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의 원리로서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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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417회 작성일 21-02-21 16:07본문
사역의 원리로서 ‘함께’
고전16:13~18
2021. 2/21. 11:00
성공은 인맥관리에 있다.
미국 카네기공대 졸업생 중에서 성공한 사람을 추적 조사한 결과다.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였고. 나머지 85%가 인간관계였다.’ 다시 말해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이 인맥관리가 탁월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특히 ‘세 가지 방문’으로 인맥을 관리한다고 한다. 그 세 가지 방문이란 첫째가 ‘입’ 방문, 둘째 ‘손’ 방문, 그리고 셋째 ‘발’ 방문이 그것이다. 입 방문은 전화나 말로 상대방을 칭찬하고 격려하여 용기를 주는 것이다. 손 방문은 편지나 문자나 선물 등으로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고, 힘들고 지쳤을 때 따뜻하게 토닥여주고 붙잡아주고 이끌어주고 안아주는 것이다. 발 방문은 아프거나 어려울 때 찾아가서 위문하고 위로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맥관리를 잘 하는, 인간관계를 잘 한 사람이 성공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다. 그러니 관계가 곧 재산이다. 지난 주일에도 말했지만 누구를 알고 있고,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함께 하고, 누구와 협력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인류의 범죄로 인한 타락도 결국은 관계실패에 있었다.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존재로 지음 받은 처음 인류가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사단의 화신인 뱀과 교제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 매일이 에덴의 삶이지만 사단과 교제하면 에덴에서 추방되어 지옥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관계가 중요하다. 황금은 황금 이상의 가치를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사람의 가치는 무한정이다. 한 사람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뒤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 탁월한 경영자는 항상 이 사실을 잊지 않는다. 그 한 사람 뒤에 있는 잠재적 고객을 항상 생각한다. 그래서 관계에 정성을 쏟게 되는 것이다. 이를 선교사역, 목회사역에 잘 활용한 사람이 성경에 나온다. 사도 바울이 그 주인공이다.
바울의 사역원리, 혹은 목회원리
바울서신을 보면 바울과 함께 사역을 했던 동역자가 많이 소개되고 있다. 최초의 선교 동역자 바나바를 비롯하여 실라, 의원 누가, 편지 대필자 두기고, 믿음의 아들 디모데, 디도, 루디아, 에바브라, 빌레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등. 특히 로마서(22명 이상)와 고린도 전서(5명 이상)에 이와 같은 동역자의 이름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바울의 사역이 ‘혼자’가 아니라 ‘함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고전16장에서는 ‘함께’라는 단어가 7번이나 나오고(4,6,7,11,12,16,24), 비슷한 뜻을 가진 ‘같이’(10), ‘서로’(20)라는 단어까지 합치면 9회가 나온다. 이와 같은 것들은 바울의 사역원리, 혹은 목회원리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바울 사역의 원리, 혹은 목회원리는 ‘함께’였다. 더불어 ‘함께’, 서로 ‘함께’가 사역의 원리였다. 바울이 그 넓은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그 많은 교회를 세우고, 그러면서 13권이나 되는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원리로 사역을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함께’의 원리가 무너진 교회
사실 고린도교회는 ‘함께’라는 원리가 가장 위협을 받고 있던 교회였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해서 1년 반 동안 섬기다가 에베소로 떠났다. 얼마 후, 글로에의 가족으로부터 고린도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는데, 교회 안에 파당이 생겨 분쟁이 심하다는 내용이었다(1:11). 즉,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 함께 하지 못하고 바울파, 게바(베드로)파, 아볼로파, 심지어는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서 서로 다툼이 심하다는 것이다(1:12). 사실 고린도교회 안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성도 간에 소송문제, 음행문제, 혼인문제, 우상에게 드린 제물을 먹는 문제. 성령의 은사문제, 성찬문제, 부활문제 등. 고린도교회는 문제의 종합선물세트였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의 뿌리가 ‘파당’이다. 분당이나 파벌이 생기면 분열하게 되고, 분열하면 함께 할 수 없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지체들이 살기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서로 연약함을 보듬어주고, 서로를 풍요롭게 해주는 곳이 교회다. 그러나 파당이 생기면서 함께 살 수가 없다. 연약함을 보듬어주어 서로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점을 공격해서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기록된 책이 고린도 전서다.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고, 모든 지체가 각각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성도 역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주님 몸의 지체로서 서로 귀하게 여기며 서로 같이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울 자신도, 아볼로도, 베드로도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3:9)라고 강조한다. 아울러 서로 ‘함께’ 하는 삶의 원리를 선포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10:23,24).
모델이 된 스데바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에 동참하여 서로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스데바나’다. 스데바나와 그의 가정은 아가야의 첫 열매였다. 그는 아덴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성도가 되어, 고향 고린도로 와서 가족에게 전도하여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유일한 사람, 가정이 되었다(1:16). 그래서 그와 그의 가족이 고린도교회의 첫 번째 성도가 된 것이다. 고린도교회는 바로 그의 가정에서 시작이 되었다(15b). 바울은 사역에 동참하여 ‘섬기기로 작정’(자발적으로 섬기기로 헌신했다는 뜻)한 그를 이렇게 칭찬하고 있다. 첫째는 ‘함께 일하며 수고하였고’(16), 둘째는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고’(17), 마지막으로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다.’(18). 그러면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했다(18b).
스데바나는 자발적으로 바울의 사역에 참여하여 함께 일하며 수고하였고, 함께 몸인 교회를 섬겼다. 17절에 스데바나와 함께 바울을 찾아온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에 ‘아가이고’라는 사람이 있다. 이는 ‘아가야에 속한 사람’(아카이코스)이란 뜻으로 그가 아가야 출신 노예였음을 암시한다. 반면 스데바나는 부유한 사람이었다. 이런 그가 노예와 함께 교회를 섬기고, 함께 바울의 사역에 동참한 것이다. 특히 그는 ‘부족한 것을 보충’(17)하는 일을 했다. 대개의 사람은 자신이 드러나고, 또한 드러내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드러나고, 드러내는 일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일을 했다. 물질이 필요한 사람에겐 물질을 채워주고, 관심이 필요한 사람에겐 관심을 채워주고, 일손이 필요한 사람에겐 일을 거들어주었다. 이렇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사람이 온전하게 세워지고, 사역이 완성이 되고,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도록 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모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밖에 없다(18). 이는 ‘숨을 돌리게 하다.’, ‘생기를 불어넣다.’, ‘새롭게 하다.’란 뜻이다. 함께 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이런 사람이 사람과 공동체를 살리고 변화시키는 주인공이란 뜻이다. 스데바나는 이란 삶을 살았고, 바울은 이런 그를 알아주라고 했다.
We-리더십
교회는 함께 하는 곳이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연약한 자와 강한 자가 함께 하는 곳이 교회다. 주님을 믿고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 하는 곳이 교회다. 함께 모이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함께 모여 말씀을 배우고,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하고, 함께 모여 봉사하고, 함께 모여 전도하는 곳이다. 함께 훈련받고, 함께 섬기며 사역하는 곳이 교회다. 그러므로 함께는 교회의 존재방식이고, 교회사역의 기초이고, 원리다. 바울의 사역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강조한 것도 바로 이점이다. 요즈음 코로나 판데믹을 겪으면서 부상하고 있는 리더십이 있다. ‘We-리더십’이다. 공유와 소통에 기초한 ‘함께’(We)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리더십이 아니라 이미 2천 년 전에 우리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리더십이고, 사도바울이 실천하였던 리더십이다. 전염병 판데믹이 이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것이다. 교회와 성도는 주님의 리더십을 따르는 곳이고, 사람이다. 이 리더십으로 일하는 사람이 성도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 교회, 일터에서 함께 수고하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우리를 통해 사람이 세워지고, 가정이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지고, 일터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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