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원리로서 ‘함께’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위로의 원리로서 ‘함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912회 작성일 21-03-04 14:25

본문

위로의 원리로서 함께

딤후1:15~18

 

밥과 같은 사람

유대인은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하여 대하도록 가르친다고 한다. 첫째, ‘병과 같은 사람이다. 병은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주고 심하면 죽게도 만든다. 사람도 병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대할수록 힘들고, 고통스럽고, 심지어 심각한 피해를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멀리하고 피해야 할 사람이다. 둘째, ‘약과 같은 사람이다. 병이 생겼을 때 찾는 것이 약이다. 마찬가지로 평소엔 그냥 지내다가 어떤 일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살다보면 가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셋째, ‘밥과 같은 사람이다. 매일 챙겨먹어야 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데 꼭 필요한 것이 밥이다. 밥과 같은 사람은 항상 힘과 위로를 주는 사람이다. 만나면 즐겁고 기쁜 사람이다. 활력을 주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항상 가까이 하고, 항상 함께 해야 할 사람이다.

 

고든 맥도날드 역시 그의 책 영적인 열정을 회복하라.에서 사람을 두 종류로 설명하고 있다. ‘기쁨을 주는 사람떠나는 것이 기쁨이 되는 사람이다. 전자가 향기와 같은 사람이라면 후자는 연기와 같은 사람이다. 결국 이 모두는 유익한 사람이냐, 유익하지 못한 사람이냐! 잘 되게 하는 사람이냐, 무너지게 하는 사람이냐!로 요약할 수 있다. 본문에 이웃에게 유익한 삶, 이웃을 잘 되게 하는 삶을 살았던 향기와 같은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오네시보로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름의 뜻도 도움을 가져오는 자’, 혹은 유익을 가져오는 자란 뜻이다. 이름값을 한 참으로 멋진 사람이다. 그는 에베소교회 출신으로 교회를 잘 섬겼던 사람이다(18). 교회와 지체에게 유익을 준 향기와 같은 사람이었다. 밥과 같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바울에게도 큰 기쁨을 주었던 사람이다(16).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쓰다가 갑자기 오네시보로 이야기를 언급하고, 두 번이나 축복까지 한다(16,18). 그리고 본 편지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오네시보로를 언급한다(4:19).

 

사람이라면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다. 복음사역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로마감옥에 갇혀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믿음의 아들이자 제자이고,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목회적 충고를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른다. 특히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회고적 성격이 짙어 바울의 회고담이라고도 한다. 그는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저버린 사람에 대한 섭섭한 심경과 함께, 끝까지 자기를 살피고 도와준 오네시보로와 그 가정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거듭 표현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큰 기쁨을 준 사람으로 오네시보로를 기억한 것이다. 우리도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에 가장 고마웠던 사람으로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본문은 오직 예수, 오직 복음전파를 위해서만 살았던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바울의 이런 모습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 위로가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누구라도 위로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자주 격려해주고’(16)라고 말한다. 여기 격려해주다.는 지난주일 시원하게 하다.’(고전16:18)는 말과 같은 의미다. 이는 숨을 돌리게 하다.’, ‘생기를 불어넣다.’, ‘새롭게 하다.’, ‘힘을 내게 하다.란 뜻이다.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통하여 숨 막히는 현실에서 숨을 돌리게 되고, 활력을 얻고,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이것이 곧 위로. 위로를 받으면 막힌 숨이 뚫리고, 활력을 얻고, 힘을 얻게 된다.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는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위로다. 아무튼 바울은 오네시보로를 통해서 이런 위로를 자주 받았다. 바울 같은 사람도 이런 위로가 자주 필요했다면, 나를 포함해서 우리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함께 위로하고 위로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위로할까? 오네시보로가 어떻게 바울에게 위로가 된 것일까?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16).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랑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왜 감옥에 갇혔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주님 때문이고, 복음 때문이었다. 일의 가치를 알고, 중요성을 이해한 사람은 그 일로 인한 수고나 고난의 가치도 안다. 오네시보로는 주님의 가치,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일 때문에 옥에 갇힌 바울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이 한 일과 그 일 때문에 당한 수고를 알아주는 오네시보로를 통하여 바울은 위로를 받은 것이다.

 
부지런히 찾아 만나는 것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17). 여러 이유로 사람이 떠나고 혼자 있을 때, 오네시보로가 부지런히 찾아와 함께 있어주었다는 것이다. 다른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함께 있어주는 것, 그 자체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정말 그렇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신앙이 좋고 안 좋고, 열심히 섬기고 섬기지 않고를 떠나서 교회를 떠나지 않은 사람이 고맙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한 사람은 더 고맙고, 정말 고마운 사람은 예배도 잘 참석하면서 잘 섬기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마음을 유쾌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 위로라는 것이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 이것이 사랑이고 위로다. 오네시보로는 부지런히 바울을 찾아가 함께 있어 줌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함께 있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함께 있어주는 것 자체가 위로다. 영어에 위로를 뜻하는 단어로 comfortconsole이 있다. 이 두 단어의 접두사가 ‘com’‘con’인데, 둘 다 함께라는 뜻이다. comfort함께’(com) ‘힘을 주는’(fort) 것이고, console외로운 사람’(sole)함께’(con)해주는 것이다. 이 두 영어단어는 함께하는 것이 위로의 원리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위로는 함께 하는 것이다. 곁에서 주는 힘이 위로다. 함께 하면서 들어주고, 웃어주고,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것이 위로다. 함께 하면서 울어주고, 아파해주고, 기다려주고, 함께 하면서 기도해주는 것이 위로다. 그러면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힌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시 숨을 쉬고, 소생하게 된다. 바울이 오네시보로를 통해 이런 위로를 자주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 고마움을 본문에 기록한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한 것이다. 사실 바울에게 위로를 준 사람이 오네시보로 뿐이겠는가? 아마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울이 오네시보로에게 이런 특별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의 태도 때문이다. ‘부지런히’(17) 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부지런히’(스푸다이오스) 라는 단어가 아주 특별하다. 이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는 행위를 뜻한다. 어떤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혼을 쏟아 부어 만들었다고 말할 때, 이것이 바로 스푸다이오스’(부지런히).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이렇게 섬겼고, 그래서 바울이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까지 사랑의 위로, 섬김의 위로를 기억하게 된 것이다.


나의 오네시보로는 누구인가?
우리에게도 이런 오네시보로가 있다. 우리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바쳐 우리를 사랑하고 섬겨주셨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28:18)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주님 때문에 우리가 슬픔 많은 세상, 고통 많은 세상.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주님만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위로가 넘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 우리의 오네시보로다.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은 곁에 있는 사람들 때문이다. 여러분 때문에 내가 있고, 우리 교회가 있는 것이다. 동시에 우리 역시 곁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한 오네시보로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며 그가 있는 곳에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서로 위로를 주는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오네시보로 되신 주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오네시보로가 되기를 원하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62 / 13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