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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나무가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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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558회 작성일 16-04-1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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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나무가 된 사연

마13:31~32

2016. 4/10. 11:00

너도 그렇다!

겨자씨에 대한 비유를 묵상하는데, 갑자기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란 시가 생각이 났다.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머러스한 재미가 있는 시(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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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은 요즈음 만발한 여러 봄꽃들(벚꽃이나 목련, 철쭉)처럼 첫 눈에 반할만큼 빼어나게 아름답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뜻이다. 실제로는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다는 것이다. 이 시로 우리 하경이에게 장난을 많이 걸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하경이도 그렇다.’ 그러면 우리 하경이가 도끼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 시가 강조한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보고, 오래오래 보면 세상에 예쁘지 않는 것, 사랑스럽지 않는 것, 소중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너도 그렇다!’는 구절은 큰 울림을 준다. 겨자씨 비유를 묵상하면서 이 시가 생각이 났던 것은 풀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나를 바라보시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이런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너도 참 예쁘구나. 참 사랑스럽구나.’ 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것을 위해서도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신 것이다. 이러한 사랑과 은혜를 알기에 이런 찬양을 목이 터져라 드리는 것이다.

 

평생 갚아도 빚진 자 되어 주님의 빚진 자 되어

주님 가신 길 택하였건만 눈물만 솟구치네.

생명주시니 주님이시라 능력주시니 주님이시라

말씀 전하여 복음 전하여 주님께 빚을 갚으리.

 

버림받은 잡풀, 겨자

겨자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셨던 갈릴리 호수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이다. 몇 년 전, 2월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마치 우리나라 유채처럼 겨자 꽃이 갈릴리 호수주변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지금이야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라 순례자들에게 환영을 받는 몸이 되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버림받은 천덕꾸러기 잡풀이었다. 겨자는 번식력이 강해서 심어놓으면 급속히 주변을 장악할 뿐만 아니라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농부가 기피하는 식물이었다. 옛 날 우리 어머니들이 ‘논에 가면 가래 원수, 밭에 가면 바래기 원수, 방에 가면 시엄씨 원수, 부엌에 가면 시누이 원수’라고 시집살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 어머니들을 괴롭혔던 ‘가래와 바래기’ 같은 존재가 유대인에게는 겨자였다. 그래서 밭(정원)에는 심지 못하도록 율법에도 규정되어 있을 정도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유대인에게 겨자씨는 ‘작은 것’, ‘하찮은 것’, ‘변변치 못한 것’과 동의어다.

 

그러니 이 말썽꾸러기 잡초를 자기 채소밭에다 심고 애지중지 가꾸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밭을 가꾸는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이런 잡초이고, 잡초는 밭에 심지 않고 모두 뽑아서 버린다. 이것이 잡초의 운명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잡초를 자신의 채소밭에 심어놓고 애지중지 길러서 새들이 깃들 수 있는 나무로 길러낸 이상한 농부의 이야기를 하셨다. 그것이 곧 겨자씨 비유이다.

 

이상한 농부

본문에서 잡초인 겨자의 씨를 자기 밭에 뿌리고 그것을 잘 길러낸 이상한 농부가 주님이 자신이다. 신학자 예레미아스는 주님께서 겨자씨 비유를 주신 본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활동에 의혹의 눈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제자들 대다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주류사회에서 밀려난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에 평판이 아주 좋지 않는 세리까지 있었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창기나 세리, 죄인의 무리가 주로 주님을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화려한 구원 공동체란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이 겨자씨 비유라는 것이다. 겨자씨가 사람들의 눈에 작고, 하찮고, 변변치 못하지만 나중에는 새가 깃들일 만큼 자라는 것처럼 지금 이들이 너희의 눈에 우습게 보일지 몰라도 장차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될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겨자씨 비유는 주님 자신의 생애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사61:1~3)을 인용하여 선포하셨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이는 구약에서 메시야의 사역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이다.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의심이 생겨 자기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서 주님이 메시야이신지, 아니면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할지를 물었을 때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마11:4,5). 이것이 주님 사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잡초처럼 버려진 인생들-세리와 창기와 죄인, 가난한 사람들, 각종 병자들(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육체적인 약자들)-을 집중적으로 찾으셨고,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시면서 친구가 되어주셨고,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이들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잡초와 같은 인생들이었다. 찌꺼기와 같은 인생들이었다. 작고, 하찮고, 변변치 못한 겨자씨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당신의 정원에 심고 살뜰히 돌보셨다. 이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 나라의 초석으로, 기둥으로 만드셨다. 겨자씨 비유는 이와 같은 주님의 생애와 사역을 특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천국의 의외성

동시에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의외성’(意外性), 혹은 복음의 ‘의외성’을 강조하고 있다. 겨자씨 비유는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의 공동체가 처한 상황과 신학에 따라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를 사용한 것이다. 특히 마태는 하나님 나라(복음)의 ‘의외성’에 초점을 두었다(반면에 마가는 ‘보호’, 누가는 ‘성장’에 초점을 두고 있음). 세 복음서의 내용이 비슷하지만 마태복음의 경우는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란다음에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겨자가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과장법이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둥지를 틀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겨자는 풀이다. 풀이 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리고 마태가 이를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마태가 이런 과장법을 사용한 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 나라의 의외성, 복음의 의외성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의외성이란 단순한 외형적 변화(성장)가 아니라 풀(草本)이 나무(木本)가 되는 것처럼 본질(本質)이 바뀐 것을 뜻한다. 존재가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물(H2O)이 포도주(C2H6O)가 된 것처럼 말이다(요2:1~11).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 곧 복음의 역사는 우리의 상식과 생각과 기대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태가 전한 겨자씨 비유의 특징이다.

 

사실 마태복음에는 이와 같은 의외성이 많이 강조되고 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당시 왕도였던 예루살렘에서 탄생하지 않고 작은 시골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에서부터 별 볼 일 없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탄생하신 것, 평생 성경을 연구한 성서학자들이 아니라 별을 연구하는 일반학자들이 주님의 탄생을 먼저 알게 되고,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탄생을 축하하며 귀중한 예물까지 드렸지만 유대인은 축하는커녕 핍박을 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역의 중심지를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로 택하시고, 예루살렘 출신의 유력한 사람들이 아니라 갈릴리 출신의 어부들과 세리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 세리나 창기와 같은 유대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어린이가 천국의 주인공이라고 하신 것, 마감 한 시간 전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이나 똑 같이 품삯을 지불하고,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것, 이 모두가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과 기대를 뒤집어놓은 의외성에 대한 말씀이다.

 

잡풀에서 나무로!

겨자씨 비유는 주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전파하신 복음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존재를 완전히 바꿔놓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특징이기 때문이다(고후5:17).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나 같은 것이 구원을 받은 것은 겨자 풀이 나무로 바뀐 것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고, 의외의 사건이다. 생각해 보라! 작고, 하찮고, 변변치 못한 잡초와 같은 인생을 주님이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자신의 밭에다 심어 정성껏 가꿔주셨다. 풀이 아무리 자라도 나무가 될 수 없는 것은 숙명인데, 그것까지 바꿔 나무가 되게 하셨다. 그래서 모두가 기피하는 무익한 잡풀을 지친 새들이 모여드는 유익한 나무로 만들어주셨다(32).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러니 무익한 잡풀과 같은 존재를 유익한 나무가 되게 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리자! 맛도 향기도 빛깔도 없는 물과 같은 존재를 맛과 향기와 멋진 빛깔을 가진 포도주가 되게 하신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리자!

 

그래서 존 뉴턴이 이런 말을 했다. 그가 82세에 주님께 돌아갔는데(1807년), 그 때 그가 남긴 말이다.내가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라게 될 것이다. 꼭 천국에서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에 놀라고, 도저히 천국에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가장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은 내 자신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와 같은 인간백정, 노예상인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풀이 나무가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마태는 주님의 겨자씨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고, 또한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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