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이웃의 친구, ‘다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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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639회 작성일 15-06-14 14:51본문
어려운 이웃의 친구, ‘다비다’
행9;36~46
2015. 6/14. 08:00, 11:00
주변이 행복해지는 사람
어느 교수가 강의 중에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한 사람인가?’ 그러자 학생들 중에서 여러 가지 답변이 나왔다. ‘자기 목표를 이룬 사람,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 이름이 만인에게 알려져 인기를 얻은 사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그렇지만 이것들은 교수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교수가 생각하는 답은 이것이었다. ‘그 사람이 있음으로 주변이 행복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어떤 사람의 성공이 다른 사람의 실패를 의미해서는 안 된다. 내가 올라갈수록 다른 사람이 내려가고, 내가 부유해질수록 다른 사람이 가난해지고, 내가 행복해질수록 다른 사람이 불행해지고, 내가 웃을수록 다른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된다면 어떤 지위, 업적, 명성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 특히 나의 성공이 하나님의 영광에 누가 된다면 그 성공은 오히려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유익과 기쁨이 되고, 나아가서 주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어야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으로 인하여 행복해 하는가?
본문에 난로처럼 주변을 따뜻하게, 선풍기처럼 시원하게, 그래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 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다비다’가 그 주인공이다. 물론 소유나 성취적 관점에서 보면, 성공한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 골골이 실패한 사람이다. 그녀에겐 재산도 없고, 남편도 없고, 의지할 자식도 없었다. ‘없고, 없고, 없고’의 인생, 의지할 피붙이 하나 없는데 중한 병까지 걸린 과부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유일하게 ‘여제자’라고 불렸다(36). 그녀의 삶과 신앙이 주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어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거기다가 그녀가 죽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 옆에 서서 울었다.’(39).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삶이 어떠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근 도시에 있는 사도 베드로를 데려와서 기도하여 다시 살려냈다는 것이다(40). 그만큼 그녀의 존재가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이었다는 뜻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말이 있다. ‘관 뚜껑을 닫고 나서야 비로소 일은 정해진다.’는 뜻으로, 사람은 죽은 후에야 그 사람의 살아 있을 때의 가치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죽은 다음에 비로소 알 수 있다. 다비다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향기로웠는가를 그녀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 증명하고 있다.
눈이 아름다운 사람
예수님의 말씀 중에 ‘성한 눈’과 ‘나쁜 눈’에 대한 교훈이 있다(마6:22~23). 여기서 성한 눈과 나쁜 눈은 주로 물질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고 있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것을 헬라어로 그대로 번역을 하다 보니 그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다. 히브리어로 ‘성한(좋은) 눈’(עין טובה/아인 토바)은 ‘관대함’을 뜻한다.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22:9). 반면에 ‘악한(나쁜) 눈’(עין רעה/아인 라아)은 ‘인색함’을 뜻한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잠28:22). 악한 눈을 가진 사람은 소유에 대하여 인색한 사람이고, 선한 눈을 가진 사람은 소유에 대하여 관대한 사람이다. 그래서 선한 눈을 가진 사람, 곧 마음이 관대한 사람은 어려운 이웃을 긍휼히 여겨 그들에게 양식을 나눠준다(잠22:9). 이런 사람이 건강한 눈, 좋은 눈,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다. 본문에 나온 다비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다비다는 히브리어이고, 헬라어로는 ‘도르가’다(36). 이는 ‘영양’, ‘사슴’ 또는 ‘아름다운 눈을 가진 영양’이란 뜻을 가진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런데 다비다는 그 이름의 뜻처럼 정말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의 눈은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랑의 눈, 이웃의 어려움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긍휼의 눈이었다. 특히 가장 어려운 이웃의 대명사, 과부들을 잘 살피는 경건한 눈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움 사람들을 관대하게 섬겼던 사랑의 사람이다. 병들어 죽을 만큼 자기 몸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섬김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37). 때문에 그의 눈이 감겨졌을 때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이런 아름다운 눈은 감겨져서는 안 될 눈이기 때문이다. 세기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이런 멋진 말을 남겼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싶으면 사람들의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으면 당신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다비다는 이 말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신앙생활은 ‘눈 바꾸는 훈련’이다. 자기밖에 못 보는 인색한 눈을 주변을 두루 볼 수 있는 관대한 눈으로 바꾸는 훈련이다. 이웃의 불행과 아픔과 고통을 보는 아름다운 눈으로 바꾸는 훈련이다. 현재만 바라보는 눈에서 미래를 보는 눈으로, 땅만 바라보는 눈에서 하늘을 보는 눈으로, 물질적 세속적인 것만 바라보는 눈에서 영적이고 신령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꾸는 훈련이다. 저와 여러분의 눈이 이렇게 아름다운 눈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아름다운 눈을 가진 사람이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진정한 성공자이다.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청각활동이 아니다. 본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 있어야 들리고, 마음이 있어야 보인다.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안 보이고, 못 본다. 마음이 없으면 보고도 못 본체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30~37)에 나온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라! 그들은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갔다. 보았지만 못 본채 했다.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도와주었다. 그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한 만큼 보인다.’(愛則爲眞看)고 한 것이다.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그들의 사정이 보이고, 그들의 형편이 보인다. 그들의 아픔이 보이고, 눈물이 보인다. 새롭게 눈이 뜨인 것이다. 그리고 보이니까 소중한 것을 나누게 되고, 보이니까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섬기게 된다.
그렇다. 이웃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눈이 좋은 눈이다. 고통을 볼 수 있는 눈이 건강한 눈이고, 어려움을 볼 수 있는 눈이 아름다운 눈이다. 다비다는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도 어렵지만 더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서 나누고 섬기게 된 것이다. 본문은 그녀를 이렇게 소개한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으니”(was always doing good and helping the poor, 36). 그녀는 ‘심히 많은 선행과 구제’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많다’는 것은 수량적인 의미가 아니다. ‘태도’다. 영어성경은 이를 ‘항상’(always)이란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선행과 구제를 언제나 자나 깨나 했다는 뜻이다. 그것이 습관이었고, 거기에 전념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전념하다보니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 중병을 얻어 죽은 것이다. 그렇지만 죽음이 그녀의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의 선행과 구제는 자신이 가진 바느질 기술로 과부들의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준 일이다(39).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바느질)을 단지 자신의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만 사용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사용한 것이다. 그녀는 여기서 우리에게 섬기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바늘’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섬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사람들은 재능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 나눌 수 없고, 섬길 수 없다고 말한다. 다비다를 보면 나눔과 섬김은 소유의 문제도 재능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고, 나아가서 신앙의 문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고 한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이라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나눔과 섬김은 사랑할 때 가능하다.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항상 나눌 것이 있다. 주고 또 주고도 줄 것이 있다. 더 주지 못해 안달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다비다처럼 바느질이라는 사소한 재능으로도 얼마든지 위대하게 섬길 수 있고, 의미 있는 나눔을 실천할 수가 있다. 이런 사람이 주변을 행복하게 만드는 진정한 성공자이다.
우유 두 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미국 메릴랜드의 한 마을에 허름한 차림의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고학생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서 서적 외판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더위와 배고픔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을 입구에 있는 어느 오두막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서 한 소녀가 나와선 자기 집은 책을 살만한 형편이 못된다고 했다. 그는 이마에서 땀을 닦아내며 시원한 우유 한 잔을 부탁했고, 그러자 소녀는 쟁반에 시원한 우유 두 잔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 주었다. 그는 한 잔을 요구했는데 두 잔을 내주는 소녀의 친절에 감동하여 수첩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메릴랜드 병원에 한 여성 중환자가 실려 왔다. 병원장 하워드 켈리는 의료진을 총동원하여 그 환자를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그러나 이 여인은 1만 달러가 넘는 병원비 청구서를 보고 한숨을 토했다. 그런데 청구서 뒷면에 작은 메모지에 병원장의 짤막한 글이 적혀있었다. ‘20년 전에 저에게 대접한 우유 두 잔이 치료비입니다.’
서적 외판원이었던 고학생 청년과 그에게 우유를 대접한 소녀가 병원장과 환자로 2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그리고 병원장이 된 그 청년은 소녀의 친절을 기억하였다가 이렇게 보답을 한 것이다. ‘공짜는 없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특히 나눔과 섬김은 더욱 그렇다. 나눔이나 섬김은 메아리와 같다. 반드시 나누고 섬기는 사람에게 큰 기쁨으로 돌아온다. 땅에서 보상을 받지 못하면 하늘에서 밝게 드러나게 된다. 사실 이것은 감춰질수록 다음에 더욱 크게, 더욱 아름답게 드러난다. 그래서 주님께 말씀하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두고, 심은 만큼 거둔다. 그러니 폴 투르니에의 말처럼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다비다의 삶이 바로 그 증거다. 그녀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나눔과 섬김 때문이다. 기회 있는 대로 풍성하게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자!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는 것이고(딤전6:19),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다(마6:20). 주변을 시원하고, 따뜻하게, 그래서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이다. 또한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별처럼 빛나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42, 단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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