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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님의 가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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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627회 작성일 16-06-12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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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주님의 가족인가?

막3:20~25

2016. 6/12. 11:00

전도의 장애물

한 아내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남편에게 교회 다니자고 졸랐다. 어느 날, 남편이 교회 다니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교회 다니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천국에 간다고 말했다. ‘그러면 당신은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니까 천국에 가겠네?’ 하고 남편이 말했다. 그러면서 ‘나도 교회 다니면 구원 받고, 천국에 가서 당신하고 사는 거야?’ 하고 물었다. 아내는 이렇게라도 관심을 보인 남편이 너무 고맙고 좋아서 ‘그럼요!’ 라고 했다. 그러자 남편이 아주 차갑게 한 마디 했다. ‘그럼 나는 교회 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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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아무리 천국이라도 지금 아내하고 다시 사는 곳은 더 이상 천국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다. 한 사람이 믿고 안 믿고는 주님의 뜻에 달렸지만 믿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생각이 이 정도라면 남편 전도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가족을 포함해서 가까운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신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스스로 잘 믿는 사람들이라 자부했는데, 주님은 그들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22:33) 라고 무섭게 책망하셨다. 그 이유는 ‘천국 문을 닫고 서서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기’(마22:13)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주님을 믿지 않은 것과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지 못하도록 한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은 유대인의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자. 본문 역시 이러한 유대인의 반대에서 비롯되었다.

 

영혼을 미치도록 사랑하셨던 주님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날로 크게 부흥하고 있었다. 주님의 가르침이 기존의 랍비들과 다르게 권위가 있고(마7:29), 게다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구체적인 문제를 다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병을 고쳐주시고, 귀를 쫓아내주시고, 신체적인 불구를 온전하게 해주셨다. 또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당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러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왔고, 그들을 돌보느라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20). 이처럼 치솟는 주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와 인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주님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그것은 두 가지였다.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식사도 거르면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가르치시는 주님의 모습을 두고 ‘미쳤다’(21)고 소문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들이 악의적으로 이렇게 말했지만 주님은 정말 잃어버린 영혼을 미치도록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미친 사랑’이라고 한다. 미치지 않고는 죄인인 우리를 구하자고 사람이 되시고, 그것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비천하게 탄생하시고, 비참한 생애를 보내시다가 십자가라는 극형을 받고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셨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유대교 지도자들과 주님이 다른 점이다.

 

다른 하나는 주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붙잡혔다.’(22,30)고 소문을 냈다.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료해준 것은 모두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의지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했다. 주님을 통해서 드러난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폄하하였다. 주님의 사역을 귀신의 역사로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구제불능의 가장 무섭고 큰 죄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23~29). 한 마디로 당시 유대교와 유대교 지도자들은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와 귀신의 역사도 구분 못하여 성령을 훼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악의적인 소문에 주님의 친족들이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다(21). 물론 당연한 일이다. 자녀가, 형제가, 친척이 귀신에게 붙잡혀 미쳤다는데 보고만 있을 부모형제, 친족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그 친족들, 특히 어머니와 동생들이 주님을 찾아온 데서 본문이 시작한다(31).

 

주님의 가족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악의적인 소문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여전히 주님을 찾아왔고,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다(20). 그때에 주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밖에서 주님을 찾는다고 사람을 보냈다. 미쳤다는 항간의 소문을 듣고 주님을 붙잡아두려고 그랬던 것 같다. 여기서 주님에 대한 지도자와 백성, 그리고 친족 간에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지도자들은 주님께 악의적이었는데 백성들은 호의적이었고, 친족들은 악의적인 소문을 믿었는데 백성들은 그 소문을 무시했다. 이 차이는 사랑과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다. 밖에서 가족이 찾으신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님은 가족의 의미에 대한 중대발표를 하셨다.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4,35).

 

이것은 가족에 대한 기성개념의 해체를 주장하는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모이는 공동체, 곧 ‘영적인 가족’에 대한 선언이다. 즉 하나(주)님의 가족’(familia Dei)이란 새로운 지평을 연 소중한 메시지다(사도신경에 나온 ‘공교회’ 개념이 여기서부터 시작됨).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문화적 충격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호칭’의 문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자녀도 손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부른다. 혈연적인 촌수관계에 혼돈을 겪게 된다. 하나님께는 손자와 손녀가 없다. 언제나 아들과 딸뿐이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갖는 특징이다. 이는 하나님의 가족은 혈연관계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혈연의 중요성을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주님께서도 이를 소중히 여기셨다. 십자가에 달려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잘 보살피도록 부탁하셨다. 그렇지만 영적 가족인 신앙 공동체는 혈연관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 가족의 조건

그러면 누가 영적인 가족, 곧 하나(주)님의 가족이 될 수 있을까? 하나는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34). 본문에 주님이 계신 집 밖에 선 사람(31)과 집 안에서 주님을 둘러앉은 사람(32)이 대비되고 있다. 밖에 선 사람들은 누군가? 주님의 혈연 공동체인 어머니와 동생들이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사람을 보내 주님을 불렀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안에서 주님 곁에 둘러앉아 있었다. 주님은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며,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밖에 서 있는 혈연 공동체의 사람들이 주님의 가족이 아니라 주님 곁에 앉아서 주님을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주님의 가족이라는 뜻이다. 주님 곁에 둘러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주님의 가족이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멀찍이 서서 바라보고만 있는 사람, 밖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구경꾼일 뿐이다. 주님과 함께 있고,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주님의 가족이 되는 조건이다(요1:12). 또한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다(막3:14,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다(35). 주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영적인 가족은 사사로운 혈통적 연고로 맺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진 공동체란 뜻이다. 그래서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함께 있다고 하여 다 가족이 아니다. 그 중에 잠시 동거하는 사람도 있다. 동거하는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 손님이다. 자신에게 유리할 땐 함께 하겠다고 아우성이지만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편하면, 그리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 달성되면 언제든지 떠날 사람이다. 그러나 가족은 유/불리(有利/不利)를 떠나서 끝까지 함께 한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울수록 힘을 더 보태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한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과 함께 한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끝까지 순종하며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함께 있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나아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가족은 함께 있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또한 들은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주님의 가족, 하나님의 가족이다.

 

교회는 영적 가정이다

정철(카피라이터)이라는 사람이 쓴 「인생의 목적어」라는 책이 있다. 그는 2,820명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세 가지 단어를 물었다. 그리고 그 단어들을 모아 순위를 매겼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세 가지를 무엇으로 꼽겠는가? 이 책에 따르면, 첫째가 가족, 둘째는 사랑, 셋째 , 넷째 엄마, 다섯째는 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첫 번째로 떠오르는 단어는 ‘가족’이었다. 가족이란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다. 물론 가끔은 남보다 못한 엽기적인 가족도 있지만 대부분의 가족은 서로 헌신적이고 희생적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무조건적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이 가족이고,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것도 가족이다. 가족은 힘든 일상을 살아내는 중요한 이유이고, 힘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족을 이렇게 정의했다. ‘가족이란 공기와도 같다.’ 우리가 숨 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공기다. 공기가 없으면 사람은 죽는다. 마찬가지로 가족이 없는 삶도 상상할 수 없다. 특히 주님 안에서 맺어진 영적 가족은 더욱 그렇다. 교회는 이 땅에서 영적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영적 ‘가정이다. 그리고 가정은 영적 쉼터이고, 또한 영적 충전소다. 그래서 영적 가족인 성도는 영적 가정인 교회를 통해 영적인 양식을 공급받아 위로와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게 되고, 힘을 얻게 된다. 주님은 여기에 기뻐하는 교회라는 주님의 가정을 세우시고, 우리를 주님의 가족으로 부르셨다. 이곳을 통하여 주님의 가족으로서 건강하게 자라가며, 이곳이 행복한 주님의 가정이 되도록 세워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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