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어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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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913회 작성일 11-12-18 15:38본문
주여 어서 오소서!
막13:28~37
2011. 12/18 08:00, 11:00
기다림의 영성
사회심리학자 프롬(E. Fromm)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희망의 사람,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희망과 꿈을 안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더 좋은 날, 더 기쁜 날, 더 성공적인 날, 더 건강한 날, 더 행복한 날, 더 보람된 날을 기다리며 산다. 약혼한 처녀는 결혼의 날을 기다리고, 자녀를 낳은 부부는 자녀의 성장을 기다린다. 군에 입대한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의 전역을 기다리고, 병상에 누어있는 환자는 회복을 기다린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기다림 속에서 희망을 키워가고, 기다림 속에서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튼 무언가, 그리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아름답고 가슴 벅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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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란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영성이다. 사실 기다림도 평안할 때는 그것이 낭만이 될 수 있고, 견딜만한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의 기다림, 절망 가운데서의 기다림이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여기엔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이 요구된다.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과 기다림은 중요한 관계다. 믿음이 있어야 기다림이 성립되고, 기다림을 통하여 믿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신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신자는 기쁨 속에서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지만 고난 중에도 기다릴 줄 아는, 기다림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교회는 ‘기다림의 공동체’다. 특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다. 바로 이 기다림이 지난 2천 동안 역사의 격랑(激浪) 속에서 신자와 교회를 지탱해주었던 역동적인 힘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기다림은 신구약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구약은 ‘초림’ 메시야를 기다리고, 신약은 ‘재림’ 메시야를 기다린다(특히 신구약성경 마지막 책, 마지막 장이 기다림으로 끝을 맺고 있음).
기다림의 자세
주후 64년 경 네로황제의 광적인 행동으로 로마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네로는 이를 기독교인의 소행이라고 누명을 씌워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외에도 신자들은 황제숭배 강요와 신앙철회를 요구하는 압박 속에서 엄청난 시련을 감당해야했다. 마가는 이와 같은 시련으로 흔들리는 신자들에게 위로와 격려, 용기를 주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켜나갈 근거를 제공하고자 본서를 기록했다. 특히 섬기는 종으로 오신 주님의 봉사와 희생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의 길’이고, 고난은 신자가 통과해야 할 필수과목임을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이 고난도 주님이 오시면 모두 끝이 나고, 주님의 오심은 멀지 않는 장래에 있을 분명한 사실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니 주님을 기대하고, 주님께서 오실 그날을 기대하며 참고 기다리자는 것이다.
본문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와 교회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여기에는 주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①주님의 재림은 매우 임박했다(28,29). ②주님의 재림은 필연적이다(31). 그러나 ③재림의 시기에 대하여는 아무도 모르고(32,33), 그저 홀연히 오신다(36). 특히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홀연히’ 오신다는 말씀은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를 결정짓는 중요한 내용이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까? 본문은 ‘깨어서 기다리라.’(33,35,37)고 한다.
깨어서 기다리라.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파나소닉의 회장 마쓰시다 고노스께(松下幸之助)의 일화다. 밤길을 걷다가 어느 집에서 부부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 다림질을 하려는 아내와 라디오를 들으려는 남편이 서로 콘센트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었다. 이 때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쌍가지 소켓’이었다. 그러면 부부가 다투지 않고 라디오를 들으면서 다림질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렇게 해서 ‘쌍가지 소켓’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파나소닉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단순한 사건에서 소중한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이는 사업에 대하여 늘 깨어있었기 가능한 일이다. 같은 사건을 보고 시인은 시를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작곡가는 노래를 만들고, 과학자는 법칙을 발견한다. 이것이 ‘깨어있음의 차이’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은 깨어있음에서 온다. 보통 사람은 눈앞의 현상만 보고(見), 깨어있는 사람은 현상을 넘어 본질을 본다(觀). 그렇다면 ‘깨어있음’이란 무엇인가?
주일무적(主一無適)
우리 선현(先賢)들은 깨어있음을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고 했다. ‘정신을 하나로 하여 다른 데로 감이 없다.’는 뜻이다. 마음을 한 곳에 붙들어 두고서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또는 ‘무주’(無住)라고 했다(유영모). ‘머물지 아니함’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과 삶의 상황에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 즉 현재의 상태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긴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마음)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신앙적으로 깨어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앙적으로 깨어있음은 우선 ‘마음과 정성을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主一無適). 이는 관심과 초점, 그리고 가치의 문제다. 삶의 모든 관심과 초점을 주님께 맞추고 온전히 주님만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어디서든지 그저 자나 깨나 주님만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것도 주님보다 귀한 것이 없고, 주님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주님보다 우선인 것이 없는 삶이다. 이것이 영적으로 깨어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깨어있음을 ‘일상성의 상대화’라고 했다. 주님이 전부가 되고, 절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역시 같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다.
무주(無住)
또한 신앙적으로 깨어있음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無住). 항상 영적인 민감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들어와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훔쳐가는 도적이 있다.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꿈을 훔치고, 성공을 훔치고, 기쁨을 훔치고, 평안을 훔치고, 행복을 훔치고, 내일을 훔치는 도적이 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훔치는 도적이 있다. 바로 ‘게으름’이다. 빌리 그래함(B. Graham)은 ‘게으름은 주의 일을 파괴시키는 자이며 영혼의 살해자다, 그것은 사람을 가만히, 그리고 고요하게 죽인다.’고 했고, 톨스토이(L. N. Tolstoi)는 ‘게으른 자의 머릿속은 악마가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고 했다. 게으름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신자에게 있어 가장 치명적인 장애물이고, 거룩한 삶의 은밀한 대적이다. 삶을 훔쳐가는 교활한 도적이 게으름이다. 게으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삶의 상황에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 현재의 상태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긴장하는 것이다. 특히 영적 민감함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다. 그리고 이런 영적 민감함은 ‘일상성의 영성화’로 이어진다.
아무튼 주님께 관심과 초점을 맞추고, 삶의 최고의 가치를 주님께 두는 것, 그리고 영적 민감함을 통해 영적 게으름을 극복하는 것이 깨어있는 것이다. 이 깨어있음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다. 그런데 이런 깨어있는 생활을 가능케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곧 ‘기도’다. 그래서 성경은 기도와 깨어있음을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는 주님께 관심과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또한 거룩한 불만의 표출이 기도다. 그러므로 기도야말로 깨어있음의 방법이며, 주님을 기다리는 최선의 자세다. 성경이 그토록 우리에게 기도를 당부하고 명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라나타(μαρανάθᾱ)
초대교회 신자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했다. ‘마라나타’란 말은 선언적 의미로는 ‘우리 주님께서 오신다.’이고, 간구의 의미로는 ‘우리 주여, 오소서!’라는 뜻이다. 이는 바울이 고전16:22에서 서신을 끝맺는 문안인사 가운데서 언급한 아람어 표현이다. 이 말은 고난당하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소망이 함축된 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혹독한 박해 앞에서도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조금만 더 참자. 이제 곧 주님이 오신다.’면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서로 격려하며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하지만 박해는 날로 심해지고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자 선언은 이제 간구로 변했다. 간절한 마음과 소원을 담아 ‘주여, 어서 오소서! 오셔서 우리를 구하소서!’라고 호소하였다. 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유일한 소망은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대미(大尾)는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Άμην έρχου κύριε Ίησοῡ)에 있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 계시록이 이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오늘이 대강절 마지막 주일이고, 다음 주일은 주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절이다. 세상은 성탄절로 들뜬 분위기다. 신자보다 교회보다 더 환영하는 분위기다. 저들이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기대와 기다림으로 들떠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님은 오셨던 하늘로 가시면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신앙은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을 깨어서 기다리는 것이다. 성탄절의 의미도 여기에 있다. 차분하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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