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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맛을 결정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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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420회 작성일 16-05-0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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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맛을 결정짓는 것

잠24:13,14

2016. 5/1. 11:00

인생의 두 가지 맛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맛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하나는 ‘죽을 맛’이고, 다른 하나는 ‘살맛’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전자는 인생의 ‘쓴맛’이고, 후자는 인생의 ‘단맛’이다. 사람은 누구도 죽을 맛(쓴맛)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외 없이 누구나 살맛(단맛)을 찾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성공을 원하고, 편안함을 원하고, 건강을 원하고, 즐거움을 원하고, 부귀를 원하는 것도 살맛나는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호락호락 우리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설령 이것들을 가졌다하더라도 이들이 살맛나는 인생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칼 부세(Carl Busse)라는 사람의 시는 이와 같은 인생의 실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 너머 고개 너머

먼 하늘 끝에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아! 나는

남 따라 찾아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네.

 

산 너머 고개 너머

더욱 더 멀리

행복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

 

단맛을 찾아서 산 넘고 고개 너머 먼 하늘 끝까지 갔지만 결국 쓴맛만 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산 넘고 고개 너머 더욱 더 멀리 행복이 있다고 쫓아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를 보면서 속고 사는 것이 인생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쓴맛 인생을 살아내자니 스스로 속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까 없는 줄 알면서도 안될 줄 알면서도 굳이 있다고 우기고, 된다고 우기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인생은 슬프고 안타까운 것이다. 본문은 우리 인생을 ‘살맛나게 하는 진짜 단 것’(살맛을 결정짓는 것)이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단맛)이다.

사람들은 좋은 것, 소중한 것, 맛있는 것을 흔히 꿀에 비유한다. 귀한 것을 ‘꿀단지’라고 하고, 소중한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입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고 말한다. 음식의 맛이 좋을 때 ‘꿀맛이다.’ 혹은 ‘꿀맛 같다.’고 한다. 그래서 맛있는 떡을 ‘꿀떡’이라 하고, 맛있는 사탕을 ‘꿀사탕’, 맛있는 사과를 ‘꿀사과’라고 한다. 이 외에도 꿀수박, 꿀참외, 꿀밤.......이렇게 맛있는 것에는 이 들어간다. 최근 유행하는 ‘꿀벅지’란 말도 있다. 탄탄하고 건강미가 넘치는 예쁜 다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영어권에서는 부부간에 ‘허니’(honey)라고 부른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꿀처럼 귀하고 좋은 존재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꿀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되고 있다(시19:10, 119:103). 하나님의 말씀이 그토록 귀하고, 좋고, 맛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을 살맛나게 하는 것, 즉 살맛을 결정짓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꿀이 우리 몸에 좋은 것처럼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본문은 꿀의 효능과 관련하여 주신 말씀이다.

 

꿀은 일종의 보약과 같은 식품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꿀의 효능이 많이 소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눈을 밝게 해주고, 심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몸에 열을 발산하도록 한다.’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눈을 밝게 해준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원기를 회복시켜준다는 뜻이고, 정신적으로는 지혜롭게 해준다는 뜻이다. 심장을 튼튼하게 해준다는 것은 건강하게 해준다는 뜻이다. 심장이 튼튼해야 혈액순환이 잘되고, 혈액순환이 잘돼야 몸이 건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다. 말씀은 기진맥진한 우리를 소생시키고, 어리석은 우리를 지혜롭게 해준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은 우리 강건하게 하고, 잘 되게 하고, 영향력 있게 한다(시19:7~8). 또한 우리를 믿음으로 뜨겁게, 사랑으로 뜨겁게, 은혜로 뜨겁게 해준다. 능력으로 뜨겁게, 사명으로 뜨겁게 해준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의 상징인 꿀을 먹으라고 거듭 권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먹으라’는 것은 ‘사모하라’는 것이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라는 것이다.

 

말씀은 장래와 소망을 보장해준다.

며칠 있으면 어린이날인데, 어느 교사의 글을 보고 요즈음 아이들에게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분이 상당했던 아이들의 80%이상이 꿈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꿈이 없는 이유는 그들이 ‘꿈을 꿀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은 아이들이 꿈꿀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는 것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정말 바쁘다. 학교 갔다 와서는 이런저런 학원으로 내몰리고, 학원 갔다 와서는 학교와 학원 숙제만으로도 하루가 벅차다. 물론 이 모두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하라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자신의 장래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시험성적을 더 고민하는 것이 요즈음 아이들이다. 그러니 꿈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분, 꿈을 꾸게 하시는 분, 그리고 그 꿈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37:4).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 아이들 안에서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고, 또한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꾸게 하시고, 나아가서 그 꿈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니 그분의 말씀 또한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듣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면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신다.

 

본문에서 저자는 바로 이 점을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장래와 소망을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4). 그래서 자신의 자녀에게 간곡하게 말씀을 사모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꿀(특히 송이꿀)처럼 먹으라는 것이다(13).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라는 것이다. 스펄전의 말이다. ‘가정에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말씀대로 따라 살면 그 가정에는 천사가 와서 함께 살게 되지만 말씀을 저버리고 그 말씀에 따라 살지 않으면 천사는 그 가정에 오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다. 우리 심령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면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 자녀들이 말씀을 읽고 말씀을 따라 살면 자녀들에게 보내신다.

 

부모의 사명

세계적으로 청소년 문제는 심각한 골칫거리다. 특히 우리나라가 심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청소년 문제가 없는 나라가 있다. 이스라엘이다. 이는 그들의 철저한 교육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자녀교육에 있어서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내용과 방법 때문이다. 그들의 자녀교육의 중심은 철저한 ‘신앙’교육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말씀’교육이다. 이를 ‘쉐마’교육이라고 하는데, 신6:4~9말씀이 그 정신이다. 쉐마(שׁמע)란 ‘들으라’는 뜻으로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들으라는 것이다. 쉐마교육의 특징은 교육의 장소가 학교가 아니라 가정이다. 특히 그들에게 밥상머리는 온가족이 모여 대화와 토론을 하는 작은 학교다. 부모가 교육의 주체다(5,6). 히브리어로 어머니를 ‘’(אם)이라고 한다. 여기서 믿음이란 뜻의 ‘에무나’(אמונה), 진리란 뜻의 ‘에메트’(אמת), 신뢰(확증, 지지)란 뜻의 ‘아멘’(אמן)이란 단어가 나왔다. 부모, 특히 어머니에 의해 자녀의 믿음과 진리와 신뢰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이면서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육의 기초이고(6), 모든 기회, 모든 장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가르치는 것이다(7,8,9). 보통 4세에서 13세까지 10년 동안 이렇게 부모가 자녀의 신앙교육을 책임진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토라’(תורה), 부모를 ‘호림’(הורים), 선생을 ‘모림’(מורים)이라고 한다. 이 세 단어는 ‘가르치다.’, ‘교훈하다.’, ‘어떤 모양으로 만들다.’는 뜻의 ‘라’(ירה)라는 단어에서 왔다. 즉 어원이 같다. 이는 부모가 어떤 존재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부모는 자녀 인생의 이정표(토라)이자 선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셨고, 부모는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모든 가치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고, 이 가치가 부모의 마음에 새겨질 때 그것이 자녀의 마음에 심어지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잘 가르쳐서 좋은 직장을 갖게 하고, 좋은 배필을 만나 일가를 이루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여기고 있다. 이를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한다.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을 전부로 여긴다면 이것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이생이 전부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이생이 전부가 아니다. 정말 현명한 부모라면 이생의 것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자녀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투자해야 한다. 이것이 자녀를 잘되게 하는 비결이다. 우리 자녀의 장래와 소망을 보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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