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찍이 따라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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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087회 작성일 15-08-03 10:02본문
멀찍이 따라가지 말자!
마26:57~58
2015. 8/2. 08:00, 11:00
지리적 효과(geographical effect)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물론 보지 못하니까 더욱 간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게 된다. 서로 죽고도 못사는 사람들도 오랜 동안 떨어져 있어 보지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면 자연히 열정도 사랑도 식고, 마음도 멀어지고, 그래서 서로 잊혀 지게 된다.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는 서로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지리적 효과’, 또는 ‘분리효과’(separation effect)라고 한다.
사단은 이 분리효과를 우리 신자를 무너뜨리는데 아주 효과적인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맹수의 사냥 대상은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다니는 동물이다. 때로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게 만들어서 공격하기도 한다. 아무리 어린 새끼라도 어미와 함께 있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사단도 신자를 공격할 때 먼저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신앙공동체에서 소외되거나 낙오된 사람이다. 뱀으로 변장한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도 하와가 혼자 있을 때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와 광야를 지나고 있을 때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연약해서 대열에서 뒤쳐진 여성과 아이들이 그들의 공격 대상이었다. 사단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신자를 공격한다. 또는 여러 가지 방법(시험, 시련, 핍박과 같은)으로 신앙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오게 만들어 공격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은 사단이 넘볼 수 있는 틈을 주지 말라고 당부한 것이다(엡4:27). 그러므로 바위에 붙어서 어떤 폭풍우와 파도에도 씻겨가지 않는 삿갓조개처럼 주님께, 혹은 주님을 믿는 신앙공동체에 붙어있는 사람만이 어떤 사단의 공격도 막아낼 수 있다. 본문은 주님과의 거리를 ‘멀찍이’ 두고 따라가다가 시험에 빠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도라도 주님과의 간격이 멀어지면 사단의 공격을 받아 넘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베드로 포인트(Peter Point)
베드로는 신앙 역사에 빛나는 신앙고백(마16:16)을 하여 예수님께 인정과 칭찬을 받았던 제자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군졸들에게 잡혀가실 때 ‘멀찍이’ 떨어져서 주님을 따라갔다. 그는 그들이 주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데리고 갈 때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갔지만 주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사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주님과 함께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장담했었다. 최후의 만찬을 마친 자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26:30)고 우울한 예언을 하셨다. 이를 듣고 그가 이렇게 큰소리쳤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다(:34). 물론 그는 “주와 함께 죽일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고 하며 주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정했다. 이렇게 그는 주님의 예언과 경종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면서까지 자신은 주님을 결코 버리지 않고, 주님과 함께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큰 소리쳤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 죽음도 각오했다는 그가 기왕 따르면서 왜 주님을 바짝 따르지 않고 멀찍이 따라갔을까?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따라갔으면서도 왜 당당히 나서서 주님 곁에 서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바깥뜰에만 머물러 있었을까? 58절에 그 이유가 나온다. “그 결국을 보려고.” 그는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기 위해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 주님을 위하여 죽기 위해서 그곳에 간 것이 아니었다. 단지 대제사장과 공회가 주님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내리고, 주님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갔던 것이다. 보기 위해서만 갔으니까 굳이 가까이 따라갈 필요도, 나설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흔히 그가 주님과 거리를 두고 따라간 지점, 혹은 주님과 거리를 두고 앉아있었던 자리를 ‘베드로 포인트’(Peter Point)라고 한다. 이는 단지 그 결국을 보려고만 서있는 ①‘구경꾼의 자리’이고, 아무런 책임감을 갖지도 않고 가질 필요도 않는 ②‘방관자의 자리’다. 또한 그곳은 자신의 편의대로 움직일 수 있는 ③‘기회주의적인 자리’다. 주님이 잘되시면 앞으로 나가 자신이 주님의 제자인 것을 밝히고, 만일 주님이 잘못되어 환란이 오면 도망가기 위한 자리였던 것이다. 주님을 통해서 자기에게 유익이 생기면 가까이 따라가 내가 주님의 제자라고 나서지만 주님 때문에 손해가 되거나 불리한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도망가겠다는 자리였다. 이것을 베드로 포인트라고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구경꾼의 자리, 방관자의 자리, 기회주의자의 자리에서 방황하고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광을 받는 일, 유익되는 일, 박수 받는 일, 칭찬 듣는 일에는 언제나 앞으로 나서지만 주님과 교회를 위해 고통 받는 일, 희생하는 일, 십자가를 지는 일이 있으면 뒤로 슬쩍 물러가는 기회주의 신자, 단지 바라보기만 하는 구경꾼 신자, 아무런 책임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방관자 신자가 그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과의 거리를 멀찍이 두고 따르고, 멀찍이 두고 앉는다. 저와 여러분도 지금 이런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서 ‘멀찍이’는 구경꾼이나 방관자적인 태도, 기회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이런 태도를 가지면 결국 실패자가 된다. 베드로가 그랬다. 그는 주님의 말씀처럼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하였다. 이것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게 되면 그와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라!
그렇다면 왜 베드로는 이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고, 또한 있게 되었을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보다 자기 자신을 더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가 했던 말들을 보면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모든 것은 자신의 결심대로 된다고 확신했던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일은 내 뜻이나 결심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기 뜻대로 결심대로 모든 일이 된다면 세상에 왜 실패자가 있고, 낙오자가 있겠는가? 모두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된다. 성경은 베드로의 사건(마26:)을 통해 이점을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다. 이것을 인정해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있다. 베드로의 실패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 뜻이고, 결심이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주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부정하게 된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 이렇게 예언적인 경고의 말씀을 하셨을 때, 그가 취할 태도는 장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주님께 물었어야 했다. ‘주님,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비겁하게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가지 않고, 주님을 부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에게서 이런 태도를 기대하시면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물론 주님은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 방법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그것이 곧 마지막 만찬 후에 있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마26:36~46)다. 주님은 식사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셨다. 한 곳에 이르러 제자들을 그 곳에 머물게 하시고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만 데리고 좀 더 나아가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 주님은 따로 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통곡하며 기도하셨다. 이렇게 기도하고 돌아와 보니 그 와중에도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주님의 통곡소리가 그들에겐 자장가처럼 들렸는지 모르겠다. 이 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가벼운 책망과 함께 권면하셨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40,41). 잠자지 말고 함께 기도하자는 말씀이다. 이것이 ‘다가오는 시험’(두려워서 비겁하게 도망치고, 부인하는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책망과 간절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을 이기지 못했다. 이렇게 잠 하나도 이기지 못하는 것, 주님과 함께 잠시 동안도 깨어서 기도도 못하는 것이 그의 실존이고, 실상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고,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고, 또한 주님을 위하여 죽을 수가 있겠는가? 잠 하나 이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핍박자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사단을 꺾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그의 실패는 이미 여기서 결정이 된 것이다. 기도가 시험을 이기는 최고의 방법인데, 기도해야 할 시간에 기도하지 못했으니 실패는 당연한 결과였다.
기도가 가까이 하는 비결이다.
기도는 주님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던 시험을 기이는 방법이자 주님을 가까이 하는 비결이다. 지금까지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삶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주님께 온통 마음을 쏟고(‘즐거워함’), 주님께 집중하는 것(‘사랑함’)이라 했고(지지난 주), 주님께 마음을 쏟고, 집중하기 위해선 은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지난 주). 그리고 일상에서 이 은혜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평소에는 잊고 살더라도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 집중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기억하게 되고, 또한 은혜를 사모하며 요청하게 된다. 그러니 은혜의식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도를 주님을 가까이 하는 비결이라고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도라는 정의 속에 이미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기도란 일차적으론 요청이나 요구이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면 기도는 주님과의 ‘사귐’이고 ‘교제’이고, ‘대화’다. 이런 정의에는 ‘친밀성’이란 말이 전제되어 있다. 친밀한 사이여야 대화가 가능하고, 교제나 사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기도란 단어들 중에 ‘가까이 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προσευχή)가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다. 날마다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자석에 가까이 갈수록 강한 자력이 생기는 것처럼 주님과의 간격이 좁혀질수록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길 수 있는 강한 힘이 생긴다. 바로 그 비결이 기도다.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 없이 착수하지 말고 기도보다 앞서지 않는 것’이 승리의 비결, 주님을 가까이 하는 비결이다. 본문의 베드로는 기도에 실패하여 주님과의 간격을 멀찍이 두게 되었고, 결국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안타까운 실패를 경험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런 뼈아픈 경험을 되살려 시험에 직면해 있는 교회들에게 깨어서 기도할 것(벧전5:8)을 간곡히 당부했던 것이다. 요즈음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심령과 교회와 가정과 주변을 이처럼 뜨겁게 만들도록 하자! 이 무더운 여름을 주님과의 간격을 더욱 좁히는 기회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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