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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3, ‘人一己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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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1건 조회 15,115회 작성일 12-09-2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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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3, ‘人一己百’

시37:1~8

2012. 9/23. 08:00 11:00

1만 시간의 법칙

불편하지 않은 진실이 있다. 낙제생이었던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 실력이 없다며 팀에서 쫓겨났던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 해고당했던 상상력의 천재 ‘월트 디즈니’,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들은 강했다. 혹은 그들은 탁월했다’가 아니라 ‘그들은 끈질겼다. 혹은 그들은 성실했다’이다. 그들의 성공비결은 ‘성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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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글래드웰(M. Gladwell)의 「아웃라이어」(outliers)란 책이 있다. ‘아웃라이어’란 원래 ‘본체로부터 분리된 대상이나 물건’을 뜻하는데, 저자는 ‘보통의 범주를 뛰어넘어 성공을 거둔 인물’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여기서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 1만 시간(하루 3시간씩 10년)은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웃라이어’의 공통점이다. 제니스 기킨과 스티븐 코블리가 피겨스케이팅 선수 24명의 훈련과정을 관찰해 일류선수와 보통선수의 차이점을 밝혔다. 연구결과를 보면, 일류선수는 연습시간의 68%를 고난이도 점프훈련에 썼다. 엉덩방아를 찧어도 어려운 기술에 도전했다. 반면 보통선수는 연습시간의 48%만 점프에 투자했고, 일류선수보다 더 많이 쉬었다. 일류와 보통의 차이는 재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훈련에 있다는 뜻이다. 김연아 선수의 전담 코치였던 브라이언 오서는 ‘연아의 재능을 하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연아가 연습하는 과정을 딱 삼일만 지켜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가 점프기술 하나를 익히기 위해 최소 3000번의 엉덩방아를 찧는다고 한다.

 

성실성이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

성실이란 단어는 라틴어로 ‘시네쎄라’(sinecera)인데, ‘밀초로 때우지 않음’이란 뜻이다. 로마시대에서는 조각 작품도, 항아리와 같은 생활용품도, 건물도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가 대리석에 금이 가거나 흠이 생기고, 귀퉁이가 떨어지면 대리석과 같은 색깔의 양초로 때워서 감쪽같이 사람의 눈을 속였다고 한다. 하지만 양초로 때운 것이 얼마나 가겠는가? 그러므로 양초로 때우지 않음이란 말은 속임수나 눈가림이 없다는 뜻이고, 이것이 ‘성실’이다. 미국 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의 일화가 좋은 예라 생각한다. 카터가 대통령에 출마하여 선거유세를 하던 어느 주일이다. 대개 표를 얻기 위해 큰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선거운동을 하는데, 그는 그 주일에도 그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23년 동안 해온 주일학교교사 일을 했다. 매주일 가르치던 학생 20명을 앞에 놓고 평소와 같이 성경을 가르쳤는데, 그날 신문기자 70명이 찾아왔다. 그러자 카터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기자 여러분! 오늘은 여기에 오셨지만 다음 주일에는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로 가십시오.’ 그동안 정치인들의 위선과 거짓에 염증을 느낀 미국인들은 이렇게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카터의 성실한 모습을 보고 그를 대통령으로 세웠던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은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했다. 사람이 얼마만큼 성실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매사가 성실성하면 참된 존재이고, 성실성이 부족하면 그 만큼 거짓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평가할 때 학벌이나 살아온 이력과 같은 외적인 것을 많이 본다. 그러나 사람됨을 보려면 성실성을 봐야만 한다. 성실성은 인격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성실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도 중요한 덕목이고, 신앙성숙의 척도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땅에 머무는 동안 그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3)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으라.

본문은 다윗이 노년에 쓴 일종의 지혜시다. 악한 사람들의 번영을 불평하거나 시새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그 이유(2,8)와 방법(3~7)을 제시하고 있다. 아울러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의 복을 받는 비결이기도 하다. 3절에, “.......땅에 머무는 동안 그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라는 말씀도 악인의 형통을 불평하거나 시새워하지 않는 방법이고, 복의 통로가 되는 비결이다(3절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땅 위에 머무는 동안 이하를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의 종속절로 보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머무는 동안 이하를 독립절로 보는 경우다. 그래서 번역 성경들도 우리 성경처럼 후자를 따라 번역한 성경이 있고, 전자를 따라 번역한 성경도 여럿 있다. 본 설교는 후자를 택함).

 

우리의 몸은 매일 먹는 음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매일 먹는 음식이 우리의 건강을 결정한다. 먹는 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약이 되고, 혹은 독이 되고 병이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성격이나 인격에도 큰 영향을 준다. 오늘날 사람들이 조급하고 과격하고 여러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가 패스트푸드(fastfood) 때문이라며, 슬로우푸드(slowfood)를 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의사들도 어떤 약을 먹고 어떤 주사요법을 쓰기에 앞서 식생활개선을 강조한 것이다. 먹는 것이 약물치료나 주사요법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먹는 것이 곧 그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은 먹는 대로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이나 영혼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이다. 예수님은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고 하셨다. 먹은 것이 악이고, 들어가는 것이 악인데 어찌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부정적인 말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먹은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악한 말이나 악한 생각을 먹은 사람은 악한 사람이 된다. 불의를 먹고, 불평이나 원망을 먹은 사람은 불의하고, 불평과 원망의 사람이 된다. 그렇지만 선한 말이나 선한 생각을 먹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되고, 의를 먹고 감사를 먹은 사람은 의롭고 감사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이유로 부모가 자녀들에게, 혹은 신자 상호간에 선하고 아름다운 말, 긍정적이고 힘이 되는 말, 은혜롭고 복이 되는 말을 해야 하고, 본이 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정신적 영적인 음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악한 사람들, 세속적인 풍속이나 이단을 멀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으라고 한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처럼 신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실한 사람에게 베푸는 주님의 은혜와 복을 누릴 수가 있다.

 

주님은 성실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여기서 ‘그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다’는 히브리어로 ‘르에 에무나’(r‘eh ’emunah)인데, 이는 ‘성실을 소중히 여기다. 혹은 기뻐하다.’는 뜻과 ‘안전보장을 즐거워하다. 혹은 기뻐하다.’는 뜻이 있다. 성실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안전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이 성실이기 때문에 그분이 성실한 것만큼 성실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사람에게 성실하고, 맡은 일에 성실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성실해야 한다. 모든 일, 모든 관계에서 성실한 사람이라야 하나님 앞에 설수가 있다.

 

어떤 분이 그랬다. ‘신자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성실이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바울은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에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2,23)고 했다. 무엇을 하든지 성실성이 최고의 자산이다. 성실한 사람에게는 기회가 많고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좋아하여 관계의 폭이 넓고(소유가 아니라 소속이 최고의 자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신다는 점이다. 물론 많은 기회와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신 것도 하나님의 복이다. 그래서 성실한 사람은 잘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음악의 대가 바흐(Johann Sebastian Bach)는 라이프찌히 성 토마스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섬기고 있을 때 주일마다 부르는 성가대의 곡을 작곡했다. 출판한 것도 아니고 작곡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매주일 주님을 섬기기는 마음으로 작곡했다. 당시 그가 만들었던 곡들은 265개의 오르간곡과 263개의 합창곡, 162개의 피아노곡과 기타 수백 개의 오르간곡들이다. 이 곡들이 훗날 그가 음악의 세계를 이룩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저 주님을 섬기는 마음 하나로 성실하게 했던 일인데 그것이 자기에게 커다란 복으로 돌아온 것이다. 심는 대로 거두고, 심은 만큼 거두는 원리는 성실에도 예외가 아니다.

 

다시 성실성이다.

‘人一己百’이란 말이 있다. ‘다른 사람 한 번할 때 나는 백 번한다.’는 뜻이다. 성실성에 대한 멋진 표현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 가지로 왜곡되어 성실이라는 말도 그 의미가 퇴색되어 있다. 마치 이런 단어는 구시대적 산물로 치부되고, 성실한 사람을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도 새로운 버전이 등장했다. 일만 하던 개미는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고생하며 병원비로 재산을 모두 잃게 되었고, 베짱이는 놀면서 연습한 노래가 큰 인기를 얻어서(요즈음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처럼)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한다. 창의성이 부각되면서 만들어진 이야기다. 그런데 요즈음 〈개미와 베짱이〉3탄이 나왔다. 허리를 다친 개미는 이웃에 있는 기뻐하는교회 저녁집회에 참석하여 허리를 치료받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부지런히 일해서 다시 부자가 되었고, 베짱이는 한탕으로 크게 번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다시 쪽박을 차게 되었다고 한다. 창의성을 발휘하여 크게 성공한 것도 중요하지만 성실한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다시 성실성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성실은 유행에 따라 처분이 가능한 도덕적인 덕목이 아니라 소중한 삶의 태도다. 성실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다윗은 본문에서 성실을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라고 한 것이다. “.......땅에 머무는 동안 그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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