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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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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665회 작성일 16-04-24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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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었습니까?

마25:1~13

2016. 4/24. 11:00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다.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는다. 잠잘 때도 눈을 감지 않고,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눈꺼풀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눈꺼풀이 없어서 눈을 감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이 때문에 물고기는 깨어있음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수행자로 하여금 졸거나 자지 말고 깨어서 수도에 정진하라는 상징으로 물고기가 사용되었다. 절에 가보면 ‘목어’(木魚)나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물고기 풍경’을 쉽게 볼 수가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물고기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는 ‘고백적’ 의미다. 물고기를 헬라어로 ‘익스투스’(ιχθυs)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Ιησoυs) 그리스도(Χριστοs)는 하나님(θεος)의 아들(υιος), 구원자(σωτηριας)’라는 말의 첫 글자를 모아놓은 것과 같다. 로마의 박해가 한창일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의사소통과 신분확인을 위한 암호의 한 형태로서 땅이나 카타콤(지하무덤)의 벽에 물고기 그림을 그렸다. 그 이후 물고기는 신앙고백의 상징물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경계적’ 의미다. 자나 깨나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메시지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는 잠을 자지않는다고 생각했다. 자다가 눈을 뜨면 항상 윗목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고, 자다가도 ‘엄마’ 하고 부르면 금방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물 마시고 싶어?’ ‘쉬가 마려워?’ ‘무서운 꿈 꿨어?’ 그래서 어머니는 자지 않나보다 생각했다. 사람이 잠을 자지 않고 어떻게 살 수가 있겠는가? 자되 깊이 잠들지 않고 항상 나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잠을 자다가도 나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을 보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께 민감할 수 있다. 깨어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고, 주님의 영광을 볼 수가 있다. 끝 날에 영광스럽게 임하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가 있고, 주님이 예비하신 영광스러운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가 있다. 본문은 바로 이와 같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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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결혼풍습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의 결혼식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은 결혼식을 밤에 치렀다. 이것은 기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오늘날도 중동지역에서는 밤에 결혼식을 한다. 결혼식 전에 정혼식을 가졌다. 그 기간은 1년 정도로 결혼과 같은 효력이 있다. 정혼식이 끝나면 신랑은 신부에게 ‘지금으로부터 약 1년 뒤, 알지 못하는 어느 날 저녁에 나는 당신을 데리러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준비하고 기다리십시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신랑신부 둘 다 정절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생활을 위한 준비기간이다. 신부는 신랑 집의 가풍은 어떠하며, 음식 및 생활습관은 어떠한지, 거기에 맞춰서 1년 동안 신부수업을 하고, 신랑 역시 신부와 함께 살 집을 짓는 등 신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결혼식의 날자는 신랑 아버지가 정했다.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신랑도 모른다. 이 기간 동안 아버지는 아들의 태도, 생활습관 등을 점검하며 가장으로서 준비가 되었는지 살핀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아들에게 통보한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신부를 데리고 와도 되겠다. 빨리 가라.’ 이렇게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신랑은 친구들과 함께 신부를 데리러 간다. 그런데 신랑 일행은 신부 집으로 직행하지 않고, 동네 어귀에 도착해서 기다린다. 그리고 동네방네 신랑이 왔다는 소식을 퍼뜨린다. 이 소식을 접한 신부는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신부는 보통 열 명의 들러리를 동원하여 준비를 한다. 들러리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 등불을 들고 나가 맞이하는 일,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갈 때 신부를 호위하는 일, 신랑의 집으로 가서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주위를 밝히는 일 등을 한다. 그러니 결혼식에서 들러리의 역할은 중요하고, 이들은 등불과 충분한 양의 기름을 준비해야만 한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낯선 사람이 결혼식에 참여하여 결혼을 훼방하는 일이 종종 있어서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초대된 손님이 일정 시간에 다 들어온 후에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리고 문이 한 번 닫은 후에는 그 어떤 사람이 와도 열어주지 않는다.

 

주님이 오시는 날에

본문은 이와 같은 유대인의 결혼식에서 몇 부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들러리 처녀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신랑의 늦은 도착과 혼인잔치에 참여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열 명의 들러리 처녀들 모두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며 잤다. 결국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잔치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른 그릇에 기름을 준비한’(4) 다섯 명의 처녀들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다섯 명은 함께 기다렸지만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이 비유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으로(마24:3),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신앙공동체 안에서 일어나게 될 사건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어서 나오는 ‘두 비유’(25:14~30/달란트, 25:31~46/양과 염소 비유)도 같은 내용이다. 밤늦도록 함께 신랑을 기다렸지만 혼인잔치에 참여한 슬기 있는 다섯 처녀와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로 구분이 된 것처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똑 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되리라는 것이다. 평생 함께 같은 교회를 다니며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섬기며 살았는데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뉘게 된다는 것이다. 제발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본문은 우리에게 이 점을 경계하고 있다.

 

준비하는 사람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혼인잔치에 참여한 슬기 있는 처녀와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둘 사이의 차이는 거의 없다. 알곡과 쭉정이, 곡식과 가라지, 진품과 모조품이 거의 비슷한 것처럼 이 둘 사이도 거의 같다. 둘 다 처녀였고, 등을 가졌고, 신랑을 기다렸고, 졸며 자는 것까지 같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쯤 되면 둘 사이를 거의 구별할 수가 없다. 다른 점은 딱 한 가지였다. 그것은 ‘준비’였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3,4).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이 바로 이것다. 준비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등만 가지고 갔다. 이것이 미련함의 특징이다. 미련함을 헬라어로 ‘모로스’(μωρος)라고 하는데, ‘신중하지 못하고 예측능력이나 지혜가 결여된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슬기 있는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등과 함께 다른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여 갔다. 따로 기름을 준비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의 차이다. 바로 이 준비의 차이가 이런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깨어 있으라.’(13)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는데, 여기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그것은 슬기 있는 처녀들처럼 등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준비해야 한다. 많은 분들이 등과 기름을 믿음성령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기름이 어떤 ‘구체적인 것(성령, 은혜, 선한 행위와 같은)을 가리킨다고 보지 않는다. 대신 기름이 등불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믿음이 되게 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도일 수도 있고, 찬양일 수도 있고, 말씀읽기나 듣기, 연구, 암송, 묵상일 수도 있고, 목숨을 건 예배생활, 사랑의 실천, 충성스러운 섬김, 뜨거운 헌신일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신령한 기름이다. 사실 마태복음이 경계하는 것이 살았다는 이름만 있는 형식적인 죽은 믿음이고, 이런 믿음으로는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고 했다(마7:21, 히12:14, 약2:14~25). 등만 가진 미련한 처녀들은 형식적인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고, 등과 기름을 가진 슬기 있는 처녀들은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런 믿음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인디언 속담이다.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죽었을 때 세상은 울고, 너는 기뻐하도록 살아라.’ 참으로 멋진 말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멋진 끝을 장식할 수 있을까? 잘 준비한 사람이 그 주인공이 되지 않겠는가?

 

지금 바로 준비하자!

현대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다.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불확실성을 상품화한 시대다. 건강에 대한 불확실성, 사고에 대한 불확실성, 노후에 대한 불확실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강조하여 이것으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야 어쨌든 불확실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건강이나 사고, 노후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계획과 준비를 하면서 죽음이후의 삶에 대해선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교통안전공단과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았다. 우리가 평생 교통사고를 당하고 암에 걸릴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교통사고를 당한 확률은 35.2%이고, 그 사고로 죽을 확률은 10.2%라고 한다. 그리고 암에 걸릴 확률은 남34.4%, 여28.9%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 확률 안에 자신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 즉 내가 거기에 들어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이 불확실성 때문에 온갖 준비를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고나 질병, 미래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니까 준비를 하면서 천국과 지옥,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조차 준비를 하지 않는다.

 

한 아이가 교회학교를 다녀와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믿어요? 죽은 다음에 영원히 사는 것도 믿어요?’ 이 엄마는 자랑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럼, 천국도 믿고, 지옥도 믿고, 죽은 다음 영원히 사는 것도 믿지!’ 그러자 이 똑똑한 아이가 또 물었다. ‘그런데 왜 엄마는 준비를 하지 않으세요? 왜 천국을 위해서, 영생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으세요. 작년 여름에 일본여행을 갈 때, 이번 겨울에 호주여행을 갈 때는 몇 주 전부터 열심히 준비했잖아요.’ 이 아이가 볼 때 자기 엄마는 천국도, 지옥도, 영생도 믿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짧은 여행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는 것은 보았지만 천국을 위해, 영생을 위해 준비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엄마의 모습이 지금 우리 모습이 아니지 모르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렇다. 모르니까 깨어 있어야 하고,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 진지하게 대답해 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지금 오신다면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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