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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이끄는 행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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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529회 작성일 11-11-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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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이끄는 행복한 삶

눅17:11~19

2011. 11/20   08:00, 11:00(추수감사주일)

불평 제조업자 vs 감사 제조업자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선구자 노만 필(N. V. Pearl) 박사가 기차여행 중에 경험한 일이라고 한다. 그의 맞은 편에 한 중년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부인이 주변 환경에 대해 계속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좌석이 불편하다.’, ‘시트가 지저분하다.’, ‘에어컨이 약하다.’ ‘승무원이 불친절하다.’는 등. 부인의 이런 불평을 듣고 있던 남편이 필 박사에게 인사를 하며 자기를 소개했다. ‘저는 변호사이고, 제 아내는 제조업에 종사를 하고 있습니다.’ 필 박사가 부인이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남편이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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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내는 불평을 만들어내는 제조업자입니다.’

 

불평과 감사는 삶의 ‘방식’(mode)문제다. 삶의 방식을 불평에 맞춘 사람은 불평 제자업자가 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불평에서 찾는다. 그러니 매사가 불평이고 원망이고 불만이다. 하지만 삶의 방식을 감사에 맞춘 사람은 감사 제조업자가 된다. 그러므로 감사 제조업자가 되기 위해선 삶의 ‘모드’를 불평에서 감사로 전환해야 한다. 행복, 만족, 기쁨과 같이 우리 인생에 힘이 되는 것들은 모두 감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고, 만족은 감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그리고 기쁨은 감사에서 비롯된 열매다. 감사는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과 같다. 사람들은 단풍을 보려고 산을 찾고, 감탄하고 감동하면서 즐거워한다. 감사가 있는 삶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좋아하고 사모하고 사랑한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장산 단풍을 보러갔다 그 곳을 찾아온 사람들을 보며 ‘내장산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장산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와 여러분이 단풍처럼 단풍으로 물든 산처럼 감사로 물든 사람, 감사를 만드는 감사 제조업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감사가 이끄는 삶을 위하여

본문은 감사절기마다 자주 언급되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신 사건인데,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 감사를 한 사람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인 밖에 없었다. 우리 모두는 감당할 수 없는 감사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영혼의 나병인 죄로부터 고침을 받았기에)이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에 무척 인색하다(열 명 중에 겨우 한 명만 감사했기에)는 것이 본문의 교훈이다. 이 추수감사절에 ‘감사가 이끄는 행복한 삶’에 대하여 은혜를 받고자 한다.

 

첫째, 감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15).

 

여기서 “보고”(ὁράω)는 단순히 ‘본다.’는 뜻의 시각적인 행위를 넘어 ‘알다’(to know), ‘깨닫다.’(to understand)는 뜻이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 ‘호라오’는 단순한 시각적인 행위를 뜻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보다.’ 혹은 ‘눈으로 목격하다.’는 뜻으로 ‘찾아내고 발견해내다.’는 의미다. 보는 것을 통한 ‘정확한 인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라는 말은 자신의 병이 치유된 것을 ‘알았다.’, 즉 자신의 병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치유된 것을 정확하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달려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나머지 아홉 명이다. 그들도 자신들에게 일어난 사실을 보았고, 알았고, 경험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주님께 달려가 감사를 드리지도 않았다. 같은 사건을 같은 장소에서 같이 보았는데, 그것도 자신에게서 일어난 사건인데, 왜 그들은 같은 반응을 보이지 못한 것일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자신들에게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한 ‘이해(깨달음)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했던 한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이 일이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사건으로 이해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이해한 것이다. 때문에 같은 사건을 같은 장소에서 같이 보았으나 다른 반응을 보인 것이다.

 

감사는 보는 문제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 긍정적인 시각, 특히 믿음의 시각으로 보면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먹구름과 폭풍우까지도 감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보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생각’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시각을 낳고, 긍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시각을 낳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생각을 가지면 세속적인 시각이 생기고, 믿음의 생각을 가지면 믿음의 시각이 생기기 때문이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에 있다. 그래서 영어로 ‘생각하다’(think)와 ‘감사하다’(thank)가 어근이 같다.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한다. 마음의 밭에 사단이 나쁜 생각, 악한 생각, 부정적이고 더러운 생각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도록 잘 관리해야 한다. 사단은 이런 생각들을 심어 우리의 마음을 자신의 점령지로 만든다. 가시덤불 밭이 결심을 맺지 못한 것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힌 까닭이다(마13:22). 그러니 사단이 뿌려놓은 나쁜 생각들을 성령의 불로 태우고 말씀의 칼로 수술하여 제거해야만 한다. 그리고 항상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 거룩한 생각, 믿음의 생각을 품어야 한다. 본문에서 감사했던 이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바라봄으로 감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감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둘째, 감사는 표현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15,16).

 

‘울리지 않는 종(鐘)은 종이 아니고, 부르지 않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는 말이 있다. 감사도 마찬가지다. 감사는 생각이나 마음에만 담아 두는 것이 아니라 말로 몸으로 행동으로 표현해야 한다. 표현해야 커지고 강해지고 풍성해 진다. 본문에서 이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3단계로 표현되고 있다. 먼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자신에게 일어난 이 치유의 사건 배경에 하나님이 계심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이 있어야 감사의 생활이 가능하다. 그 다음으로 주님께로 달려갔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구체적인 대상을 찾아간 것이다.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먼저지만 본문의 이 사람처럼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당사자에게도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발아래에 엎드렸다. 여기서 그가 ‘주님의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온 몸으로 자신의 감사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경배의 표현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엎드림’은 존경과 경배의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렇다. 예배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최고, 최상의 감사표현이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예배의 자리를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고, 예배가 소중한 축복의 통로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은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한 사람에게 더 풍성한 은혜와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본문을 보자. 주님은 감사한 이 사람에게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고 선언하셨다.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구원은 물론 영혼의 구원까지 선물로 받은 것이다. 물론 보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사람들에겐 나병의 치유가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이다. 영혼의 구원은 영생의 보장이다. 이 사람은 감사를 통하여 육체적 건강과 영혼까지 치료받아 영생을 보장받았다. 이것이 감사를 표현한 사람이 누리는 복이다. 감사는 표현할수록 강해지고, 커지고, 풍성해지고, 풍성한 복을 부른다. 감사는 행복의 마일리지(mileage), 만족의 마일리지, 기쁨의 마일리지다. 감사할수록 우리의 삶에 행복의 마일리지가 쑥쑥 쌓이고, 만족의 마일리지가 쌓이고, 기쁨의 마일리지, 형통의 마일리지가 쌓인다.

 

감사를 표현하라.

특히 감사했던 이 사람의 태도에서 감사의 특징과 표현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감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그가 감사를 표현했던 내용들이 모두 동사다(①영광을 돌리며. ②돌아와, ③엎드리어). 앞서 말한 대로 감사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이 되어야한다는 뜻이다. 둘째,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수가 침묵하고 있는데 혼자서 표현하는 것, 쉽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은 다음 사람들을 만나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야하는데, 그것도 없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율법을 범하는 일이다. 그것도 그는 유대인이 혐오하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주님께서 이런 그를 받아 주시리라는 보장도 없었고, 도리어 주변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께로 돌아왔다. 감사하는 삶을 위해선 이런 믿음의 용기가 요구된다. 사실 이것 자체가 소중한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어려움을 감수하며 주님 앞에 엎드린 것, 그것이 곧 “네 믿음”이고, 그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칭찬해 주셨던 것이다. 셋째, 감사는 ‘즉시’ 실천해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본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주님 발아래 엎드렸다. 감사를 ‘0.3초의 기적’이라고 한다. 가슴으로 감사를 느끼는 시간이 0.3초라는 것이다. 이 시간을 놓치면 감사를 잃게 된다는 뜻이다. 이 순간을 붙잡아야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감사할 수가 있다.

 

감사는 삶의 소중한 경쟁력이다. 무엇보다도 ‘행복한 삶의 경쟁력’이다. 행복은 감사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감사할 만큼 만족스럽고 행복한 인생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감사하면 고해와 같은 인생이 행복해 진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 행복해 진다. 이것이 감사의 기적이다. 때문에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과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즉시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이것이 감사가 이끄는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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