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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5, ‘삶을 바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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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832회 작성일 12-10-0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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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5, ‘삶을 바꾼 만남’

눅10:25~37

2012. 10/7. 08:00 11:00

명심누골(銘心鏤骨)

 강진으로 귀양을 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주막집 방 한 칸(東泉旅舍)을 빌려 기거하며 아전(衙前)의 아이들 몇을 가르쳤다. 그중에 황상(黃裳)이란 아이도 있었다. 다산이 며칠 두고 보니 아이의 재능이 눈에 띄었다. 다산이 그 아이에게 공부에 매진하라고 했더니 그가 말했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鈍)이요. 둘째는 막힌 것(滯)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戛)입니다. 이런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그러자 다산이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데 민첩하면 그 폐단은 그 뜻을 깊이 음미할 줄 모르니 곧 잊어버리고, 둘째 글짓기가 남다르면 그 폐단은 저도 모르게 경박하고 들뜨게 되고,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곱씹지 않으니 깊이가 없다. 하지만 둔하여도 들이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들이파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막힌 것을 트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지?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 역시 부지런해야 한다. 어떻게 부지런할 수 있을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소년 황상은 다산으로부터 ‘부지런(勤)하고, 부지런(勤)하고, 부지런(勤)하라.’는 소위 ‘삼근계’(三勤戒)를 받아 평생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겼다’(銘心鏤骨)고 한다. 그는 시골 아전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살았지만 그의 학문적 깊이는 당대 최고의 문사(文師)들과 견주어 손색이 없었고, 관(棺)속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것은 다산을 만났기 때문이다. 인생의 변화는 만남을 통해 시작된다. 만남을 통해 서로를 발견하게 되고,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산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을 통해서 결정된다. 학생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실력이 생기고, 스승은 뛰어난 제자를 만나야 가르치는 보람을 누리게 된다. 신자는 좋은 교회와 좋은 목회자를 만나야 건강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목회자 또한 좋은 신자를 만나야 아름답고 보람이 있는 목회를 할 수가 있다.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과 내용, 질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어떤 만남이든 소중히 여기고, 잘 가꿔가야 하고, 좋은 만남을 위해 늘 기도해야 한다.

 

세 종류의 만남

본문은 유대인들의 빗나간 선민의식, 문자에만 얽매인 문자주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형식적인 신앙에 강한 도전을 주는 예수님의 비유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중요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한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본문을 통하여 만남의 중요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한 나그네가 경험한 만남 이야기다(내용설명생략). 그는 만남 때문에 심각한 인생의 위기에 직면했고, 또한 만남을 통하여 다시 회복되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 곧 나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세 종류의 만남이 나온다.

 

첫째는 강도와의 만남이다.

외로운 개구리가 운명상담서비스에 전화를 해서 자기 장래에 대해 물었다. 상담원은 개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머지않아 당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소녀를 만날 것이오.’ 개구리는 아름다운 소녀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와아! 정말입니까? 그러면 언제 어디서 만납니까? (순천만처럼)아름답고 멋진 곳에서 만나게 되나요?’ 상담원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생물시간에 실험실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개구리는 큰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죽었다. 생물시간 실험실에서의 만남은 해부를 당하는 죽음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는 개구리의 만남은 불행한 만남이다. 만나서는 안 되는 만남이다.

 

인생의 위기나 파탄은 ‘불행한’ 만남에서 시작된다. 본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예루살렘에서 유대광야를 가로질러 휴양의 도시 여리고로 향하는 이 나그네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고 들떠 있었겠는가? 그런데 강도를 만나는 순간 그의 꿈은 깨지고 그의 인생 또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30).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한순간의 불행한 만남이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 주변에 불행한 만남으로 가슴을 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강도와 같은 남편 때문에, 혹은 강도와 같은 아내 때문에 힘들어 하는 부부들, 강도와 같은 부모 때문에 고통하는 자녀들, 강도와 같은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부모들, 강도와 같은 이웃 때문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외에도 사고라는 강도, 자연재해라는 강도를 만나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사고들 대부분이 불행한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는 제사장과 레위인과의 만남이다.

이는 ‘만나나마나한’ 만남이다. 결과적으로 이 또한 불행한 만남이고, 잘못된 만남이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31,32). 여기서 “마침”이란 표현은 강도를 만난 이 사람에게 제사장과 레위인이 한 가닥 희망으로 다가왔다는 뜻이고, 나아가서 서로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는 의미다. 그런데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도움은커녕 그에게 커다란 실망만 안겨주고 말았다. 그래서 이런 만남 또한 불행한 만남, 잘못된 만남이라고 한 것이다.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은 결국 해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대부분의 만남이 이런 만남이고, 이런 만남에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삶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이런 만남은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의 만남이 아니라 그 사이에 경제적 가치를 매개로 한 만남이다. 이용가치가 사라지면 만남의 가치도 사라져 버린다. 너무 영리하게 자신의 손익만 앞세우는 만남이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만남이 신자들 간에도, 또한 신앙생활에도 대세라는 점이다.

 

셋째는 사마리아인과의 만남이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서 상해를 입은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상처에 응급조치를 하고, 치료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로 후송을 했다. 그리고 비용을 대고, 치료를 부탁했다. 여행이 급한 그는 돌아오는 길에 추가된 치료비를 꼭 갚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사실 그가 이 사람의 부모형제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책임을 질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거룩한 부담감을 갖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 책임이 없는데 책임감을 갖고, 의무가 없는데 의무감을 갖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참사랑, 곧 주님의 사랑이다. 이 사랑 때문에 나와 여러분이 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좋은 만남, 행복한 만남, 아름다운 만남, 복된 만남이다. 우리 지역의 작가 고(故) 정채봉 님은 좋지 않는 만남은 만지면 비린내가 나는 생선과 같고, 좋은 만남은 힘들 때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는 손수건과 같다고 했다. 이 뿐만 아니라 손수건은 무릎덮개로도 사용되고, (연인을 위한)깔개로도 사용된다. 좋은 만남의 특징을 참으로 쉽고 아름답게 잘 표현하고 있다.

 

본문의 나그네는 ‘불행한’ 만남으로 생명이 위협 당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만나나마나한’ 만남으로 위험 속에서도 외면을 당했지만 ‘좋은’ 만남을 통해 위기를 벗어나 회복되었다. 불행한 만남은 한 영혼을 죽이는 것이고, 좋은 만남은 한 영혼을 살리는 소중한 일이다. 좋지 않는 만남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보고도 외면하지만 좋은 만남은 자신과 관계가 없어도 관심을 갖고 기꺼이 다가간다. 좋은 만남은 넘어진 사람을 세워주고, 상처 입은 사람을 치료해 주고, 위기에 처한 사람을 그 위기에서 건져준다. 이런 만남은 이해관계를 떠나 관계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고, 인격과 인격이 만나고, 사랑과 사랑이 만날 때 세워주고, 회복시켜주고, 살게 하는 것이다.

 

지상 최대의 가장 좋은 만남

가장 좋은 만남, 가장 아름다운 만남의 모델은 예수님이시다.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자신이다. 세상에서 불행한 만남, 잘못된 만남으로 지쳐 쓰러진 사람들, 상처입은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을 친히 찾아가 사랑으로, 인격으로, 마음으로 만나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 세움을 입고, 치료를 받고, 회복이 되고, 다시 살아나고,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다(제자들을 비롯하여 삭개오, 수가성 여인, 사도 바울 등).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만나야 병든 인생이 치료를 받고, 지친 인생이 힘을 얻고, 넘어진 인생이 다시 일어서고, 죽은 인생이 다시 살아나고, 저주받은 인생이 복을 받고, 멸망 받을 인생이 구원받아 영생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만남은 지상 최대의 가장 좋은 만남, 가장 아름다운 만남, 가장 복된 만남이다.

 

신앙생활이란 이 만남을 더욱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다. 즉 경건에의 훈련을 쉬지 않는 것이다. 만남은 1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적 반복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건에의 훈련을 통하여 주님과의 만남이 심화되고 확장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좋은 만남으로 인도하여 좋은 사람들, 좋은 일들, 좋은 기회들을 만나도록 해준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는 것처럼 말이다(3요:2). 그리고 우리 자신을 좋은 만남의 도구가 되게 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누군가의 부족이 채워지고, 세워지고, 회복되고,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유익을 얻게 된다. 그래서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는 유익이 되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상 최대의 가장 행복하고 복된 만남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제 지상 최대의 가장 행복하고 복된 만남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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