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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예배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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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967회 작성일 21-02-0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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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예배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자!

9:1~14

2021. 1/31, 11:00

경건한 경험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온 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벽에 걸린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예수님이 드디어 그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돌아오시는 모습이었다. 그 그림을 보고 아이가 묻는다. ‘할머니, 저 양도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요?할머니가 부드러운 미소로 아이 눈을 쳐다보고 대답한다. ‘그건 바로 너란다.양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 양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니 아이는 깜짝 놀랐다. 그 말을 듣고 아이는 놀라서 다시 그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 그림은 이제 그 아이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어깨 위에 놓인 양 한 마리와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 그림이 걸려있던 교회, 그 공간은 이제 아이에게 소중한 장소로 기억되었다. 거기서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아이는 그 양이 바로 자신이라던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고, 바로 그곳에서 자신과 주님이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의 신학자 샐리어스(Don Saliers)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나는 이것이 믿는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녀에게 예수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교회에 대한, 예배에 대한, 신앙생활에 대한 경건한 추억이나 경험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감동적이고 놀라운 추억이나 경험은 오래오래 기억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자주 사용하신 방법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실 때, 이집트 땅에서 태어난 사람에서 짐승까지 모든 처음 난 것을 죽이고 그들을 구출하셨다.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고 경험이었다.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들을 위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하신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을 편한 지름길을 두고 거칠고 험한 홍해의 광야길로 인도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이 경건한 경험, 경건한 추억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말보다 단 한 번의 경험이 훨씬 효과적이다.


전이의 공간으로서 교회

여러분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에 대한 어떤 경건한 경험, 경건한 추억이 있는가? 교회에 대한 어떤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중에 쉽게 신앙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들이 여러 이유를 나열하면서 신앙을 떠나고 교회를 떠났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복음에 대한, 주님의 몸인 교회에 대한 경건한 경험, 경건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절대 떠나지 못한다. 떠날 수 없다. 이것을 죽음으로써 증명한 사람들이 순교자다. 교회는 단순히 성도의 모임장소가 아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주님을 경험하며 예배하는 곳이다. 주님을 만나 감격하고, 주님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발견하는 곳이 교회다. 비록 교회는 세상 한 가운데 있지만, 교회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교회는 세상의 공간으로부터 우리를 전혀 새로운 거룩한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교회는 세상과 사람을 분리시켜 하나님의 앞에서 서도록 하는 전이(轉移)가 일어나는 공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그 임재 속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 교회라는 공간이 중요하고, 여기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한 것이다.

 

공간 심리학이란 것이 있다. 공간에도 심리적인 힘이 작용한다는 것인데, 사무실 벽을 유리로 교체했더니 직원 간의 소통이 잘됐다, 아이 방 벽지를 파란색으로 바꾸었더니 성적이 올랐다, 집 안 조명을 노란색으로 바꾸었더니 가족의 분위기가 화목해졌다, 이렇게 공간에도 심리적인 힘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공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간이 어떤 곳이냐에 따라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의 마음 자세 또한 달라진다. 친구 사무실을 들어가는 것과 상사의 사무실을 들어가는 것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내가 들어가는 이 공간은 세상과는 다른 공간, 거룩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반면, 전염병 유행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지금 우리는 가정에서 디아스포라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런데 가정은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다. 누구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가장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사적 공간이다. 때문에 교회에서 느끼는 경험이나 감정을 가정에서는 느끼기가 힘들 수 있다. 이것이 디아스포라예배의 한계. 이 한계를 극복하고자 몸은 가정에서 디아스포라예배를 드리지만 마음은 교회에서 현장예배를 드리는 자세를 갖자고 늘 강조한 것이다. 나라를 잃고 흩어진 유대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기도를 드릴 때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을 통해서 바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유월절

본문은 이집트를 나온 이후 두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다. 첫 번째 유월절은 이집트를 출발할 때 지켰고(12:), 이제 이집트를 나온 지 1년이 지나 시내산을 출발하기에 앞서 두 번째 유월을 지키려한 것이다. 본문에는 누가, 언제, 어떻게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유월절을 지켜야 될 사람은 시내산을 떠나는 이스라엘 자손이다(2). 또 지키는 날은 정해진 때, 곧 정월 십사일 해가 질 때이고(2,3), 지키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미 제시하신 율례와 규례대로다(3). 이것이 이스라엘이 지켜야했던 유월절이다. 이것은 예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할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유월절을 앞두고 문제가 발생했다. 부득이하게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 이유는 그들이 시체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7). 아마 장례를 치러야하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율법에 따르면 시체와 접촉한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하게 되는데(19:11-12), 이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모세에게 찾아와서 사정을 하소연한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 사안을 여쭸고,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대답을 사람들에게 들려줬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10,11). 하나님은 특별한 사정이 생긴 사람들에게 한 달의 유예기간을 허락하셨다. 그런데 지키는 방법은 정상적인 상황에서 지키는 사람과 똑 같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정상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을 향한 유월절 규정이다(13.14). 정상적인 상황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기존의 율례와 규례를 따라 유월절에 참여하도록 엄격한 지침인데, 정상적인 상황에 있는 사람이나 사정이 있어 유예를 받은 사람이나 유월절을 그 규정에 따라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신앙은 공동체적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형편에 상관없이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 유예를 받아 유월절을 지킨 사람도 유월절의 모든 율례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전염병 상황에서 디아스포라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에게 적용하면 성도는 형편에 상관없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디아스포라예배가 허용된 것이다. 그리고 형편상 각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현장예배와 똑 같이 드려야한다는 것이다. 같은 방식, 같은 자세, 같은 마음(정성)으로 드려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디아스포라예배 역시 특수한 상황에서주어진 것이라 점이다.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회복되면, 이러한 유예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정결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축제와 예배의 공간으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이 사뭇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단호하다(13b!). 상황이 정상화되면 반드시 현장예배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씀이다. 정해진 예배공간을 기억하고 그곳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코로나로 인한 디아스포라예배가 자칫 신앙의 개인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조짐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예배의 공공성과 교회의 공동체성의 심각한 훼손이 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신앙의 개인화를 막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길은 교회에서 드리는 현장예배밖에 없다. 본문이 이점 또한 강조하고 있다. 모두 함께, 같은 장소에 모여, 같은 기간에, 같은 음식을 먹으며, 같은 율례대로, 이 모두가 신앙의 공동체성을 강조한 것이다. 아무튼 예배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 예배는 교회의 주요사역이고, 교회는 예배를 위해 존재한다. 유행병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잠시 가정이 교회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아스포라예배를 현장예배처럼 드리되 현장예배의 회복을 위하여 힘쓰며 기도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당국의 방역지침을 잘 지켜야 하고, 적극 협조해야 한다. 그래야 현장예배를 앞당길 수 있다. 한 주간도 현장예배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면서 주님의 살아계심과 우리와 함께 하심을 깊이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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