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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앞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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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127회 작성일 16-06-19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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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앞에 두고

마26:36~46

2016. 6/19. 11:00

나는 어떤 사람일까?

우린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자주 말한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 혼자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는가를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가 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물질적인 여유가 있을 때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또한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조금의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면 그 동안 바빠서 소홀했던 영적인 활동에 그 시간을 투자한다.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경건서적을 읽는다. 뜻하지 않는 돈이 생겼으니 남을 섬기라고 주신 주님의 기회로 생각하고 3만 원이면 한 달을 살아갈 수 있는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어려운 이웃들을 후원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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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나에게 실수나 잘못한 사람을 선뜻 용서한 것은 물론이고, 나의 실수나 잘못에게 대하여 핑계나 탓하지 않고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당사자와 주님께 용서를 구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힘든 일,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미리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렇다고 내 힘으로 그것을 해결하겠다고 안달하지도 않고, 먼저 주님께 내어놓고 기도한다. 그래서 그것을 신앙으로 극복하며 해결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건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준에 비춰볼 때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람인가?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며 마음으로 저항을 느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렇게 살아내는 사람이 흔치는 않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렇게 살았던 분이 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이시다. 본문은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고민

마26장은 주로 주님께서 잡히신 날 저녁에 있었던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본문도 그 중 하나의 사건이다. 죽음을 앞 둔 주님은 비장한 심정인데, 제자들은 이런 주님의 마음도 모르고 세속적인 야망에 눈이 멀어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향해 가시는 주님 앞에서 ‘누가 크냐?’(마20:20~28)며, 서로 요직을 차지하겠다고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로 인한 어색함과 불편함이 주님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마지막 식사 후에 친히 그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요13:1~11) ‘서로 섬기라’(13:14), ‘서로 사랑하라’(13:34,35)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7장에서는 주님의 긴 기도가 나오는데, 특히 제자들을 위한 기도에서 ‘하나 됨’(11,21,22,23)을 강조하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본문 앞부분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어서 기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31)고 경고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특히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부정하였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 심지어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고 장담했다. 이렇게 자신을 모르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려니 주님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마치 모자란 자식을 두고 떠나려는 부모의 심정과 같음). 그래서 주님은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39) 라고 통곡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 성숙한 성도란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고, 또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제자들에게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음은 원이로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세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 주님은 이렇게까지 자신의 속마음을 보이며 세 제자에게 기도를 당부하셨다. 그렇지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겠다던 그 결심은 어디에다 두고 왔는지 그들은 잠을 이기지 못했다. 그렇게 주님이 세 번이나 당부를 하셨지만 단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 우린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하는 것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님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이렇게 원하신다는 뜻이다. 이런 그들을 보시고 주님은 책망보다는 오히려 권면과 함께 그들의 연약성을 깊이 공감해 주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41).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 합리화의 도구, 혹은 자기 변명의 도구로 자주 이용되고 있는 구절이다. 나도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변명의 도구로 이 말씀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나는 이 말씀이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주님의 탄식, 혹은 주제도 모르고 말만 앞세운 제자들의 태도에 대한 주님의 우회적인 책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금번에 이 말씀이 제자들의 마음을 인정해 주시면서 그들의 연약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공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비록 기도하지 못했지만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연약하고, 영적으로 연약해서 실천하지 못해서 그렇지 잘 믿고 싶고, 잘 섬기고 싶고, 잘 따르고 싶고, 열심히 사랑하고 싶고, 부지런히 배우고 싶고, 뜨겁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과 별개로 그들의 말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을 보며 큰 감동과 함께 내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했다. 사람들이 ‘목사님, 술을 끊어야겠는데, 담배를 끊어야겠는데, 기도해야 하는데, 부지런히 섬겨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되요!’ 라고 말하면, 나는 속으로 이렇게 판단했다. ‘무슨 소리야! 혹시라도 술이 싫어지면 어쩌나! 담배가 끊어지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으면서ㅠㅠ’ 문제는 정말 끊어야겠다는 마음이 없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면 기도하면 되고, 섬기고 싶다면 찾아서 섬기면 되는 것이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옹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그 사람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 섬기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니까 진심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주님은 실천과 관계없이 그들의 마음을 인정해 주셨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 마음을 인정해 주시니까 그들이 변하여 기도의 사람들이 되었고,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순교자가 되었다.

 

묵묵히 보여주신 주님

기도모임에 엄마를 따라와서 심하게 장난질을 하는 아이가 있었다. 엄마의 제지에도 막무가내였다. 민망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 이 엄마가 아이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손을 잡아끌었다. 끌려 나가면서 이 아이가 소리를 쳤다. ‘여러분,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우리 엄마의 매가 무척 아프거든요!’ 이 소리를 들은 엄마는 차마 아이에게 매를 댈 수가 없었다. 그저 단단히 주의만 시켜서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또 아이가 말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로 제가 살았습니다.’ 비록 이 아이가 기도모임에 와서 떠들기는 했지만 기도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를 따라 기도모임에 다니면서 학습이 된 것이다. 학습은 말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통하여 이뤄진다. 말로만 되는 것이라면 주님은 실패한 샘이다. 속마음까지 다 털어놓으면서 기도를 당부하셨지만 제자들에게 외면당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도 세 번 다 그랬다. 여기서 3이란 단순한 숫자적 의미 이상이다. 3은 성경에서 완전수다. 이는 주님의 간절한 당부와 제자들의 철저한 외면(불순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때 보여주신 주님의 태도다.

 

제자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주님 자신이 묵묵히 기도하셨다.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든 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기도하셨다. 그렇게 세 번을 하셨다. 온전히 기도에만 집중하셨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제자들을 억지로 무릎을 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 스스로 무릎을 꿇는 모습을 묵묵히 보여주신 것이다. 물론 주님은 시험에 대처하는 법이 기도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41)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따르지 않으니까 직접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사실 ‘보여주는 것’보다 훌륭하고 좋은 교육방법은 없다. 특히 신앙생활은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먼저 삶으로 보여주시면서 가르치신 것이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주님의 교육방법이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기도하셨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시 전에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세리와 창기, 고아와 과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을 섬겼다. 주님은 먼저 본을 보이시며 따라오게 하셨다. 본문의 사건도 그 중에 하나다.

 

주님을 따라서

에드먼드 버크(E. Burke)는 ‘모범은 온 인류의 학교다. 다른 것을 통해서는 배우지 못한다.’고 했다. 좋은 본보기가 중요한 교육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위기 앞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다. 이는 우리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모범이다. 그것은 기도이다. 기도가 해답이라는 것이다. 주님처럼 기도하라는 것이다. 비록 이 때는 제자들이 실패했지만 이 사건을 거울삼아 그들 역시 특히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로 그것을 해결하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위기는 기도에로의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장이다. 기도가 일상이 되어야겠지만 특히 힘들고 어려운 문제 앞에서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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