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면서 가르치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193회 작성일 16-05-08 13:02본문
행하면서 가르치라!
신31:9~13
2016. 5/8. 11:00(어버이 주일)
유대인의 힘, 가정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본(E. Gibbon)은 로마제국이 무너진 중요한 원인으로 ‘가정의 붕괴’를 지적했다. 그래서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가정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로마의 애국자들이여! 가정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가정을 지키시오.’ 솔제니친 역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붕괴된 원인을 ‘그들이 가정과 교회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고 했다. 가정은 인류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이 세우신 최초의 기관이다.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고 기초가 되는 단위다. 기초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듯이 가정이 무너지면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사단은 가정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무너뜨리려고 한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런데 유대인만큼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민족은 없다. 유대인의 강력한 힘은 모두가 가정에서 나온다. 그들에게 비록 국가는 없었어도 가정은 존재했다. 흩어진 그들의 각 가정이 곧 국가였다. 신앙의 중심이었던 성전은 파괴되었어도 가정은 보존되었다. 가정이 성전이고, 가정이 제단이었다. 부모는 교사요, 제사장이었고, 또한 가정은 예배장소요, 학교였다. 이것이 지난 2천 년 동안 나라도 없고, 성전도 없이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민족과 종교와 언어, 그리고 문화를 잃지 않은 비결이다. 그들은 자녀에게 토라(말씀)를 가르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들의 교육을 말하면서 신앙을 제외시키면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들은 ‘쉐마정신’(신6:4~9)으로 자녀를 가르쳤다. 이것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위대한 힘이다. 그들은 혈통으로 정체성을 정의하지 않고,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교육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유대인은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과 글을 가르치고 배우는 목적이 공부 잘해서 출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이 말과 글을 배우는 목적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을 읽기 위해서다. 그래서 기도하기 위해서다. 또한 말씀을 읽기 위해서다. 같은 일을 해도 목적이 다르면 결과도 다른 법이다.
모범을 보이라!
지난 주일에 우리 아이들의 장래와 소원(꿈)을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자는 말씀을 드렸다. 이 시간에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부모인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것은 쉐마정신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치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6:5,6).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부모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야 한다. 그래야 모든 기회, 모든 장소, 모든 상황에서 자녀에게 가르칠 수가 있다(신6:7,8,9). 본문은 하나님의 종 모세가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준 유언이다(9).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여 주면서 매 안식년(면제년) 초막절에 백성이 모인 곳에서 그들에게 읽어주라는 것이다(10,11). 이를 부모인 우리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적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12).
듣고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선 먼저 부모가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새겨야 한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잘 듣고, 자주 듣고, 많이 들어야 한다. 듣고 듣고 또 듣고 열심히 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 말씀이 기억이 된다. 우리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우리가 소리를 듣는 방식에 대해 최초로 규명한 사람은 프랑스의 귀 전문의사 알프레 토마티다. 그는 소리를 듣는 방식에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귀로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 전체로 듣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다고 할 때는 귀로 듣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귀로 듣는 방식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①‘수동적인 듣기’(hearing)와 ②‘능동적인 듣기’(listening)다. 수동적 듣기는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듣되 무심하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반면 능동적 듣기는 듣기를 원하는 소리에 마음을 집중하여 소리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하여 뇌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에 새겨지게 된다.
여수 애양원 성산교회에 성서반이 있(었)다. 나병으로 맹인이 된 7,80세의 노인들로 구성이 되었는데, 이분들 모두가 신양성서 전체를 암송했다. 이분들이 성경을 암송하게 된 동기는 부모형제도 외면한 자신들을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을 비롯해서 주님을 섬기는 아주 중요한 태도다. 처음엔 아무리 생각해도 보답할 방법이 없었다. 병든 몸에 나이도 많고, 거기다가 앞도 보지 못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출입도 못하는 형편이다 보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자신들에게 아직 청각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으로 할 수 있는 무엇일까 기도하던 중에 성경암송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을 잘 때까지 말씀을 듣고 듣고 또 듣고 열심히 들었더니 그 말씀들이 기적처럼 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배우고
미국 서부 개척시대를 다룬 서부영화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마차를 타고 황금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달리고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와 같이 황금을 찾아 달리고 있는 인간의 행렬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다. 대상만 다를 뿐 ‘황금을 쫓는 사람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금보다 더 귀하다고 했다(시19:10). 그 이유는 말씀이 영혼을 소성시키고, 우둔한 사람을 지혜롭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시19:7,8).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금맥(金脈)을 찾은 것이다. 말씀에 대한 이런 고백은 말씀을 열심히 듣고 부지런히 공부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주의 깊게 공부한 사람만이 그 속에 숨겨있는 보물을 찾아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 번씩 읽는 사람에게 말씀은 보물은커녕 수면제만 될 뿐이다. 말씀을 수면을 유도하고, 삶의 고통을 멈추게 하는 진통제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가끔 듣고, 가끔 읽어야 한다. 자주 사용하면 중독이 되니까! 하지만 말씀에서 금맥(생명, 영생, 은혜, 능력, 축복.......)을 발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열심히 공부하기 바란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히브리어에는 ‘가르치다’는 단어가 없다. ‘배우다’는 단어(למד)를 ‘더 많이 배우다’로 강조하면 ‘가르치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하면 ‘배우다’는 단어의 강조형태인 ‘더 많이 배우다’가 ‘가르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르치고 영향을 주기 위해선 먼저 ‘더 많이 배우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랍비는 ‘우리는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탁월한 스승은 언제나 탁월한 학생이다.’고 했다. 부모는 자녀의 영적 교사다. 자녀를 잘 가르치고, 자녀에게 선한 영향을 주기 위해선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도록 먼저 더 많이 배워야 한다. 먼저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켜 행하라!
중용(中庸)에 올바른 학문을 위해 꼭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방법이 나온다. 박학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 독행지(篤行之)가 그것이다. ‘널리 배우고(博學), 깊이 묻고(審問), 진지하게 생각하고(愼思), 명확하게 분별하고(明辨), 성실하게 행하는 것(篤行)이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하나라도 하지 않으면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五者廢其一 非學也). 말씀을 대하는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마지막 ‘독행지’(篤行之)란 말이다.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배움의 자세가 아니라 배움의 목적이다. 배움의 목적은 배운 것을 삶에서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배우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말고,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약1:22). 아무리 많이 듣고, 많이 공부를 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실천해서 확인하고 경험한 것만이 내 것이다. 영적 교사인 부모가 자녀를 가르치기에 앞에 해야 할 또 하나는 ‘지켜 행하는 것’이다. 먼저 실천해 보이면서 자녀로 따라오게 하는 것이다. 이보다 확실하고 힘이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것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천국의 보배
히브리어로 ‘하나크’(חנך)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훈련시키다.’, ‘일생을 바치다.’, ‘(간격을)좁히다.’는 뜻이다. 나는 이 단어를 통하여 배움과 가르침의 목적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일생을 바치는 훈련이다. 간격을 좁히는 훈련이다. 즉 신앙교육의 목적은 자녀로 하여금 그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도록 하는 훈련이다.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바로 이 단어에서 ‘에녹’이란 이름이 나왔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던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간격을 좁혀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섬겼더니 이런 엄청난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목적, 그리고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는 것, 주님께 일생을 바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보배, 천국의 보배가 되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자녀를 잘 키웠다고 해도 자녀에게 신앙을 심어주지 못했다면 그는 엘리 제사장처럼 자녀교육에 실패한 사람이다. 옥돌도 다듬어야 보배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도 옥돌과 같은 존재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천국의 보배가 될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