힘든 환경 중에도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아주었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아름다운 삶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다. 궁지에 몰린 이웃을 돕고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루비나 청옥, 진주와 같은 보석이 아니라 섬기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 성탄절에 주님께 드릴 우리의 가장 귀한 선물은 우리 ‘자신’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께 선물이 되고 있는가? 주님께 ‘선물이 되는 삶’, ‘선물과 같은 삶’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렸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주님의 왕(황금) 되심과 완전한 대제사장(유향), 최후의 구원자(몰약) 되심을 상징한다(W. Barclay). 또한 선물이 되어야 할 삶의 상징이기도 하다.

 

첫 번째 예물 ‘황금’이다.

황금은 매우 귀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오직 왕께만 바치는 예물로 왕권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황금은 ‘왕을 위한 예물’로서 예수님이 ‘왕 중의 왕’임을 뜻한다. 그리고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렸다는 것은 왕이신 주님께 진지한 믿음의 경배를 드린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주님께 드려야 할 선물은 주님이 나의 왕이심을 인정하는(Lordship) 것이다.

 

어느 드라마에서 본 내용이다. 남편과 사별을 한 여인이 아들이 하나 딸린 사람과 재혼을 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새엄마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는 것은 물론 인정하지도 않았다. 혼기가 넘었지만 결혼은커녕 여자와 사귀는 것조차 꺼렸다. 그런 그에게 운명처럼 사랑하는 여자가 나타났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을 때, 그는 용기를 내어 새엄마에게 ‘어머니’라고 부른다. ‘어머니’라는 이 뜻밖의 소리에 이 여인은 너무 놀라고 감격스러워 자기 방으로 들어가 뜨거운 눈물을 흐렸다. 그 동안 어머니로 인정받지 못하고 살다가 인정을 받게 되니 이렇게 감격스러워 한 것이다. 우리 주님의 마음도 같을 것이다. 믿는 우리로부터 ‘주되심’(Lordship)을 인정받을 때 가장 기뻐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기도에 주목하시고, 기뻐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곧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이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없고,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을 드릴 수 없고, 마음을 토하여 기도를 드릴 수가 없다. 주님이 원하시는 선물,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물은 일상 속에서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예물 ‘유향’이다.

유향은 감람과에서 나는 수지(樹脂)로서 ‘올리바눔’(olibanum)이라고 하며, 그 향기가 그윽하다. 때문에 옛날부터 아라비아나 중근동지방에서 이 유향을 신성한 제사나 성소의 분향에 사용된 향료다. 이 값진 향료를 태우고 봉헌하는 예식은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향은 ‘제사장을 위한 예물’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을 의미한다. 제사장을 라틴어로 ‘Pontifex’라고 하는데,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끈긴 다리를 이어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 혹은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톨스토이의 「나무고백」이란 책에 불행한 환경에 처했을 때 보일 수 있는 네 종류의 인간상이 나온다. 가령 비가 많이 와서 다리가 떠내려가 버렸을 때, 다음과 같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첫 번째 사람은 ‘잘됐다. 술이나 마시자!’하고는 술을 진탕 마시고 자버린다(회피형). 두 번째 사람은 ‘하필 내가 왔을 때 다리가 떠내려갈게 뭐람’하고는 강가에 주저앉아 원망하며 운다(포기형). 세 번째 사람은 물속에 들어가 열심히 헤엄쳐 건너간다(이기적 노력형). 네 번째 사람은 자기도 건너야 하지만 뒤에 올 다른 사람도 건너 갈 수 있도록 다리를 만들기 시작한다(이타적 배려형). 네 번째 사람이 유향과 같은 사람이다. 막힌 곳은 뚫어주고, 끈긴 곳은 이어주고, 깨진 곳은 붙여주고, 허물어진 곳은 세워주는 사람. 그래서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주님을 닮은 우리 신자의 삶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다리를 놓는 삶이 유향처럼 주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큰 기쁨을 선사하게 된다. 다리를 놓는 삶, 그래서 서로 화목하게 하는 삶이 주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선물이다.

 

세 번째 예물 ‘몰약’이다.

몰약은 아프리카나 아라비아 지방에 자생하는 감람과 식물인 콤미포라 미르라(C.myrrha)나 콤미포라 아비시니카(C.abyssinica) 등의 수피(樹皮)에 상처를 내어 채취한 천연고무수지다. 향기가 좋고 방부제의 성질이 있어서 예부터 시신을 정화하고 보호하기 위해 쓰였다. 어쨌든 갓 태어난 아기에게 이런 물건을 바치다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아기 예수님이 장차 어떤 분이 되실지 예견해 주는 선물이다. 몰약은 예수님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구원자이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처형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헌신’과 ‘희생’의 상징이 몰약이다.

 

어느 목동이 저녁 때 양들을 몰고 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어느 한 곳에 이르면 양들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이 일이 계속 반복되자 목동이 그곳을 살펴보았더니 원인이 작은 가시나무 때문이었다. 다음 날 목동은 그 가시나무를 베어버리려다 그대로 두고 내려왔다. 가시나무에 걸려 있는 양털을 새들이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양들의 상처가 새들에게 부드러운 둥지를 마련해 준 것이다. 사랑은 헌신과 희생의 열매다. 헌신과 희생 없이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의 몸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고,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올바른 예배)라고 하셨다(롬12:1). 여기서 ‘제물’은 ‘희생’과 동의어다. 그러니 산 제물이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이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이 곧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올바른’(역적) 예배다. 그리고 제물은 선물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선물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삶이다. 이것이 바로 제물이 되는 삶이고, 올바른 예배자의 삶이다. 희생과 헌신처럼 값진 선물은 없다.

 

최대의 선물, 예수님

신자는 주님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크고 놀라운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다. 금보다 귀한 믿음을 비롯하여 구원의 은혜, 사랑, 죄용서, 자녀됨, 새로운 생명,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광스러운 기업 등.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지상 최대의 선물은 주님 자신이다. 성탄절은 주님께서 친히 선물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날이다. 성탄절이 기쁘고 즐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물을 받으면 기쁘고 즐겁고 감동이 되듯 지상 최대의 선물을 받은 날이기 때문에 그렇다. 선물의 특징은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다. 누구든지 선물을 받으면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신자의 삶이고, 책임이다. 주님께 이처럼 귀한 선물들을 받았으니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주님께 선물로 드려야 한다. 나아가서 이웃들에게 선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쁨이 되고, 감동이 되어야 한다. 우리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보자.

 

♠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선물이 됩시다.

♠ 당신은 나에게 소중한 선물입니다.

♠ 나는 당신에게 선물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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