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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연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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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290회 작성일 15-07-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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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연합하라.

왕하18:1~8

2015. 7/12. 08:00, 11:00

麻中之蓬

 생선을 묶은 끈에서는 생선의 냄새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난다는 말이 있다. 사람에게 환경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좋은 환경에 있으면 좋은 영향을 받고, 나쁜 환경에 있으면 나쁜 영향을 받는다. 사람은 환경을 지배하기도 하지만 또한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고사가 생겨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환경에서 무엇과 함께 하고. 무엇을 가까이 하고,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교제하느냐이다.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자란 쑥은 구부러지게 자란다. 줄기도 구부러지고 대궁도 구부러진 쑥대는 곧게 자라기가 어렵다. 쑥은 굽게 자라는 것이 성질이다. 그런데 삼밭의 쑥은 다르다. 삼대처럼 곧게 자란다. 굽게 자라는 성질을 가진 쑥이 삼밭에서 삼을 가까이 하고, 삼을 만나 곧게 자라게 된 것이다. 만남과 교제가 이렇게 쑥의 성질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이를 순자는 ‘봉생마중 부불이직’(蓬生麻中, 不扶而直)이라고 했다. ‘삼밭에서 자란 쑥은 붙들어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는 뜻이다. 무엇과 함께 하고, 무엇을 가까이 하고,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함께 교제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그렇다. 성경에 나온 인물들이 증인이다. 대표적으로 하와와 에녹을 꼽을 수 있다. 처음 인간 하와는 불멸의 존재로 지음을 받아 에덴이라는 최상의 환경에서 살았다. 그런데 뱀으로 위장한 사단을 가까이 하여 사단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었고, 결국은 남편 아담과 함께 낙원에서 쫓겨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반면에 에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극복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하와와 에녹의 삶을 이렇게 갈라놓은 것은 환경이 아니라 만남이었다. 누구를 가까이 하여 교제를 하고, 연합을 하였느냐는 문제다.

 

아하스와 히스기야

본문은 이스라엘 남왕국 유다의 제13대 왕 히스기야에 대한 말씀이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유다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가 나라를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주석가들은 그를 가리켜 ‘악의 종합세트’라고 부른다. 성경 역시 그를 최악의 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연산군과 같은 사람이다. 연산군은 임금이었으나 평민으로 강등(降等)되었듯이 그 역시 죽어서 열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고 평민의 묘실에 묻히는 수모를 겪었다(대하28:27). 그가 이렇게 나라를 망친 원흉이란 불명예를 얻게 된 것은 잘못된 ‘연합 때문이다. 마땅히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그가 하나님보다 주변 나라의 우상을 가까이 하고 그것을 수입하여 섬겼다. 심지어는 앞장서서 암몬 사람이 섬기는 몰렉에게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악행까지 저질렀고(왕하16:3),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라(대하28:22), 오히려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했다(왕하16:7). 북왕조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아합도 어려움에 처했을 땐 형식적으로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를 찾았는데, 그에게선 이런 점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철저하게 우상과 연합을 하고, 이방 나라를 의지하였다. 그 결과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라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윗이후 유다 왕들 중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선한 왕이 되었다.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5). 종교를 개혁하여 신앙부흥을 일으켰고, 특히 앗수르를 더 이상 섬기지 않으므로(7) 나라의 주권을 세웠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8). 그가 이렇게 형통하게 된 비결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는 달리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연합하였다.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6). 하나님과의 연합이 그 황폐한 환경을 뚫고 그를 굳게 일어서게 한 것이다.

 

연합의 조건

신자인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익히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히스기야를 통하여 다시 한 번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연합할까? 여기엔 조건이 요구된다. 즉 연합의 조건이 있다.

 

1. 제거하라!

연합이란 단어를 히브리어로 ‘다바크’(דבך)라고 한다. 강력한 접착제로 붙인다는 뜻에서 왔다. 그래서 연합에는 빈틈없이 달라붙다. 꽉 붙잡다(혹은 매달리다). 친근히 하다는 의미가 있다. 상식적으로 무엇인가를 붙이기 위해선 우선 붙이고자 하는 곳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한다. 페인트칠을 하려면 먼저 칠할 곳을 깨끗하게 소제를 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선 손에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먼저 그의 아버지가 만들고, 세우고, 수입한 모든 우상을 제거했다. 심지어는 모세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인 놋뱀까지 제거했다(4). 백성들이 여기에 분향한 것을 보고도 오랜 세월을 거쳐 내려온 유물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그가 이것을 제거했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와의 관계도 끊어버렸다(7). 이런 철저한 제거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기 위해선, 주님께 달라붙고, 주님을 붙잡고, 주님과 친근히 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우상들을 깨뜨리고, 부수고, 깨끗하게 소제해야 한다.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들과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그래야 주님과의 완전한 연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비우지 않고 채울 수가 없고, 파괴하지 않고는 다시 세울 수가 없고, 단절하지 않고는 새롭게 출발할 수 없다(이런 것을 심리학에서는 ‘분리효과’, 혹은 ‘지리적 효과’라고 한다). 바울은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전15:31)고 고백했다. 자신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뜻이다. 죽어야 주님과 함께 다시 살 수 있고, 주님과의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마음에는 아하스가 만들고, 세우고, 수입하여 섬겼던 우상보다 훨씬 많은 우상들이 있다. 그것을 요한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하였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1요2:16)이라는 우상들이다. 이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하고, 떠나야 하고, 제거해야 한다.

 

2. 의지하라!

밑이 빠진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항아리를 물속에다 푹 담그는 것이다. 우리 힘으로 채워선 채울 수 없지만 물속에 담가두면 채워진다. 그러면 밑이 뚫린 항아리에 물이 가득 채워진다. 오히려 더 잘 채워진다. 우리는 깨진 항아리, 밑이 뚫린 항아리와 같은 존재다. 우린 인생이 채워지지 않아 늘 허기진 이유, 무언가로 열심히 채워보지만 여전히 허전하고 곤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깨져서, 밑이 뚫려서 채워도 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채우려는 것은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그런데 방법이 있다.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님께 잠기는 것이다. 그러면 채워지게 된다. 만족하게 된다. 힘을 얻게 되고, 능력을 얻게 된다. 바로 이것이 의지하는 것이다. 의지한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 신뢰한다는 것, 맡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히스기야가 그의 아버지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채울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5).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하는 방법이다.

 

왕하18, 19, 20장은 히스기야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여기에 그와 관련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앗수르의 대군이 유다를 침공한 일이다. 유다는 아하스 때부터 히스기야 집권 초기까지 앗수르를 섬기면서 막대한 양의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그가 앗수르를 더 이상 섬기지 않게 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한 것이다. 그리고는 회유와 협박을 하며 항복을 하도록 했고, 하나님과 왕을 모욕하고, 백성들을 선동해서 따르지 못하도록 이긴 질을 했다(18:17~35). 하지만 그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중보를 부탁하고(19:2,3), 그 역시 하나님 전에 올라가서 앗수르 왕이 보낸 항복권고문을 하나님 전에 펼쳐놓고 간절히 기도드렸다(19:1,14~19).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란 가장 확실한 증거다. 아무리 위기여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루 저녁 사이에 앗수르 군 185,000명이 죽고, 앗수르 왕 산헤립은 고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섬기는 신의 신전에서 암살을 당했다(이는 우상의 무능과 허상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연합한 사람이 누리게 되는 복이다. 그는 그의 신변에 대한 일을 처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20:1~11).

 

시125:1에,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고 했다. 여기서 산은 ‘부동과 안식의 표상’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렇게 산처럼 어떤 역경과 환난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영원히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도 시온 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된다.

 

복 있는 사람

수많은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소원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었다. 중세시대에 인적이 닿지 않는 깊은 사막이나 산 속에서 수많은 수도원이 생겨난 가장 중요한 이유도 세속과 떨어져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싶고,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하고 싶어서였다. 이렇게 말한 것은 주님과의 연합을 위해 어떤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연합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신자의 영광이 있고, 복이 있기 때문이다(시1:1~2).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연합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는 일이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여 믿고 신뢰하고 맡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주님과의 연합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주님과의 풍성한 교제(사귐)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과의 연합을 통한 복 있는 사람이 되어 복된 삶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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