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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원리로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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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965회 작성일 21-04-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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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원리로서 함께

20:19~23

2021. 4/11. 11:00

’()테크

미국 타임지에서 1,000명 성인을 대상으로 행복의 주된 원천 4가지에 대한 설문조사했다. 모두가 인간관계와 관련된 것들이 답으로 나왔다. 배우자(73%), 자녀(77%), 친구(75%), 그리고 누군가의 삶에 도움을 주는 것(75%), 4가지를 행복의 원천으로 꼽았다. 모두가 사람과의 관계가 있다. 한마디로 행복이란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다. , 좋은 사람과 함께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보람된 일을 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의미 있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물론 배우자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배우자가 있어서 위로를 받고 행복한 것이 부부다. 자식이 짐 덩어리와 같지만 자식 때문에 행복한 것이 부모 아닌가?

 

요즘 행복한 여생을 위해 ()테크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는 우정이란 단어의 와 테크놀로지의 테크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이다. 이런 비슷한 유형의 조어가 많다. 예를 들면 금()테크, ()테크, ()테크, 푸드(food)테크, (web)테크, (App)테크, 에드(Ad)테크.... 아무튼 함께 마음을 나누고, 함께 대화도 나누고, 함께 시간도 나누고,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테크. 이를 행복하게 사는 전략이라고 한다. 사실 친구 중에 가장 좋은 친구,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끝까지 함께 해줄 수 있는 친구, 곧 우테크의 1순위가 누굴까? 배우자와 자녀. 그래서 앞의 설문에서 행복의 원천으로 배우자와 자녀를 꼽은 것이다. 이런 연유로 배우자가 중요하고, 가족이 중요한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 직면하면서 더욱 이를 실감하게 되었다.

 

함께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함께 해줄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처럼 우리 삶을 따뜻하게 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배우자의 존재, 자녀의 존재, 친구의 존재는 더 없는 축복이고, 행복의 원천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가까운 사람도 함께 하기 위해선 반드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냥 같이 있다고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활동을 한다고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이고 부모인데도 함께 있어서 오히려 불편하고, 그래서 함께 있는 것을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대부분 사춘기의 청소년이 부모나 주변 어른에게 보이는 반응도 그 중에 하나다.

 

어떤 남편이 조기퇴직을 하고, 지금까지는 직장만 바라보고 살았지만 여생은 아내와 함께 하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아내와 함께 등산을 가기로 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등산을 갔다. 그런데 그날 몇 시간동안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그의 아내가 그에게서 들은 말은 단 한 마디였다. 빨리 와!’ 여러분, 이 아내가 다음 주에도 남편과 함께 등산을 갔을까요?절대 안 갔을 것이다. 아마 남편 입에서 등산 소리만 나와도 화를 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남편의 문제가 무엇인가? 아내와 함께 하는 훈련이 부족했던 것이다. 관계훈련 전문가가 함께 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있다. 관계를 강화시켜주는 것인데, 그것은 감사. 자주 감사를 표현하고, 적극적으로 찾아가서 감사를 표현하라고 제안하고 있다. 감사를 자꾸,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상대방이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고마움을 느낄 때 사랑과 우정이 생기고 관계가 건강해지고, 함께 있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대중가요 가사에 나온 과수원 길을 걷고 있는 남녀처럼 말없이 걷다가 눈만 마주쳐도 사랑이 뚝뚝 떨어지고, 행복이 뚝뚝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위기의 시대

지금 우리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는 단순히 전염병 상황 때문에 붙여진 것이 아니고, 전염병도 그 중에 하나가 되고 있긴 하지만 문명도, 기술도, 환경도, 종교도, 교육도, 경제도, 정치도 모두가 위기라는 것이다. 여기에 신앙과 교회도 포함되고, 가정도 마찬가지다. 가정이 위기에 직면했으니 부부도, 부모도, 자녀도 위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기술문명의 발달로 편리하고 풍요로워졌지만 세상살이, 인생살이가 버겁고 비참한 것이다. 행복을 그토록 갈구하지만 행복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이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위기의 공동체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불러서 세우신 제자 공동체였다. 그들은 깊은 실의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주님께서 처참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큰 충격과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이성과 판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속담에 호랑이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는데,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먼저 정신을 잃게 된다. 지금 제자들의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이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18). 그렇지만 이 소식이 제자들의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19) 숨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묘사는 그들이 직면한 위기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지난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미래를 꿈꾸며 온 유대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그런데 어떤 보장도 없이 주님께서 허망하게 처형을 당했고, 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자신들 또한 주님과 같은 상황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된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출입도 못하고 문들을 모두 틀어 잠그고 안에서 떨고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들이 마음의 두려움을 떨쳐내고, 걸어두었던 빗장을 걷어내고 거리로 뛰쳐나오게 되었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바꿔놓은 것일까? 바로 부활의 주님이시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직접 찾아오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21). ‘성령을 받으라.’(22). 여기서 주님의 모습이 감동을 주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이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은 것,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대해 꾸짖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 없는 모습과 행동에 대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위로하시고(평강이 있을지어다), 격려와 용기를 주시고(성령을 받으라), 엄청난 권한을 부여해주셨다(사죄의 권한). 따끔한 책망과 채찍도 필요한 때가 있지만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것은 주님처럼 위로와 격려, 깊은 신뢰와 용기를 주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면

물론 그들이 완전히 바뀌기까지는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핍박을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핍박 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기쁘게 여기고, 죽음까지도 행복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 변화가 되었다. 그들을 이렇게 변화시킨 결정적인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평강과 성령이다. , 부활하신 주님이다. 평강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고, 성령을 지배를 받게 되자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얻어 담대하게 되었다. 두려움이란 어두운 터널에 갇혀 불행하기 그지없던 그들이 평안과 기쁨, 담대한 용기를 가진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서론에서도 말했지만 행복은 소유나 상태,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 이를 달리 말하면 행복은 함께의 문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주님을 믿는 성도와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

 

성도의 행복

조선시대 숙종 임금이 어느 날 잠행을 나갔다가 가난한 동네를 지나게 되었다. 쓰러져가는 집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어느 움막집에서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기와집이 즐비한 부자 동네에서도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에 임금은 어리둥절했다. 임금은 궁금해 움막으로 들어갔다. 주인에게 물 한 사발을 청하고, 그사이 문틈으로 방안을 살펴보니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있고,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짚을 고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빨래를 밟고 젊은 여인은 옷을 깁고 있었다. 그런데 다들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 근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임금은 주인에게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 밖에서 들으니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데....주인은 웃으며 대답했다. ‘빚 갚으며 저축하고 부자로 삽니다.궁으로 돌아온 임금은 움막에 살면서 빚도 갚고 저축도 한다는 사내의 말이 자꾸 생각이 나서 조용히 그 집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 집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임금은 다시 찾아가 주인에게 그 말의 뜻을 물었다. 그러자 주인이 대답했다.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빚 갚는 것이고, 늙으면 의지할 아이들을 키우니, 이것이 저축이 아니고 뭡니까?’ 임금은 비로소 자기 무릎을 쳤다.

 

성도의 행복도 이와 같다. 주님을 믿는 성도가 몸인 교회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주님을 믿는 성도가 주님을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고 가족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테크. 행복한 삶을 위한 최상의 전략이다. 함께 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빚을 갚는 보답이고,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원리에 따라 장래를 위한 저축, 곧 투자다. 함께 함으로 보답과 저축을 동시에 할 수 있으니 행복한 것이다. 여러분, 이 행복을 꼭 붙잡기 바란다. 이 행복을 절대 놓치지 말기 바란다. 함께 하는 것이 빚을 갚고, 함께 하는 것이 저축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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