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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며 거절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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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932회 작성일 11-10-1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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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며 거절하지 말라.

마5:42

2011. 10/16   08:00, 11:00

주는 것이 남는 것이다.

영구차에는 짐 가방을 실을 수 없다고 한다. 세속적인 삶에서 얼마나 많이 이루고 누렸건 결국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순간에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어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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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원이 있는데 살아가면서 400만원을 남에게 주었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얼마나 남게 될까?’

 

학생들 대부분이 100만원이라고 대답했다. 그 때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좀 다르단다. 내가 이 땅에서 500만원을 가지고 있다가 400만원을 남에게 주었다면, 마지막 순간에는 400만원을 갖게 되는 거란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남에게 준만큼 나에게 남아있게 되니까 말이다.’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말이다. ‘일생을 마친 다음에 남는 것은 우리가 모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에게 준 것이다. 악착스레 모은 돈이나 재산은 그 누구의 마음에도 남지 않지만, 숨은 적선, 진실한 충고, 따뜻한 격려의 말 같은 것은 언제까지나 남게 되니 말이다.’ 잃은 것이 얻는 것이고, 낮추는 것이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주는 것이 남는 것이다. 아름다운 역설의 진리들이다. 본문 역시 이와 같은 역설의 진리, 역설의 삶에 대한 말씀이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불편한 요구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인생의 승자다.’ 이는 현대인들에게 신조(信條)와 같은 말이다. 사람들이 모든 것에 불철주야(不撤晝夜) 노심초사(勞心焦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결국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때문이니 씁쓸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 말씀은 불편한 진리이고, 불편한 요구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모은 것인데 쉽게 내놓을 수가 있겠는가? 사람마다 재물을 모으는 과정을 보면 처절한 경우가 많다. 사실 39~41절은 재물을 모으는 과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선 갖은 멸시, 비열한 착취, 부당한 압제를 참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게 모은 재물을 나누란다. 쉽게 내놓을 수 있을까? 그래서 저는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드리고, 각종 선교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그게 어떻게 얻은 것인데, 말 그대로 생명과 같은 것인데, 기꺼이 내놓은 것을 보면 감동이 된다.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과 같은 것이다. 가끔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논의 자체가 무익하고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고 피를 드렸는데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 신이라면 오히려 문제가 있지 않을까?

 

또한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지금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두 종류라고 짐작할 수 있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몇 되지는 않지만 부유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39~41절은 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주신 말씀이고, 본문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들에게 주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이 앞의 말씀(39~41)에 비하여 결코 쉽지 않는 명령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더 어려운 명령이다. 실제로 주님의 이와 같은 요구에 순종하지 못한 부자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고(마19:16~22), 그래서 주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19:24)고 하셨다.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항상 ‘조금’ 모자라는 법이고, 그 조금을 ‘더’ 채우려다보니 나눔을 놓치고 만 것이다. 그러니 주님의 이 말씀은 불편한 요구일 수밖에 없다.

 

물질을 선용하라.

아무튼 주님은 물질의 잘못된 사용을 경계하면서(마19:16~22, 눅12:13~21, 16:19~31) 선한 사용을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있다. 주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마6:19,20)고 하셨다. 적극적으로 선용하라는 뜻이다. 바울은 이것을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딤전6:19)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바울 역시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6:18)고 하였다. 본문을 완곡하게 해석하면 ‘주님이 주신 물질을 잘 선용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그리고 이것을 물질에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우리의 생명을 비롯하여 재능과 건강, 지혜, 시간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함한다.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은 나 혼자만을 위해 주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나누도록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와 같은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이웃에 대한 태도와 물질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다.

 

첫째,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한 열린 마음이다.

사람들은 가진 것이 있어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진 사람만이 나누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물질뿐만이 아니다. 우리 안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나눌 수 있고, 얼마든지 나눌 수가 있다. 톨스토이의 일화다. 그가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났다. 그는 그를 돕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지만 마침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 거지에게 ‘형제여. 지금은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악수뿐입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자 그 거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닙니다. 선생님,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나 당신은 돈보다 더 큰 걸 제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저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주시고, 형제라고 불러준 것입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랑이고, 관심이라는 것. 사랑과 관심만 있으면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눅16장에 지옥에 간 부자와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는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단지 부자로 호의호식하며 살았기에 죽어서 지옥의 고통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 본문을 깊이 읽어보면 그의 죄악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무관심’이다. 이 사람은 자기 연락(宴樂)에 빠져 자기 집 문 밖에서 겪고 있는 나사로의 비참한 생활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런 이웃의 아픔에 대한 무관심은 사랑이 없음을 뜻하고, 사랑이 없는 삶은 하나님과 무관하다. 요한은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1요3:17)고 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사랑은 믿음의 증거이다. 믿음의 사람은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래서 힘껏 돕게 된다. 결국 본문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마음을 닫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웃 나사로는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우리의 영성과 인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와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이다.

지난주일 오스 기니스(Os Guinness)의 죄에 대한 정의를 소개하였다. 그는 ‘나 자신에게 속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죄’라고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인간의 의무위반이고 도덕적 자살이라고 주장(R. von Jhering)하는데, 왜 권리주장이 죄인가? 여기서 세속적 가치와 신앙적 가치가 얼마나 다른가를 실감한다. 가치의 전환이 없이는 신자다운 삶 또한 불가능함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자기 것이라고 권리를 주장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기사귀’(生寄死歸)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은 나그네처럼 잠시 붙어사는 것이고, 죽음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란 뜻이다. 삶이라 숙박시설에 잠시 머문 것과 같다. 머물다 떠날 때면 사용했던 것들을 그대로 두고 올 때 모습으로 돌아간다. 우리 인생 역시 죽을 때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빈손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사용한 것은 모두가 빌려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와 같은 인간의 삶을 ‘청지기’의 삶이라고 한다. 청지기에게는 사용권만 있고, 그것도 소유권자인 주인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권리주장은 자신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다. 이것이 곧 죄고, 죄의 속성은 자신의 본질을 망각하고 엉뚱한 기대를 품게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인간의 본질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게 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에노스’(깨지기 쉽고 병들기 쉬운 존재)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다. 신앙생활은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창4:26). 그러므로 모든 초점을 주님께 맞추고 주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우리의 생명도, 시간도, 재능도, 소유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것이 분명하면 나눔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다. 주님께서 맡기신 재물, 주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는 일이니 기꺼이 순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소유한 것에 대하여 가져야 할 아주 중요한 태도이다. 본문은 어려운 이웃과의 나눔을 넘어서 바로 이 점을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나눔도 훈련이 필요하다.

이웃에 대한 열린 마음,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이 본문의 말씀을 성공적으로 순종하는 비결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능이 좋은 기계도 사용하지 않고 두면 녹이 슬고, 물이 풍성한 샘도 사용하지 않으면 막히게 된다. 나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의 몸은 태도나 의식과는 상관없이 익숙한 쪽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특징이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었다고 해서 그의 삶에 변화가 금방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변화된 태도, 변화된 의식에 따라 생활하도록 하는 경건에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수영의 원리와 방법을 안다고 수영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그 원리와 방법에 따라 훈련을 해야 수영을 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웃에 대한 열린 마음, 물질에 대한 청지기 의식에 따른 실천적인 훈련이 있어야 나눔의 생활이 가능해 진다.

 

히브리어에는 우리말이나 영어의 ‘자선(Charity)’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마땅한 단어가 없다. 가장 비슷한 말로 ‘정의’를 뜻하는 ‘체다카’(הקדצ)란 말이 있는데, 이는 ‘해야 할 당연한 행위’라는 뜻이다. 자선과 정의가 동의어인 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눔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혜적인 행위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삶으로, 선택이 아니라 의무로 인식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생각과 태도로 나눔을 어려서부터 훈련시켜 나눔이 거룩한 습관이 되게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이 나눔에 대한 성경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나눔과 올바름, 이 둘이 인간의 당연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때 정의로운 삶이 되고,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는 건강한 신자는 다른 사람과 소유에 대해서도 올바른 태도와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하면서 연약한 지체들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인색함이 없이 기쁘게 즐겁게 풍성하게 섬겨야 한다. 신자에게는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은 본문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실천에 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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