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원리로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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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361회 작성일 21-04-01 15:14본문
영광의 원리로서 ‘함께’
막11:1~11
2021. 3/28. 11:00(종려주일)
천성도 바꾸는 함께
오리와 게가 달리기 시합을 했다. 승부가 나지 않자 심판이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오리가 노발대발했다. 자기는 아무리 잘 내도 ‘보’(보자기)인데, 게는 아무렇게나 그냥 내밀어도 ‘가위’라는 것이다. 그러니 가위바위보는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불공정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선천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타고난 천성이다. 그렇다. 천성은 노력으로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하면 천성도 넘어설 수가 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이 나온다.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바닥이 들어나고 있었다. 이것을 성모 마리아가 발견하고, 조용히 주님께 부탁하여 해결한 내용이다. 주님은 맛도 향도 빛깔도 없는 맹물로 맛과 향과 빛깔을 지닌 최상의 포도주를 만드셨다. 물과 포도주는 화학기호가 완전히 다르다. 전혀 다른 물질로 존재가 다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물을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주님은 우리의 존재와 신분, 상태와 운명까지 바꾸신 분이다. 이렇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분이시니, 주님과 함께 하면 영광을 얻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와 나귀
오늘은 예수님의 지상생애 마지막 한 주간(고난주간)의 첫날이다. 교회력에서는 ‘종려주일’(Palm Sunday)이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환영하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들고 흔든 데서 유래되었다. 사실 종려주일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주님의 이 영광스러운 입성은 고난과 죽음의 전주곡이라는 것이다. 다스리기 위해 권좌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죽으시기 위해 죽음의 자리(골고다)를 향해 나아가고 계신 것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군림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고 자신을 화목제물로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약함과 악함을 생각하게 하는 날이다. 주님을 그토록 환호하며 환영하던 사람들이 단 며칠 만에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폭도로 변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하던 그 손으로 주님을 삿대질하며 정죄하고, 호산나를 외치던 그 입으로 주님께 저주를 퍼부었다. 사람 나쁘게 되는 것 한 순간이다. 매년 찾아오는 종려주일에 우리 자신의 약함과 악함을 보면서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참으로 초라했다. 말이 영광스러운 입성이지 말(馬)도 아닌 나귀를 타고, 그것도 새끼를 타고, 단 한 사람의 호위병사도 없었다. 이것이 어찌 왕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 정도다. 그러나 이 모두는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슥9:9). 때때로 하나님의 뜻이 이처럼 초라함 속에, 어리석음 속에, 연약함 속에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깨어있지 않고 영적 민감하지 않으면 놓치기 쉽니다. 아무튼 이 시간에는 종려주일에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도운 나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나귀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이다.
매여 있는 나귀
주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제자 둘을 맞은 편 마을에 보내면서 말씀하셨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2). 여기 매여 있는 이 나귀는 믿기 전 우리 모습이고,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다. 루소는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있다.’고 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는 말은 동의할 수 없지만 ‘어디서나 사슬에 묶여있다.’는 말은 맞다. 인간은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어디서나 묶인 존재다. 원죄를 안고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죄에 묶이고, 사단에 묶여 죄의 종, 사단의 종으로 살고 있다. 불의한 생각, 악한 생각, 탐욕적인 부끄러운 온갖 생각에 묶여있고, 나쁜 습관, 악한 습관, 경건하지 못한 여러 습관에 묶여있고, 근심과 걱정, 불안과 염려, 시기와 질투 등 나쁜 감정에 묶여있다. 질병에 묶여있는 사람도 많고, 상처에 묶여있는 사람도 있다. 베다니 맞은 편 마을에 매여 있는 새끼 나귀는 알게 모르게 영/육간, 그리고 유/무형의 많은 것에 의해 매여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
풀어진 나귀
그런데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매여 있는 그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매여 있던 이 새끼 나귀는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 풀리게 되었다. 매임에서 놓이게 되고,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 의해 모든 묶임에서 풀리게 되었다.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이다. 또한 구원받은 우리와 교회의 사명이다. 주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시고, 사단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주셨다. 모든 불의와 더러움에서 정결하게 해주셨다. 인생의 많은 짐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셨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런 구원을 얻은 사람이 곧 우리다. 제자들의 손에 의해 자유롭게 된 나귀는 구원받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주님을 태운 나귀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려느냐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 주님께서 이 나귀를 풀어주신 이유다. 주께서 쓰시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영광스러운 일에 이 나귀를 사용하시기 위해서였다(7). 그러니까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풀려난 것이다.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으로부터의 자유’(From freedom)와 ‘~을 위한 자유’(For freedom)가 그것이다. 성도의 자유는 그 자체가 목적인 ‘~으로부터의 자유’를 넘어 ‘~을 위한 자유’다. 다시 말하면 현재 상태로부터의 ‘자기해방’인 동시에, 스스로 선택한 상태로의 ‘자기구속’이다. 루터의 말대로 ‘자유를 포한 자유인’이 성도다. 주님께 받은 자유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갈5:13). 즉, 주님으로부터 얻은 자유를 섬김의 기회, 사랑의 기회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가 항상 지향해야 할 모습이다. 이를 본문의 새끼 나귀가 좋은 모델이다.
영광을 받은 나귀
나귀 입장에서, 태어나 한 번도 짐을 실어본 적이 없는데, 30대의 건장한 사람을 태운 것은 숨이 막히도록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높은 산성이고 건조하고 뜨거운 땅이다. 빈 몸으로 가도 땀이 흐르는 힘든 길이다. 그러니 어리고 경험도 없는 나귀에게 얼마나 버거운 일이었겠는가? 사실 이것이 신앙의 길이다. 신앙의 길은 빈 몸으로 홀가분하게 주변을 산보하듯 걷는 산책길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길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고난의 길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세상에 태어나 거친 일만 하다가 죽을 이 새끼 나귀는 큰 영광을 얻게 되었다. 주님을 태우고 사람의 겉옷이 깔리고 나뭇가지가 깔린 그 길을 환호를 받으며 걷게 되었다(7~10).
그러면 이 나귀가 이런 영광을 받은 까닭이 무엇인가? 그의 노력과 수고 때문인가? 아니다. 나귀가 수고했다고 겉옷 퍼레이드, 나뭇잎 퍼레이드를 베풀어줄 사람은 없다. 오직 주님께서 그를 택하여 주셨기 때문이고, 또한 영광의 주님을 등에 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환영을 받고, 주님과 함께 환호를 받고,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은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부르신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 주님과 함께 인정받고, 주님과 함께 환영받고,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게 된다. 생사고락을 늘 주님과 함께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위로도, 승리도, 형통도 주님과 함께 할 때 받게 되기 때문이다. 파리를 따라가면 종일 화장실이나 시궁창만 다니고, 꿀벌을 따라가면 종일 꽃밭을 거닐게 된다. 현실에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 부지런한 사람과 함께 하면 게을러지지 않고, 적극적인 사람과 함께 하면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하면 지혜로운 삶을 살고, 고상한 사람과 함께 하면 탁월하게 된다. 이것은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님과 함께 하여 영광을 누리는 삶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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