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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향해 귀를 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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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049회 작성일 16-04-03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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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향해 귀를 열라!

마13:9~17

2016. 4/3. 11:00

닫힌 시대, 들음의 중요성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를 ‘불통(不通)의 시대’라고 한다. 그 이유는 상대방의 소리에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안 듣는 시대’, 그저 자기 밖에 모르는(me generation) ‘닫힌 시대’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들음의 중요성이 역설되고 있다. 이것이 소통(疏通)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사람을 얻게 되고, 이런 사람 곁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그래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그 좋은 예가 초(楚)나라 항우와 한(漢)나라 유방의 고사다. 천하를 놓고 항우와 유방이 싸울 때다. 초기에는 항우가 백전백승하였으나 결국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유방이었다. 항우와 유방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는가? 그것은 질문의 차이였다. 항우는 참모들에게 ‘어떠냐?’고 물었고, 유방은 ‘어떻게 하지?’ 라고 물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리더십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항우는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의견)을 물은 것이고, 유방은 자기 생각이나 의견보다는 여러 참모들의 의견(생각)을 물은 것이다. 결국 다른 사람의 의견을 두루 들었던 유방이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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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듣느냐’다. 즉 들음의 내용이다. 영국의 생물학자 네구스는 새들의 청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어치의 알을 울새의 둥지에 넣고 부화를 시켰더니 새끼 어치가 울새처럼 우는 것을 발견했다. 다른 새도 마찬가지였다. 울새의 둥지에서 부화한 새는 울새처럼 울고, 어치의 둥지에서 부화한 새는 어치처럼 울었다. 이것은 알에서 깨어나기 전 많이 들었던 소리가 새끼 새의 소리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뻐꾸기는 자신의 알을 직접 품지 않고 때까치나 지빠귀와 같은 새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집어넣어서 그들이 부화시키게 한다. 그런데도 새끼 뻐꾸기들이 위탁모 새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미 뻐꾸기가 다른 새에게 위탁하여 알을 부화시키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둥지 근처에 와서 자기 울음소리를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인디언 영적 교사의 말이다. ‘인생은 소리로 만들어진 집이다. 그 소리의 울림이 바로 사람을 만든다.’ 인디언 영적 교사의 말처럼, 이 실험은 소리가 그 존재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성경이 얼마나 놀랍고 탁월한가를 알 수가 있다. 이미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에 대해서 말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들음의 중요성, 특히 들음의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의 내용은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려면 주님의 말씀(음성)을 들어야한다. 그 음성을 듣고 반응해야 한다(계3:20). 말씀이 들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 치료와 회복의 역사, 온전케 하는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은 들을 귀를 가지라고 강조하셨다. 귀가 없는 사람이 없지만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이 있는 귀

마태복음 13장은 유명한 천국에 대한 비유장(8개의 비유가 나옴)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나 사건에 비유하여 천국을 설명해 주셨다. 본문은 첫 번째 비유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와 그 비유에 대한 해석 사이에 있는 비유의 목적에 대한 말씀이다. 비유의 목적은 이미 천국의 비밀을 알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더 깊이 알게 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작은 진리까지 빼앗긴다는 것이다(12). 그런데 이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는 비유는 신령한 눈과 신령한 귀를 가져야 깨달을 수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며(16), 들으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이다(9,18).

 

지난 주일에 영적 시각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말씀드렸듯이, 천국의 비밀을 볼 수 있는 신령한 눈과 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잠20:12). 그러니 신령한 눈과 신령한 귀는 우리가 힘쓰고 노력한다고 열리지 않는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눈을 가리어 보지 못하게 하신 것도, 눈을 열어 보게 하신 것도 주님이시다. 마찬가지로 귀를 닫아 듣지 못하게 하신 것도, 귀를 열어 듣게 하신 것도 주님이시다. 주님께서 닫으시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고, 주님이 열어주셔야 볼 수도 들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신령한 것을 보는 눈과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한 것이다(16). 그러면서도 주님은 보는 눈, 듣는 귀를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신령한 것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복을 누리는 비결에 대한 말씀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귀를 열어주셔서 이런 복을 누리게 하실까?

 

집중하여 듣는 것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집중하면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고,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관심을 가지고 집중을 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보다 잘될 수 있는 확률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심도 마찬가지다.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하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인 것이다. 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사모하면서 집중한 사람에게 주어질 확률이 높다. 찾고 또 찾는 사람이 발견할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성경은 ‘힘쓰라.’, ‘열심을 내라.’, ‘사모하라.’,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밭에 감추인 보화」(44)나 「진주장사」(45,46) 비유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신 것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본문에서 주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9)고 명령하신 것이다.

 

귀가 열리는 것은 잘 듣는 것과 관련이 깊다. 잘 듣기 위해선 ‘멈춤-비움-바라봄’이 필요하다. 우선 잘 듣기 위해선 멈춰야 한다. 자신의 행동을 멈추고, 하던 일을 멈추고, 말을 멈추고, 생각을 멈춰야 한다. 다음으로 비워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고, 선입견이나 편견을 비우고, 판단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집중해야(바라보아야) 한다. 귀는 인식기관이다. 마음과 생각의 동의어다. 듣는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 쏟아 부어 집중해서 듣고,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로 듣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듣고, 절박한 심정으로 들어야 한다. 부지런히 듣고, 열심히 들어야 한다. 안도현 시인의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란 시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

.

나는 여치에게 귀를 맡겨두고

여치는 나한테 귀를 맡겨두는 것

 

여치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오도카니 무릎을 모으고 앉아

여치의 젖은 무릎을 생각하는 것

 

상대방의 소리를 듣기 위해선 먼저 상대방과 하나가 되고, 겸허하게 마음을 낮추고 앉아서(멈춤과 비움) 상대방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구하는 사람에게 주시고, 찾는 사람에게 발견되게 하시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주시는 분이시다(마7:7~8). 때문에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천국의 비밀을 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가 열릴 가능성도 크다. 잠언은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22:17)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귀를 기울여’나 ‘마음을 둘지어다.’도 같은 의미다. 잘 듣고, 관심을 가지고 들으라는 뜻이다. 그러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유일하게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했던 좋은 땅처럼 우리의 귀도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좋은 땅과 같은 귀가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의 말씀이 꿀맛처럼 들리는 복된 귀를 갖게 될 것이다.

 

라면봉지를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된 세상

1983년 전투기를 몰고 남쪽으로 넘어온 이웅평 대위를 기억하는가? 그가 남쪽으로 넘어오게 된 동기가 참 특별하다. 그는 우연히 원산 앞바다에서 파도에 밀려온 비닐봉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회사의 라면봉지였다. 동해상에서 남쪽 어부들이 배에서 끓여먹고 버린 라면봉지가 파도에 밀려서 원산까지 온 것이다. 그는 그 봉지에 쓰여 있는 글을 보고 남한사회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봉지에서 읽은 글이란 제조 년/월/일, 내용물에 첨가된 재료들과 함유량, 조리방법, 유효기간, 그리고 변질된 것은 교환해준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이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위치와 장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변질된 것은 교환해준다는 글에서 남한이 어떤 사회인지를 상상하게 되었다. 그래서 월남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버려진 라면봉지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생각하게 되고, 거기에 자기 인생은 걸었던 것이다. 눈이 열린다는 것, 귀가 열린다는 것, 마음이 열린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일상성 속에서 특별한 메시지를 발견하거나 음성을 듣거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이웅평 대위는 하찮은 라면봉지를 통해서, 거기에 적힌 고시적인 글자를 통해서도 자신의 인생을 걸만큼 소중한 가치를 발견했고, 음성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말씀, 살아서 역사하는 생명의 말씀,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의 말씀을 보고 듣고 공부하면서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그것은 아직 우리의 귀가 닫혀있기 때문이다. 잘 듣는 것은 생명과 복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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