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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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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293회 작성일 15-08-16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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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사람이 되자!

요12:26

2015. 8/16. 08:00, 11:00

섬김에는 소리가 없다.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세 유형의 사람이 있다고 했다. 첫째는 ‘거미’형 인간이다. 거미는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사는 곤충이다. 별로 노력도 하지 않고, 어둡고 습한 곳에 줄을 쳐놓고 그곳에 걸려드는 곤충을 잡아먹고 산다. 덫을 놓아 다른 사람을 걸려들게 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불한당들이 주변에 참 많다. 공동체에 제거되어야 할 해로운 아귀(餓鬼)와 같은 존재다(有害無益). 둘째는 ‘개미’형 인간이다. 개미는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일하는 곤충이다. 하지만 개미는 이웃을 위할 줄 모른다. 그저 자신과 자신의 가족밖에 모른다. 주변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림자와 같은 존재다(無害無益). 셋째는 ‘꿀벌’형 인간이다. 꿀벌은 이 꽃 저 꽃으로 분주히 다니면서 꿀을 채취하여 자기 자신도 먹고, 꽃들에게는 열매를 맺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맛있는 꿀을 제공하며 사는 곤충이다. 자신을 비롯하여 주변에 좋은 영향과 유익을 주는 이타적인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공동체에 꼭 필요한 천사와 같은 존재다(無害有益).

 

섬기는 사람은 꿀벌과 같은 사람이다. 이들은 묵묵히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다른 사람이 힘들어 하거나 지쳤을 때 조용히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주고 위로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힘들다고 편한 자리 편한 일을 차지할 때도 남들이 피해서 간 그 자리를 말없이 지키고, 피해서 간 그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사람이다. 직분이나 목소리를 높여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땀 흘리는 수고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다.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 그래서 그들의 섬김에는 소리가 없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을 닮은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주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이 찾으시고, 또한 바라시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주님을 만나는 길

어느 시골교회가 건축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전엔 마을에서 새로 집을 지으면 마을 사람들이 하루씩 일을 돕거나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해주는 풍습이 있었다. 교회가 새로 건축하자 그 풍습대로 마을 사람들이 와서 하루씩 건축 일을 도왔다. 그런데 그 마을에 유지인 한 노인은 일보다는 무언가 의미있는 물건을 교회에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무언가 해주고 싶은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목사님은 커다란 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고가(高價)인데도 불구하고 선뜻 종을 기증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교회에 종을 기증하고부터 교회에 관심이 없던 그에게 교회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종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종소리를 들으면 알 수 없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 가슴 뿌듯함이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중에 가장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새벽에도 종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어놓고 그 소리를 들었고, 오가는 길에도 교회에 들러서 한참동안 종을 처다 보며 종 끈을 어루만지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스스로 목사님을 찾아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여 좋은 신자가 되었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사람은 자신이 심은 곳에 마음도 함께 심어놓게 된다. 그곳에 단지 물질만 심고, 땀만 심고, 노력만 심는 것이 아니다. 마음도 함께 심어놓게 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유지처럼 그곳에 항상 마음이 닿아있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마음이 끌리게 되는 것이다. 그곳에 마음도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섬김의 복이다. 이렇게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다보면 그 섬김이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신앙적 논리로 보면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있어야 섬길 수 있지만 현실적 혹은 경험적으로 보면 섬기는 중에 믿음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도 많다. 성경은 이 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섬김의 복을 강조하고 있다. ‘손님을 대접하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고’(히13:2), 심지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마25:40)고 했다. 또한 ‘작은 자 중 하나에게 준 냉수 한 그릇에 대한 상도 잊지 않겠다.’(마10:42)고 했다. 그러니 섬김이야말로 복을 부르는 나팔이다.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본문은 ‘섬김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다. 섬김의 본질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본문의 배경설명 생략). 그렇다. 믿음과 따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누군가를 믿으면 소중한 것도 맡기게 된 것처럼 믿음은 반드시 따름을 동반한다. 믿음은 행동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신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따르는 일에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시대를 보면 돈에 미치고, 건강에 미치고, 자녀에게 미치고, 자신의 야망실현에 미쳐있다. 하지만 주님을 따름에 미친 신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것이 이 시대의 비극이고, 또한 우리 신자의 비극이다. 그런데 본문이 강조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 곧 주님을 믿는 것, 신실하게 잘 믿는 것이 최고의 섬김이라는 것이다. 섬김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행위인 것이다. 섬기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하고, 또한 복이 되는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섬김이 곧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고, 그것을 생활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섬기는 자가 왜 복을 받게 되는 지 그 구체적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섬기는 사람은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를 섬기고, 혹은 무엇인가를 섬기기 위해선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한다. 함께 있지 않으면 섬길 수가 없다. 부모님을 섬기려면 부모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섬기려면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어떤 공동체를 섬기려면 그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주님을 섬기는 자가 주님이 계신 곳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있으니까 하는 일마다 주님을 위한 일 주님께 하는 일이 되고, 주님은 그가 하는 지극히 작일 일이라도 그 섬김을 기억하시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다. 이런 복을 섬김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섬기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함께 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 대해 주느냐가 더 중요하다. 함께 하면서 벌레처럼 종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불행이고 저주다. 그런데 하나님은 섬기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섬김이 복이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특히 이 말씀은 섬김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꿔놓은 충격적인 말씀이다. 솔직히 사람들은 섬기는 일이나 섬기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이 성공해서 출세하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가? 더 많이 섬기려는데 있기보다 군림하여 부리면서 살려는데 있다.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 제자들이 주님을 따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그 엄숙한 자리에서 그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를 놓고 다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니 섬기는 일이 귀하고, 섬기는 사람이 귀한 존재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원(語原)적으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어로 ‘섬기다’는 뜻을 가진 단어가 ‘serve’인데, 여기서 ‘’, ‘하인’이란 뜻의 ‘servant’가 나왔다. 섬기는 것은 종이나 하인의 일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나 헬라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섬김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하나님은 섬기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을 받는 비결이 ‘섬김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면 하찮은 사람도 존귀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면 별 볼 일 없는 일도 귀한 일이 된다. 그러므로 섬김은 주님 가까이, 그리고 하나님께 귀한 존재가 되게 하는 비결이다. 그러니 여러분, 섬김을 영광으로 기쁨으로 특권으로 여기자!

 

예수님의 손과 팔이 되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 스트라스부르(현재는 프랑스 땅)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지체들이 중요한 안건을 놓고 모였다. 교회 마당에 세워진 예수님의 동상이 전쟁의 와중에 폭격을 받아 두 팔이 떨어져 나갔다. 이 동상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 하는 것이 안건이었다. 떨어져 나간 두 팔 부위만 다시 복원하여 붙일 것인가, 아니면 전체를 다시 제작할 것인가? 이 문제를 놓고 서로 고민하고 있는데, 회의에 참석했던 어떤 지체가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 폭격에 맞아서 두 팔이 떨어져 나간 주님의 동상을 그대로 두자는 것이다. 그 대신 그 동상 아래 이런 팻말을 써놓자고 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팔을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의 손과 팔이 되어 주십시오.

 

참으로 우리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섬긴다는 것인데,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주님의 손과 팔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손과 팔이 되어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섬기고, 몸의 지체인 교우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주님의 손과 팔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계신다. 쓰라린 상처로 괴로워하는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손, 질병으로 지처 쓰러진 영혼을 치유하는 손, 인생의 실패로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는 영혼을 붙잡아 일으켜주는 손, 고단한 인생길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을 이끌어주고 인도하는 손, 그리고 이런 영혼을 품어주고 안아줄 수 있는 팔이 되어달라고 하신다. 또한 주님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고, 발이 되어달라고 하신다. 주님의 심장이 되어달라고 하신다. 이와 같은 주님의 간절한 요구에 기꺼이 응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이 주님이 계신 곳에 있게 되고, 하나님께 귀하게 여기심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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