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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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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049회 작성일 11-12-12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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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할 때에

마6:16~18.

2011. 12/11   08:00, 11:00

낮에는 금식, 밤에는 과식

이슬람교에 ‘라마단’(Ramadan)이라는 특별금식기간이 있다. 이는 ‘더운 달’이란 뜻인데, 천사 가브리엘이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에게 그들의 경전 ‘코란’(Koran)을 가르친 신성한 달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 기간 동안, 해가 떠 있는 낮에 의무적으로 금식을 해야 한다.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고, 담배를 피우거나 이성과의 접촉, 게임, 화장, 화를 내거나 맹세, 심지어 침을 삼키는 것조차 금한다. 그래서 그들은 낮에 굶을 것을 대비해서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해서 많이 먹고, 해가 지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점으로 달려갔다. 신기한 것은 이 기간에 음식점이나 식료품점들이 오히려 대목이라고 한다. 보통 때보다 음식소비량이 더 많다는 것이다. 낮에 먹지 못한 것을 밤에 그 이상으로 보충하기 때문이다. ‘낮에는 금식, 밤에는 과식’이라는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직된 종교적 형식주의가 낳은 하나의 해프닝이다. 이와 같은 형식주의는 흔히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극적으로는 ‘위선’(외식)으로, 적극적으로는 ‘자기과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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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도 ‘스펙’(?)으로 여기는 세상!

유대교 역시 금식을 무척 소중히 여겼다. 그들에게 금식은 구제, 기도와 함께 경건생활의 중요한 척도다. 율법은 매 년 ‘대속죄일’(7월10일)을 금식의 날로 정하여 지키도록 했다(레16:29).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간 동안에 다시는 이런 비극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일 년에 4번 금식을 하였다(슥8:19). 4월9일(성전 함락일): 시드기야 11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포위되었다가 멸망당해 그 아들들이 왕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왕 자신도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간 날이다(왕하25:3-4). 5월7일(성전이 불탄 날): 바벨론왕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딘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모든 귀인의 집을 불사르고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간 날이다(왕하25:8~12). 7월2일(그달리야 피살일): 바벨론왕이 유다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관할하는 책임자로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를 세웠다. 그러나 반 바벨론 파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말았다(왕하25:25). 10월10일(성전이 포위된 날): 예루살렘이 시드기야 때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된 날이다. 2년 넘는 포위로 아이들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심한 기근과 고통이 시작된 날이다(왕하25:1). 이와 같이 공식적으로 금식하는 날 외에도 비공식적으로 매주 월요일(모세가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온 날)과 목요일(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날) 이틀씩 금식을 했다. 그리고 금식을 할 때는 세수도 안하고, 맨 발에,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다. 극도의 슬픔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문제는 슬픔에 대한 표시로 금식할 때 가졌던 ‘모습’(세수도 안하고, 맨 발에, 머리에 재를 뒤집어 씀)을 유대인들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금식 중에 있는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였다. 자신이 금식하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금식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한 것이다. 구제와 기도처럼 금식 역시 위선과 자기과시라는 이기적인 욕망의 도구가 된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특히 ‘40일’ 금식기도는 그 사람의 신령한 정도를 나타내는 시금석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금식기도 횟수를 명함에 새겨서 다니고, 신문이나 광고지에 알리기도 한다. 금식도 자신을 알리는 중요한 ‘스펙’(?) 정도로 여긴 셈이다. 아무리 현대인들이 ‘산소와 질소, 그리고 광고를 마시며 산다.’(로벨 게론)고 하지만 지나치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주님은 금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 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16,17).

 

금식에 대한 정의

금식이란 문자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일정 기간 동안 음식물 섭취를 금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성경은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레16:29,31), 혹은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사58:3)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금식의 정신적 영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성경은 이를 ①‘humbled oneself’(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추는 것), ②‘deny oneself’(스스로를 부인하는 것)로 번역하고 있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물 섭취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금식에 대한 올바른 정의다. 그리고 금식이 결코 ‘위선’이나 ‘자기과시’의 수단이 될 수가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주님은 금식의 정신을 망각한 유대인들의 태도를 책망하신 것이고(16), 아울러 금식할 때에도 일상처럼 몸단장을 하여(‘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음’) 금식행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하신 것이다(17). 금식의 목적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데 있지 않고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목을 끄는데 있다(18). 주님의 주목을 끄는 것은 ‘세수도 안하고, 맨 발에,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쓴’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고 자신을 부인하는’ 내적인 태도다. 이것이 올바른 금식이고, 이런 금식을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복을 주신다.

 

금식의 중요성

가면현상(Imposter Phenomenon)이란 말이 있다. 정체성상실현상을 두고 한 말이다. 내 능력과 참모습은 그게 아닌데 과도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며, 이 가면이 언제 벗겨질지 모른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현상을 말한다. 특히 미국에서는 성공한 사람의 70%가 가면현상에 시달리고 있다(클라인스)고 한다. 이러한 가면현상은 허위의식과 관련이 있다. 아무것도 못하면서 하는 척,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 이렇다 할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대단한 존재인 척, 남의 것을 가지고 내 것인 척, 이렇게 ‘~척’하며 살다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고, 때문에 가면현상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면현상은 위선과 외식이라는 허위의식에 빠지게 하는 악순환을 낳는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가면현상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가면이 벗겨질까 두려워 보이기 위한 구제, 보이기 위한 기도, 보이기 위한 금식이라는 위선과 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약한 사람일수록 외적 치장에 신경을 쓴 것도 같은 이치다.

 

우리 신자들에게 허위의식과 가면현상은 무서운 적이다. 이는 나무의 속을 썩게 하여 빈껍데기만 남게 하는 딱정벌레와 같다. 겉은 화려하고 우람하나 속은 텅 비어 있는 나무, 그와 같은 것이 허위의식과 가면현상에 사로잡힌 사람이나 공동체의 모습이다. 유대교가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적인 종교, 생명을 상실한 종교로 전락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속이 텅 비어 허전하니까, 그것이 드러날까 두려우니까 겉치레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악순환을 겪게 되었던 것이고, 주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여 우리에게 경계로 삼으신 것이다. 그런데 이 허위의식과 가면현상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금식’이다. 올바른 금식은 ‘자신을 겸허하게 낮추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상태를 정확하게 보고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허위의식이나 가면현상에 빠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금식의 중요성이다. 이런 점에서 성장기에 있는 청소년들이나 노약자를 제외하곤 가끔 금식을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금식을 하면 많은 영적 유익을 얻게 된다. 금식을 하면 우리 몸에서 노폐물이 빠져나가듯 우리 영혼의 노폐물들이 사라지게 된다. 금식은 영적인 정화, 단순화, 그리고 영적으로 민감하게 한다. 금식은 영적 청소, 혹은 영적 쇄신이다.

 

금식은 나를 지탱해 주는 또 다른 음식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음식을 먹는다(먹어야 한다). 그런데 음식을 스스로 거부하고 금식하는 것은 식욕이라는 욕망을 억제하고 주님께 자신의 간절함, 진정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겠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거는 것이 금식이다. 금식기도가 능력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금식기도는 비상한 상황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느1:4~, 에4:16 등). 주님도 공생애를 40일 금식기도로 시작하셨다(마4:1~11).

 

또 하나 금식이 중요한 것은 ‘나를 지탱해 주는 또 다른 음식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금식하실 때에 사단으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마4:1~11). 주리신 주님께 사단의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어먹으라는 것이었다. 이 때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는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여기서 사단의 시험은 주님을 단지 ‘떡을 위한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주님은 인간이 떡을 위한 존재 이상임을 보여주셨다.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또 다른 음식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다. 우리의 육체는 떡으로 유지되지만 우리의 영혼은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 사람들은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떡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것은 자본주의 신조다. 그래서 돈이 전부인 것처럼 황금만능주의를 부르짖고, 제동장치가 망가진 폭주기관차처럼 물질을 추구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인본주의자들은 자신의 힘과 능력, 지혜가 전부라고 말한다. 하지만 금식은 이와 같은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확인시켜준다. 나를 지탱해준 것 전부가 나의 힘, 능력,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나를 지탱해준 또 다른 음식을 알게 해준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해준다. 때문에 겸허한 자기낮춤과 자기부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식, 금식, 굼식

굶는다고 다 금식이 아니다. 굶는 형태에 세 가지가 있다. 물론 굶는 것은 똑 같으나 의미는 다르다. 첫째는 ‘단식’(斷食)이다. 단식은 자신이나 공동체의 목적을 위해 자기 몸을 가해(加害)하는 협박과 같은 것이다. 둘째는 ‘금식’이다. 단식과 다른 것은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께 자기의 간절함과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자신을 낮추고, 부정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금식이다. 마지막은 ‘굼식’이다. 금식도 단식도 아닌 애매한 것이다. 밥맛도 없고 다이어트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굶는 것이다. 본인은 굼식을 금식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굶는 것이 전부다. 고난 주간이니깐 그냥 굶는 것이고, 교회에서 행사를 앞두고 굶자고 하니깐 그냥 굶는 것이다. 여러분은 세 가지 가운데 어떤 경험이 있는가? 아마 대부분 굼식일 것이다. 아무튼 겸허한 자기낮춤과 자기부정의 통로 금식을 통하여 정신과 영혼의 암 허위의식과 가면현상을 극복하고, 주님께만 집중하여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떡에만 의존하는 육적인 삶과 그 욕망을 뛰어넘어 더욱 힘 있고, 능력 있고, 지혜로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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