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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하지 마!(Don't show), “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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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010회 작성일 11-11-1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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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하지 마!(Don't show), “구제”

마6:1~4

2011. 11/13   08:00, 11:00

有美無罪, 無美有罪

아름다워지고 싶고,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다. 때문에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 가꾸는 것에 대해서 비난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른바 ‘성형중독’, ‘성형미인’이라는 말이 생길만큼 외모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을 외모지상주의, 즉 ‘루키즘’(Lookism)이라고 한다. 이는 외모가 개인의 우열(優劣)뿐만 아니라 인생의 성패(成敗)까지 좌우한다고 믿어 외모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 또는 그러한 사회풍조를 말한다.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으로 신분(과거), 인종, 종교, 성, 부, 학력 등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외모가 사람을 차별하는 새로운 요소가 되고 있다(W. Safire). 어떤 학생이 ‘성질 나쁜 것은 용서해도 얼굴 못생긴 것은 용서 못 한다. 성질 나쁜 것이야 혼자서 감당하면 그만이지만 얼굴이 못 생기면 사람들 앞에서 쪽팔리기 때문이다.’고 했다. 철없는 학생의 치기어린 농담 같지만 루키즘 시대의 정신을 잘 반영해준 말이라 생각한다. 이런 현상에 빗대어 ‘유미무죄’(有美無罪), ‘무미유죄’(無美有罪)란 말도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못생긴 것이 죄가 되고, 못생겨서 미안하고, 못생겨서 죄송한 시대가 된 것이다. 실제로 좋은 학교를 나왔어도 외모가 받쳐주지 않으면 결혼하기가 힘들고, 학창시절에 좋은 학점을 받았어도 역시 외모 때문에 번번이 면접에서 탈락하다보니 자연히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외모도 스펙이다’는 말이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고, 상황이 이러다보니 다이어트 열풍에 성형외과가 문전성시를 이룬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주님은 뭐라 말씀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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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하지 마!’(Don't show).

 

신앙적 ‘루키즘’을 경계하라.

본문은 신앙적 ‘루키즘’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당시 유대교와 유대인들은 ‘루키즘’의 달인이었고, 이에 대해서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셨던 분이 예수님이다. 주님은 그들이 경건생활의 중요한 척도로 여기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셨다(마6:1~18). 그들은 경건생활의 척도가 되는 이 세 가지까지도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즉 경건을 이익의 방도(딤전6:5)로 생각한 것이다.

 

주님은 먼저 구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구제는 유대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겼던 일로, ‘이웃을 향하여 마음의 창을 여는 것’이다. 마음의 창이 열리지 않고는 아무리 이웃의 처지가 딱해도 선뜻 자신의 것을 내놓을 수가 없다. 구제를 히브리어로 ‘체다카’(הקדצ)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원래 뜻은 ‘정의’(1)다. 구제와 정의가 같은 단어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제를 단순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베푸는 선행이나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의무로, 정의를 실현하는 일로 생각했다. 그들은 수입의 10%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기부했고, 결혼식이나 절기에 이웃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초청하여 식사를 제공하였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경제교육을 시켰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이웃을 위한 구제생활로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십일조와 나눔이 거룩한 습관이 되도록 적은 수입이라도 반드시 십일조와 구제헌금을 하게 했다. 저는 여기서 부모의 역할을 생각해 보았는데, 부모는 자녀들에게 ‘거룩한’ 기억, ‘거룩한’ 습관을 물려주어야한다. 그러면 그것들이 자녀의 평생을 지배하게 된다. 사실 이것이 유태인의 자녀교육 핵심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전통과 경건생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신앙적 ‘루키즘’이다. 요즈음 TV나 신문이 기부금의 다소(多少)에 따라 순서를 정하여 광고한 것처럼 당시 유대교에서도 많이 연보한 사람은 그 이름을 회당에 공고하거나 랍비의 오른편 특석을 정해서 앉도록 하였다. 이것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기부자의 허영심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다니며 나팔을 불어 가난한 사람들을 모이도록 해서 구제를 했다. 그런데 이런 전통을 악용하여 구제를 명목으로 나팔을 불어 사람들에게 자신이 구제를 잘하는 사람인 것처럼 떠들썩하게 소문을 퍼뜨리지는 경우도 있었다. 본문에서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마라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결국 이 모두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잘못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의 말씀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이 비유의 배경이 여리고로 가는 후미진 골짜기가 아니라 예루살렘 한복판이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죽어가는 그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갔을까? 아무튼 ‘선행도 스펙’으로 간주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흔히 사람들은 문제가 있는 신자를 볼 때, ‘그 사람, 믿음이 문제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표현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믿음이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문제의’ 사람이 있을 뿐이다. 믿음을 담은 그릇과 같은 사람 때문에 믿음이 문제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아무리 경건하고 좋은 전통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에 의하여 허영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교훈이다. 요순(堯舜)시절, ‘고요’(皐陶)라는 벙어리가 최고법관으로 있을 때 천하에는 잔혹한 형벌이 없었고, 소리꾼이면서 소경 ‘사광’(師曠)이 승상이 된 후에는 어지러운 정치가 없었다고 한다. 벙어리와 소경이 다스린 세상이 오히려 태평성대라는 역설적인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고,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존경받고 싶어서 사람을 의식하는 것의 결과에 대하여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1).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으로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2). 여기서 “받았다”(απεχουσιν)는 말은 상업용어로 ‘전액을 영수했다’(지불완료)는 뜻이다. 그러니 더 이상 주님과 ‘상관이 없다’는 무서운 의미인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外飾)는 비록 그것이 신앙적인 것일지라도 주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도리어 주님을 화나게 만들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사1:, 마23:).

 

왼손이 모르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3,4上).

 

주님은 1,2절에서는 외식하는 자의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여 경계하시고, 3,4절에서는 구제할 때의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신다. 구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은밀함’이다. 이는 자신의 구제를 떠들썩하게 소문을 퍼뜨리지는(나팔 부는) 위선자와는 반대의 길이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둘 다 자신의 지체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은밀히 하라’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이는 구제의 동기와 관련이 있다.

구제에서 왼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지 않고 떠들썩하게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동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리기 위한 이기적인 허영심, 그래서 사람들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어려움에 처한 이웃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 더욱이 자신의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굳이 소문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묵묵히 섬길 뿐이다. 그러므로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에는 구제의 동기를 확인하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즉 구제의 동기는 사람들에게 잘 보여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기중심, 사람중심이 아닌 주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춘 주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은밀한 구제가 가능해진다. 무슨 일이든 동기가 중요하다. 동기가 바르지 못하면 결과가 빗나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엘리엇(T. S. Eliot)은 ‘인간을 향한 사단의 마지막 유혹은 올바른 목적을 잘못된 동기로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고 했다. 그릇된 동기의 신앙적 활동은 우리의 경건생활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간계이다.

 

둘째, 선을 선으로 ‘의식함’이 없이 행하라는 의미다.

노자의 도덕경에 ‘상덕부덕 시이유덕’(上德不德 是以有德), ‘하덕부실덕 시이무덕’(下德不失德 是以無德)이란 말이 있다. ‘최상의 덕은 스스로 덕이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덕이 있고, 최하의 덕은 스스로 덕을 잃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덕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노자는 최상의 덕(上德)과 최하의 덕(下德)을 구별하고 있는데, 상덕과 하덕의 차이는 ‘의도함’(爲)에 있다. 상덕은 ‘무위’(無爲)이고, 하덕은 ‘위지’(爲之)이다. 상덕은 의도함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고, 하덕은 스스로 의도를 가지고 하고자 해서 하는 것이다.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도 이와 같다. 슬픈 일을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히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선행이 몸에 익어서 ‘저절로’, 그리고 ‘당연하게’ 실천이 되는 것이다. 즉 목마른 자에게 냉수 한 잔을 주는 것, 가난한 자에게 나의 여유를 나누어 주는 것, 구걸하는 이에게 금전을 주는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긴다. 필요에 따라 당연하게 하였으니 많은 구제를 하였을지라도 그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에서,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의인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고 하며 그들의 선행을 칭찬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37~39)하고 반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 때 임금이 말하기를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고 하셨다. 무수하게 선행을 하였으나 ‘거저, 나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당연한 일로 생각하며’ 하였기에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주님 앞에서 참된 구제는 이와 같이 당연하게 여기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구제라야 무게가 있고, 영원성을 띄고, 거룩하신 주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있다.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4).

 

이는 구제가 은밀해야 할 중요한 이유다. 그것은 은밀함이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이고(“은밀한 중에 보시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께서 갚아주신다는 사실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나팔을 불며 구제를 행한 사람들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다.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그리고 보시고 갚아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보상을 받고자 나팔을 분 것이다. 선행을 가장한 위선을 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든 믿음을 따라 하지 않으면 이런 결과를 낳고,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은 다 죄’(롬14:23)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구제뿐만 아니라 다음에 나오는 기도(5~15)나 금식(16~18)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사람들이 보든지 보지 않든지, 사람들이 기억하든지 기억하지 못하든지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거저, 나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당연한 일로 생각하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주님은 보신다! 아신다! 기억하신다! 그리고 갚아주신다는 믿음이다. 결국 ‘은밀한’ 구제는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 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94:9) 하는 믿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하는 믿음이다. 우리 역시 이 믿음으로 사랑하고 섬기고 나누고 베푸는 일에 더욱 경주하자. 특히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이다. 예전처럼 추수감사헌금 전액을 ‘나눔 이웃’에 사용할 것이다. 이 아름다운 일에 여러분의 믿음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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