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어리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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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662회 작성일 11-10-09 14:26본문
거룩한 어리석음
마5:38~41
2011. 10/9 08:00, 11:00
윤회와 거위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윤회와 거위>라는 이야기다. 세종 때 윤회(尹淮)라는 학자가 하루는 남의 집 헛간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주인집 딸아이가 마당에서 값진 구슬을 떨어뜨렸는데, 마침 지나가던 거위가 그것을 냉큼 집어 삼키는 것을 윤회가 잠을 자려고 헛간 문을 막 닫으려다가 보았다. 아이가 구슬을 잃어버렸다며 울음을 터뜨렸고, 주인은 옆에 있는 윤회를 의심하고 그를 다짜고짜 헛간 기둥에 묶어버렸다. 하룻저녁 신세를 지려다 졸지에 도둑으로 몰린 것이다. 헛간 기둥에 묶인 윤회는 주인에게 구슬을 삼킨 거위도 자기와 함께 묶어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주인은 윤회의 부탁을 들어 거위를 그의 옆에 묶어주었다. 이튿날 아침, 윤회는 거위 똥 속에서 구슬을 찾아 주인에게 주었다. 그러자 주인이 미안해하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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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신은 거위가 구슬을 삼킨 것을 알면서 그 사실을 미리 얘기하지 않았소?’
그러자 윤회가 대답했다.
‘제가 말했다면 어제 밤에 구슬은 찾았겠지만 거위는 생명을 잃었겠지요!’
주인은 윤회의 지혜와 행동에 감동하며 자신의 경솔함을 부끄러워했다. 살다보면 누구나 윤회처럼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어려움을 어떻게 해석하여 반응하고, 극복하고,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 본문은 ‘어려움’(사실 본문의 사건을 ‘어려움’이라고 표현하면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 같지만, 일상적인 삶에 적용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이 용어를 선택하였음)에 직면했을 때 우리 신자가 가져야 할 태도와 관련된 말씀이다.
‘보복하라.’→‘동해보복하라.’→너희가 ‘보복하지 말라.’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억울한 일이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보복하라! 이것이 곧 율법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38)는 것이다. 복수를 하되 ‘받은 손해만큼만 하라’(同害同量)는 것이다. 이를 ‘타리오의 법칙’(Talio's Law)이라고 하는데, 고대 형법인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의 원시형태다. 원래의 뜻은 복수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보복을 공법원리로 대체하여 개인적인 보복을 억제하려 한 것이다. 즉 개인이 복수함으로 계속될 복수의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도 유대인과 이슬람사회에서는)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복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용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문제를 더욱 크고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욕심 때문이다.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누구도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한 것이 좋은 예다. 인간의 분노와 욕심 때문에 이 말씀이 잘못 집행되기 때문에 복수의 악순환을 겪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동해보복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아주는 말씀이다. 주님의 해석은 간단하다. ‘너희가 보복하지 말라.’(39)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하셨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니고 복수는 주님께 맡기고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다(44). 사실 용서와 사랑이 최고의 복수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법을 ‘사랑의 법’이라고 한 것이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주님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을 세 가지로 말씀하셨다. ①인격적인 무시와 경멸(39), ②비열한 착취(40), ③부당한 압제(41)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얼토당토 않는 악한 자들의 태도에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극적으로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라는 것이다. 품위 있게 저항하라는 것이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대고, 속옷을 요구하면 겉옷까지 벗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기꺼이 십 리까지 가주라는 것이다. 즉 말도 안되는 요구를 받더라도 거절하지 말고, 오히려 여유 있게 더 많은 것을 스스로 내어주라는 것이다. 손해가 되더라도 할 일만 하지 않고 더 큰 관심으로 도움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는 폭력에 대해 ‘저항’이나 혹은 ‘비폭력 무저항’이 아니라, ‘비폭력 저항’이다. 폭력에 대한 저항은 더 큰 폭력을 부르고, 무저항은 폭력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그러나 비폭력 저항은 변화를 가져온다. 오른편 뺨을 때린 자에게 왼편도 돌려댈 때, 그러면 때린 자는 자신 안에 있는 악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속옷을 달라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주어버릴 때 속옷을 요구한 자는 자신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욕심을 발견하게 된다. 오 리를 가자는 자에게 기꺼이 십 리를 동행할 때 억지로 동행을 요구한 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원수를 적극적으로 선대하는 것은 “핀 숯을 그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잠25:22)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머리에 핀 숯을 놓는다.’는 것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뉘우치게 하거나 마음의 감동을 받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렇다. 가장 완벽하고 멋진 복수는 회개하여 변화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사건건 트집이고 야단만 쳐대는 시어머니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며느리가 있었다. 시어머니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는 위기의식까지 들게 된 이 며느리는 용한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은 며느리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비방이 있다고 했다. 눈이 번쩍 뜨인 며느리가 그 비방이 무엇이냐고 다그쳐 묻자, 무당은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며느리는 ‘인절미’라고 했다. 무당은 앞으로 백일동안 인절미를 만들어서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시어머니에게 드리면 시어머니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했다. 며느리는 신이 나서 돌아왔다. 정성껏 찹쌀 인절미를 만들어 시어머니에게 주었다. 시어머니는 처음엔 ‘이 년이 죽으려나, 왜 안하던 짓이야?’하고 욕을 했지만 며느리는 싱글벙글했다. 시어머니는 매일 몰랑몰랑한 인절미를 해주는 며느리에 대한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두 달이 지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는 며느리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이 되어 사람들에게 해대던 며느리 욕도 거두고 반대로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였다. 이렇게 변화된 시어머니를 바라본 며느리 역시 시어머니를 죽이려고 한 자신이 무서워졌다.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가 정말로 죽을까봐 덜컥 겁이 났다. 며느리는 있는 돈을 싸들고 무당에게 달려가서 돈을 내놓으며 ‘내가 생각을 잘못했으니 어머니를 살릴 방도를 가르쳐 달라’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러자 무당이 웃으며 ‘미운 시어머니는 벌써 죽었지?’ 했다.
이것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의 유래라고 한다. 불편한 관계를 해결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어둠을 몰아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빛을 비추는 것인 것처럼 악을 제거하는 최선의 길은 선이다.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는 것이 악을 이기는 길이다. 그래서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고 하신 것이다.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
하지만 준만큼 받고 싶고 피해를 본만큼 보복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다. 그런데 어떻게 요구하지 않는 것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까지 포기하고 내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요구하면 겉옷까지 벗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기꺼이 십 리를 동행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런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질 수가 있을까? 그것을 가능하게 한 첫째가 ‘은혜의식’이다(마18:23~27).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사랑은 무엇이든 하고 싶지 않을 때, 기꺼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불편할 때, 불평과 원망이 생길 때 이것을 잠재우는 최고의 명약이다. 라인홀트 니버(R. Niebuhr)는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을 사랑한 주님의 행위가 바로 불가능한 가능성이고, 자기를 죽이려 하는 자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불가능한 가능성이고,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이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불가능한 가능성이라 했다. 신자 역시 이와 같은 은혜의식을 통해서 불가능한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
둘째는 ‘자기부인’이다(마16:24). 죄의 본질은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다. 하나님보다 이웃보다 자기영광, 자기이익을 챙기려는 것이 죄의 원리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복수심은 모두 이러한 자기영광과 자기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도, 권리도 포기하셨다. 생명까지 포기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주님의 이러한 자기희생, 자기부정, 권리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주님처럼 살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준만큼 받고 싶고 피해를 본만큼 보복하고 싶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를 넘어 요구하지 않는 것까지 내줄 수 있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통해 가능하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은 주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곳에는 희생도 헌신도 용서도 기대할 수 없다. 오스 기니스(Os Guinness)는 ‘나 자신에게 속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죄’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는 삶을 ‘거룩한 어리석음’이라고 했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을 ‘거룩한 바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가장 오래되고, 가장 독특한 배지(badge) 중 하나라고 했다. 바보가 아니고서 어떻게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대고, 속옷을 요구하면 겉옷까지 벗어주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기꺼이 십 리를 동행할 수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주님은 우리 신자와 교회가 이런 거룩한 바보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필터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꺼이 하라.
삶의 자세를 대체로 세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형벌의식에 쫓기며 사는 삶이다. 억지로 살아가는 것,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보상을 바라고 사는 삶이다. 좋은 일 하면 좋은 일이 오겠지. 아이들 잘 키워놓으면 효도 받겠지. 또 사랑하면 사랑받겠지. 이렇게 투자의식, 보상의식을 가지고 산다. 그랬다가 정당한 보상이 없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벌의식에 쫒기거나 보상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의 특징은 자발성이 없다. 셋째는 존경과 사랑과 감사로 사는 삶이다. 할 일이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건강과 지혜가 있고, 기회가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그래서 매사 고맙고 감사한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즐겁게 한다. ‘스스로!’, ‘열심히!’, ‘참되게!’ 자신의 인생을 산다.
같은 일을 해도 마음의 자세와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신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는 ①억지가 아닌 ‘자원함’(자발성), ②마지못해서가 아닌 ‘기꺼움’(기쁘고 즐겁게), ③인색함이 아닌 ‘풍성함’이고, 또한 ④의무가 아닌 ‘감사함’이다. 이는 본문에서처럼 불합리하게 강요된 현실과 상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본문에 “돌려대며”(39), “가지게 하며”(40), “동행하고”(41), 이 세 동사가 모두 ‘능동태 명령형’이다. 이는 원수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자발성, 기꺼움, 풍성함, 감사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변하면 환경이나 현실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삶의 자세가 이렇게 되기를 바라시고, 무슨 일이든 이런 자세와 태도가 되기를 바라신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란 기쁨으로 진 사람에게만 십자가의 의미가 있다. 물론 처음부터 십자가가 좋고, 그래서 기꺼이 기쁘고 즐겁게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도망치고 싶고, 벗어나고 싶지만 이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이기에 즐겁게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넘어서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원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 풍성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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