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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가까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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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638회 작성일 15-08-1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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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가까이 하자!

시119:161~168

2015. 8/9. 08:00, 11:00

인생의 안전수칙

 휴전선 인근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한 「사격장의 아이들」이란 영화가 있다. 어느 선생님의 수기를 영화로 만든 것인데, 6·25전쟁이후(1960년대) 아이들이 처한 비극적 현실을 교사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이다. 꿈을 키우며 공부에 열중해야 할 아이들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야 하는 암울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이 아이들의 ‘일터’는 죽음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사격장이다. 이들은 인근에 있는 군부대 사격장을 늘 찾아간다. 탄피를 주워서 고철로 팔아 생계에 보태기 위해서다. 그래서 사격훈련이 시작되면 숨을 죽이고 근처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훈련이 끝나면 몰려가서 알밤을 줍듯 탄피를 주워 모은다. 그런데 이렇게 주워 모은 탄피들 중에 불발탄이 있었다. 그것이 터져서 심각한 장애를 입거나 생명이 위태롭게 되는 장면들이 나온다. 아이들은 불발탄을 주우면 장난삼아 불에 넣거나 두드리다가 이런 위험을 자초한 것이다. 사격장에는 이런 경고팻말이 붙어있다. ‘이곳은 위험지역이니 출입을 금하고, 불발탄을 발견할 때는 즉시 신고 바랍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경고팻말을 경고로 여기지 않는다. 경고의 말을 무시하고 장난삼아 한 행동이 끔찍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도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다가 발생한 경우가 많다. 지금과 같은 피서(避暑) 철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 계곡이나 강, 바다에서 익사사고에 대한 소식이다. 이런 사고의 대부분이 물놀이에 대한 기본적인 ‘안전수칙’을 무시했다가 당한 경우이다. 예를 들면, 물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몸 풀기 운동을 하라. 술을 마시고 수영하지 마라. 수영실력만 믿고 안전선을 넘어가지 마라. 깊은 곳에서는 반드시 안전장비를 착용하라. 안전요원의 시야를 벗어나지 마라는 등. 이런 기본적인 안전수칙만 잘 지켜도 사고를 막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생의 안전수칙이다. 우리 인생의 안전과 형통과 행복, 그리고 생명을 보장해 주는 삶의 안전수칙이 곧 성경이다. 그러므로 시편저자의 고백처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1:2).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말씀에 대한 태도

시편 119편은 총 176절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고 있는 시다(성경에서 가장 길고, 가운데 있는 장).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따라 8절씩 22연(8×22=176)으로 된 ‘답관체’ 형식의 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119편을 ‘황금의 ABC’라고 불렀다. 84,121,122,132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에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단어(율법, 율례, 규례, 계명, 법, 법도 등)가 나오고 있는 것도 본시의 특징이다.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율법학사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가 본시의 저자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본문은 21번째 연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잘 드러난 곳이다.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161).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162). ③‘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163). 주의 계명들을 하였나이다.’(166).

 

여기서 말씀을 ‘경외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행(실천)하는’ 이 네 가지는,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우리가 말씀에 대하여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이다. 또한 말씀을 가까이 하는 비결이다. 하지만 이 네 가지를 다 다루는데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 이 시간에는 말씀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려고 한다. 다른 세 가지는 설교에서 자주 언급하기도 했고, 말씀을 경외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무시한 사람들

D. L. 무디를 이어 미국전역에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월버 채플린이라는 목사의 일화다. 그가 젊었을 때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무디를 찾아갔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도무지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무디가 요5:24절을 펴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무디가 물었다. ‘이제는 그대가 구원받은 자임을 알겠는가?’ 그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다시 그 말씀을 읽으라고 하고 또 물었다. ‘이제는 구원받은 자임을 믿겠는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또 다시 읽으라고 하고 물었다. ‘이제는 그대가 구원받은 자임을 믿겠는가?’ 역시 그는 모르겠다고 또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무디가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를 쳤다. ‘그대가 감히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의심하는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고 하시면 얻은 것이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면 옮긴 것이지, 그대가 감히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가?’ 무디의 이 말에 그가 엎어졌다. 그리고 후에 ‘구원의 확신’을 증거하는 부흥사가 되었다.

 

그대가 감히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가?’ 라고 꾸짖은 무디의 말을 우린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우리가 꼭 가져야 할 태도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말씀을 소홀히 여기는 태도가 문제다. 이것이 베드로를 주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지게 하여 무너지게 만들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저주까지 하게 만들었다. 사실 성경에 나온 불행한 사건이나 불행하게 된 사람들 모두가 이와 관련이 있다. 롯의 두 사위가 소돔고모라와 함께 유황불에 멸망한 이유를, 성경은 그들이 롯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창19:14).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 것도 ‘돌아보거나.......머물지 말고.......도망가라.’(:17)는 말씀을 무시하고 ‘돌아보았기’(:26)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삼상15:22,23). 또한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고, 백성은 포로가 되어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생의 안전수칙인 말씀을 무시하여 일어난 일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다. 말씀을 소홀히 하고, 멀리하여 형통할 수 없다.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본문에서 시인은 권력자의 어떤 위협이나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경외한다고 했다.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161).

 

여기서 경외(敬畏)란 말은 한자어로는 ‘공경하고’(敬) ‘어려워(두려워)하는’(畏) 것이다. 이는 ‘두려워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야레’(ארי)에서 온 것인데, 신적인 두려움을 나타낼 때는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이 때 야레는 단순히 무서움으로 벌벌 떨며 도망가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다. 두렵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강력한 이끌림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신비로움이 동반된 두려움이다. 그래서 이를 ‘거룩한 두려움’, 혹은 ‘경건한 두려움’으로 해석을 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의 쓰임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와 관련이 깊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최고로 높이고, 최고로 존중하고, 최고로 귀하게 여기는 태도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삶의 1번으로 삼고 섬기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경외다. 그런데 본문에서 저자는 이 단어를 말씀에도 적용하고 있다. 말씀을 최고로 사랑하고, 최고로 높이고, 최고로 존중하고, 최고로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경외한 것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이런 태도는 본문의 저자뿐만 아니라 모든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사드락, 메삭, 아벧느고)가 바벨론 왕의 신상과 극렬하게 타는 풀무 불을 두고 선택하라고 했을 때 신상에게 절하는 대신 풀무 불을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단3:).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단6:). 하나님 외에 섬기는 모든 것이 우상이라는, 우상을 섬기지 말하는 말씀을 자신들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교통법규를 지키면 그 교통법규가 우리를 지켜준다. 물놀이 안전수칙을 잘 지키면 그 안전수칙이 계곡과 강과 바다에서 우리를 지켜준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경외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주신다. 말씀을 사랑하면 말씀도 우리를 사랑하고, 말씀을 존중하면 말씀도 우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면 말씀도 우리를 소중히 여기고, 높이면 높여주신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이를 확인해 준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생명보다 소중히 여겨 목숨을 걸고 지켰더니 말씀이 그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 불과 굶주린 사자 굴에서 건져주셨다. 그들의 지위를 이전보다 더욱 견고하게 하시고, 또한 높여주셨다. 심지어는 적일지라도 말씀을 소중히 여긴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출9:20,21).

 

신자는 말씀의 종이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삶을 말씀에 복종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선 말씀을 경외해야 한다. 말씀을 가장 높이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존중하고,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것이 곧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이고, 또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다. 이와 같은 삶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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