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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逆轉)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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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921회 작성일 16-06-26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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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逆轉)의 하나님

창50:15~21

2016. 6/26. 11:00

드라마와 같은 인생

한 편의 역전 드라마와 같은 인생을 살았던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한다. ‘내가 달리는 것은 1등을 위해서도, 눈앞의 결승점을 위해서도, 최고의 속도를 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다만 달릴 뿐이다.’ 로마올림픽(1960년)에서 우승한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의 말이다. 그는 여기서 두 가지 벽을 깼다. 마라톤에서 인간의 한계라고 여겨졌던 2시간 20분의 벽을 깼고(2시간 15분 16초로 세계신기록), 검은 대륙의 선수는 금메달을 딸 수 없다는 벽을 깼다. 사람들은 거기에다 그가 맨발로 42.195㎞를 달려 정상에 올랐다는 점에 경악했다. 그래서 그에게 ‘맨발의 기관차’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는 에티오피아 황제의 근위병으로 근무하다 20대 중반에 뒤늦게 마라톤을 시작하여 로마올림픽에 이어 도쿄올림픽(1964년 2시간 12분 11초 세계신기록)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로마올림픽에서 우승한 다음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적은 경기에 참석한 67명의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의 적이었습니다. 나는 그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그 후에도 그는 마라톤 경주에서 무려 11회나 우승했다. 이 사실도 놀랍지만 이보다 더 그가 놀라운 선수인 이유는 따로 있다. 올림픽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그가 멕시코올림픽(1968년)에서는 후배 선수의 페이스메이커(pacemaker)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동차 사고(1969년)로 하반신 불구가 되어 거침없이 달리던 그가 이제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맨발의 영웅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훈련하여 노르웨이에서 열린 장애인올림픽 휠체어 썰매경주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두 다리는 잃었지만 내겐 아직도 건강한 두 팔이 있습니다.’ 우승 후 그가 남긴 말이다. 이 외에도 장애인올림픽에서 양궁과 탁구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우리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18살의 나이에 6.25전쟁에 참전하여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목동에서 참전용사로, 황제의 근위병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각인된 위대한 스포츠 선수로, 불우를 극복한 불후의 사람으로 살았다. 비록 41세(1973년)라는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정말 드라마와 같은 멋진 인생을 살았다. 성경에도 아베베 못지않게 드라마와 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나온다. ‘요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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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약사(略史)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 야곱에게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난히 사랑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신 탁월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점이 형들의 시기심과 분노를 자극해서 그들에게 살해를 당할 뻔 했다. 그런 와중에 유다의 제안으로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에게 은자 20을 받고 종으로 팔렸다. 그때 그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이렇게 미디안 상인에게 종으로 팔린 그는 이집트에서 다시 한 번 팔려가게 되었는데, 이집트의 고관 보디발의 집이었다. 비록 그가 종이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셨고, 그로 인하여 주인의 집이 복을 받았다.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집안의 모든 일을 맡겼다. 이제 그의 삶이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았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잘되는 것을 절대로 두고 보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인생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꿈을 찢으려는 원수가 있다. 사단이다. 전엔 형들을 통하여 요셉을 무너뜨렸는데, 이번엔 보디발의 아내를 통하여 그랬다. 그래서 그를 파렴치한 성폭력범이란 누명을 씌워서 지하 감옥으로 처넣어버렸다. 지난 10여 년 동안 쌓았던 모든 수고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그의 시련은 화려한 부활을 위한 준비였다. 물론 그는 몰랐다. 2년 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형들에게 버림받고, 아무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노예였던 그가 일국의 총리가 된 것이다. 그것도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이집트에서 말이다. 이후 원수만도 못한 형들을 만나 그들의 악행을 용서하고, 그들의 가족과 오매불망(寤寐不忘)했던 아버지를 이집트로 모셔와 봉양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총리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그가 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복수다. 형들은 물론 충성스럽게 섬긴 그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둔 보디발의 아내도, 은혜를 입고도 잊어버린 바로의 술을 맡은 관원장도 모두 용서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길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본문은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있었던 일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와 같은 요셉의 믿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형제들의 태도

야곱의 죽음은 요셉의 형들에겐 두려움이었다. 그들은 요셉이 복수를 하지 않는 것은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라 참아온 것이고, 지금까지 참은 것은 아버지 때문이라 생각했다(15).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의 복수가 시작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의 가짜 유언을 만들어 그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그에게 전하게 했다(16).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17).

 

그리고 직접 찾아가서 엎드려 용서를 구했다(18). 물론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된다. 용서받을 수 없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용서해버린 일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용서에 대한 확신’이 없고, 더 나아가 기꺼이 용서해 준 사람을 불신’한 것이다. 결국 이는 한 가지다. 용서해 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면 용서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요셉이 형들의 태도에 눈물을 흘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17下). 자신은 이미 용서를 했는데, 그래서 그들의 가족까지 데려와 잘 보살펴주었는데, 그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래서 복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얄팍한 거짓술수를 꾸미게 만든 것이다. 용서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 때때로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도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의 용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때문이다. 믿음이 없으면 확신이 없고, 그러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요셉 형들의 모습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보기 바라고, 요셉의 모습에서 나를 향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기 바란다.

 

선(善)으로 바꾸어주신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이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형들의 태도에 대한 요셉의 반응이다. 우선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19下). 이는 ‘내가 하나님입니까? 당신들에게 복수를 하게!’ 라는 말이다. 복수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자신은 복수를 하지도 않을뿐더러 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고백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 소위 깨어 있어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한 한계가 분명하다. 요셉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수를 할 수 있었지만 복수대신 용서를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원수를 갚는 것은 주님의 일이고 용서는 우리의 일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일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고백이다. 그는 형들이 자신에게 행한 악행을 이렇게 해석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20). 형들의 악행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악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고백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고백에는 자신이 형들의 악행에 희생을 당했지만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많은 열매를 맺은 것’(요12:24)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요셉이 자신을 낭떠러지로 밀쳤던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그는 지금 용서의 확신을 갖지 못해 두려워 떨고 있는 형들을 따뜻하고 간곡하게 위로하였다.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앙의 질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니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어머니처럼 자상하고 친근한 분으로 믿는 사람은 늘 가까이 하게 될 것이고, 폭군처럼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믿는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능력자로 믿는 사람은 인생의 크고 작은 일들을 낱낱이 맡기며 기도할 것이다. 그리고 요셉이나 바울처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전의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기대하며 나아갈 것이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분으로 믿고 있는가?

 

특히 모든 것을 선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과거의 아픈 상처보다 현재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 가실 선한 결과에 집중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과거의 상처나 사건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히려 큰 기대를 갖는다. ‘주님이 내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시려고, 어떤 복을 주시려고, 이런 아픔을 주시고, 이런 고난을 주실까? 이 아픔과 고난을 무슨 복으로 바꿔주실까?’ 기대하며 참게 되고, 소망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이 보배고, 믿음의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주님께서 끝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요셉을 통하여 만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모든 상황을 선하게 바꾸시는 역전(逆轉) 하나님이시다. 이는 요셉이 그의 생애를 통해 직접 경험했던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요셉이 인생의 그 숱한 어려움을 뚫고 화려하게 부활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요셉이 경험했던 이 하나님은 여러분과 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한 주간도 이런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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