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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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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253회 작성일 12-12-1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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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노아’

창6:8~12

2012. 12/16. 08:00, 11:00

노아의 방주호텔

 고대 마야인이 예언한 지구 종말의 날이 2012년 12월 21일로 며칠 남지 않았다. 마야인이 만든 달력이 2012년 12월 21일까지만 나온 데서 착안한 것이다. 이날이 다가오면서 요즈음 지구 종말을 상품화한 것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노아방주와 관련된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게다가 러시아 건축사무소 레미스튜디오(Remi studio)가 물 위에 뜰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의 방주호텔을 선보여 관심을 모은 것이다. 노아방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디자인 된 이 이색호텔은 지구온난화로 인한 대홍수가 발생해도 끄떡없이 버텨 인류의 생존을 도울 수 있다는 컨셉이다. 자급자족을 우선으로 하는 방주호텔은 태양전지패널과 강수수집시스템, 풍력발전장치를 통해 전기와 물을 자가 공급하는 한편 온실과 유사한 형태의 외관으로 구조물 내에 자체적으로 녹지공간을 조성 유지하여 식품을 조달할 수 있다. 덕분에 외부영향을 받지 않고 건물 안에서 독립적인 생활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인간의 생존활동이 외부에 영향을 끼치지도 않는 완벽한 분리공간이 될 수 있다고 한다. 하중이 고르게 분배되는 디자인적 특징 덕분에 물에서도 땅에서도 안정감 있게 설치가 가능하여 어떤 재난상황에서도 전천후로 활용 가능할 것이라고 개발자들은 덧붙였다. 이와 같은 상업목적 외에도 실제로 종말을 대비한 대피소(방주)를 만든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세상의 끝이 오면 인간의 이런 노력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다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으니 방주는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종말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정작 이 종말을 믿고, 준비하고, 선포해야 할 교회와 신자는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홍수심판에서 살아남은 ‘노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노아시대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며 근심하실 만큼 타락하여 심판이 불가피한 시대였다(6:5~7,11~13). 그런데 그런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이 노아다. 그래서 노아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은혜’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노아에 대한 이 짤막한 기록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는 악하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악한 세상을 이길 수 있고, 악한 세상에 물든 자신을 이길 수 있고, 세상과 인간을 이렇게 만든 마귀를 이길 수가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잘 살 수 있고, 잘 될 수 있다. 노아의 삶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1. 멸망에서 구원을 받는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켄트 백작은 독실한 신자였다. 그에게도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임종을 지켜보던 의사가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업적과 그가 베푼 선행을 열거하였다. 그러면서 사후(死後)는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백작이 이런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은 백작이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이오.’ 업적과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업적이나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생을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고, 일생을 벙어리로 살 것을 맹세하고,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으로 기어서 순례여행을 하기도 한다. 모두가 구원을 향한 눈물겨운 행진이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란 종교적인 어떤 행위가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한다. 구원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구원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이기에 은혜이다.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이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18).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여 모든 생명을 다 멸하시겠지만 노아와는 특별한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와 그 가족을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숙명이고, 이 멸망에서의 구원은 필생의 과제다. 사실 구원이란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도 중대한 문제이다. 평상시에는 잘 모르다가도 위기에 부딪쳤을 때 가장 절박하게 다가오는 문제이다(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5분). 이것을 일거에 해결해주는 것은 주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이고, 구원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도 노아처럼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하는 것이다.

 

2. 의로운 삶을 살게 된다.

본문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9)고 말씀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여기서 “의인”, 그리고 “완전한 자”란 말은 절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이다. 절대적인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롬3:10). 당대의 사람들과 비교를 했을 때 노아가 의롭고 완전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고 관계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이 깊다. 당대의 사람들 중 노아 외에는 누구도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방주를 준비하라는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도 없었다. 심지어는 방주를 준비하고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도 순종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육체적 향락에만 빠져 있었다(마24:38). 노아만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이것이 의롭고 완전한 삶이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홍수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세상에 비가 내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비를 보지도 못했고 비를 모르니 홍수에 대해서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배를 만들라는 장소도 그렇다. 바닷가가 아니라 산 위에다 만들라니 누가 순종할 수 있겠는가? 순종한다면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정신이 나간 사람이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런데 노아는 순종했다. 이와 같은 노아의 순종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여기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란 홍수심판을 뜻한다. 노아 역시 큰 비를 보지도 알지도 못했다. 그러니 홍수라는 개념자체도 없었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그 일을 예비하여 방주를 준비한 것이다. 이 믿음 역시 은혜의 선물이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의로운 삶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산물이다.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의로운 삶이 가능하다. 성 프랜시스의 일화다. 그의 제자가 환상 중에 천국을 갔다. 많은 보좌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눈에 띄게 높았다. 그는 인도하는 천사에게 ‘이 보좌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프랜시스’라고 대답했다. 환상에서 깨어난 제자는 어느 날 스승에게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스승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제자는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도둑, 강도, 살인자 등 온갖 악인이 득실대는데, 어떻게 선생님은 스스로 가장 악하다고 말씀하십니까?’고 따졌다. 그랬더니 프랜시스가 웃으면서 ‘그건 네가 나를 몰라서 그런다. 정말 나는 악하고 나쁜 놈이야. 주님께서 내게 이렇게 많은 은혜를 주셔서 오늘의 내가 된 것이야. 만약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라면 그들은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야.’라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로 이야기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제자는 스승을 제대로 알아보게 되었다.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 되고, 프랜시스가 성인으로 추앙을 받는 것은 그들 개인의 경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입으면 노아와 같은 사람, 프랜시스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은혜를 사모하라!

주님은 종말론적 시대의 징후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한 시대’(마24:38~39)라고 하셨다. 누가 오늘날처럼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흔들리는 시대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의롭고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혼란하고 부패한 시대정신을 이기고 어두운 세상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진지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한다. 물론 은혜는 선물이다. 그렇지만 성경은 사모하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사모하는 사람에게 만족을 주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약속하고 있다(시107:9).

 

여기서 ‘사모한다.’는 것은 한 순간에 스쳐가는 감정이 아니라 집요하게 계속되는 감정이다. 그 사모하는 감정이 고정되어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를 항상 마음에 품고 자나 깨나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 것, 이것이 사모함이다. 주님의 은혜에 대한 이런 마음(태도)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더욱 큰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다. 노아라고 하여 특별하지 않고, 성 프랜시스라고 하여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이 특별한 존재, 특별한 삶을 살았던 것은 주님의 은혜 때문이다.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역시 주님의 은혜를 입으면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용장불여지장(勇將不如智將)이요, 지장불여덕장(智將不如德將)이라’했다. 여기에 ‘덕장불여복장’(德將不如福將)을 덧붙이고 싶다. 누구도 복(福)받은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은혜를 입으면 만사형통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보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풍성한 주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노아처럼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흔들리는 시대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의롭고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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