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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1, ‘주님 안에 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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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1건 조회 17,363회 작성일 12-09-1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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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1, ‘주님 안에 거함’

요15:1~12

2012. 9/9. 08:00 11:00

소속이 최고의 자산이다.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생활을 시작하면서 겪었던 일화다. 조금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가치충돌, 혹은 가치혼돈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늘 들었던 말이 대소변은 반드시 저의 집에서, 그리고 저의 논밭이나 산에서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왜 그 귀한 거름을 남의 집이나 아무 곳에다 버리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 집에서 놀다가도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집에까지 달려와서 해결하곤 했고, 멀리 있는 저의 논이나 밭에까지 가서 해결했다. 그런데 이 습관이 중학교를 진학해서 도시에서 생활할 때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학교에서 참았다가 하숙하였던 큰집에 와서 해결을 했다. 한 번은 나의 이런 모습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큰어머니가 꾸중을 했다. 정화조 소제도 돈인데 왜 학교에서 해결하지 않고 집에까지 오느냐는 것이었다. 이 말은 어린 나에게 꽤 충격이었다. 시골에서는 소중한 것이니 밖에다 버리지 말라고 했던 것을 돈이 드는 귀찮은 것으로 치부당하면서 꾸중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가치충돌을 경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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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는 그의 책「인간적인 길」에서, ‘가난함이란 지금까지는 갖지 못한 것을 의미했으나 가까운 장래에는 소속되지 못한 것이 될 것이다. 미래에 첫째가는 자산은 네트워크에의 소속이 될 것이다.’고 했다. 소유가 아니라 소속이 최고의 자산이라는 것이다. 즉 ‘명함 없는 모임’을 얼마나 가지고 사느냐가 삶의 질을 좌우하고, 그 사람의 부(富)와 격(格)을 말해 주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디에’, ‘누구에게’ 소속되느냐이다. 바로 이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나 ‘가치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저의 사소한 일화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동일한 사실을 두고 내 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반응한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두 분의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고, 이 차이는 서로 다른 환경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큰어머니는 시내에서 장사를 하였다. 서로 ‘삶의 자리’(소속)가 다르다보니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고, 그래서 다르게 해석하고 다르게 반응한 것이다. 만약 나의 아버지도 시내에서 살고 있었다면 큰어머니처럼 말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간은 복의 통로 서른 한 번째, ‘주님 안에 거함’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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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주님은 포도나무, 나는 가지!

기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놈 위에는 어떤 놈이 있을까? 나는 놈 위에는 ‘붙어 다니는 놈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안 될 때 나 보다 잘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쉽게 할 수 있다. 날아다니는 사람의 몸에 붙어있으면 나도 쉽게 날 수가 있다. 아무리 빠른 마라토너도 시속 30㎞를 달릴 수 없다. 그러나 저는 시속 120~130㎞를 달릴 수 있고, 시속 7~800㎞로 하늘도 날 수도 있다.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 꽉 붙어있으면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더 힘껏 날 수 있다.

 

포도나무는 성지(聖地)에서 가장 흔한 나무 중 하나다. 그래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고 있고, 주로 선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 비유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은 성경 다른 곳과는 달리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고, 제자(신자)들은 그 가지라고 하셨다. 이는 주님과 신자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즉 신자는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어(5) 농부이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8), 주님께 기쁨이 된다(11)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포도나무는 열매를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관상용으로도, 목재로도 사용할 수 없고, 그저 땔감으로 밖에 쓸 곳이 없다. 그런대도 농부가 애지중지한 것은 오직 열매를 바라고 그런 것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는 것은 가지의 사명이다. 하지만 열매를 위해서는 먼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원리다. 즉 주님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거함’이 없이는 ‘위함’도 없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거함보다는 위함에 관심이 많고,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곧 주님 안에서 사는 것으로 착각을 한다. 그래서 실제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열매도 없고 주님과도 멀어지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가 있다. 본문은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거함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거함’이란 단어가 11회나 반복되고 있고, 유사한 표현까지 합치면 그보다 훨씬 많다. 여기서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표시로 ‘거함’이란 말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친밀한’ 연합이다.

나무에 있어서 가지는 나무 자신이다. 나무 없는 가지가 존재할 수 없듯 가지 없는 나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자신이 포도나무이고, 신자를 그 가지라고 하신 것은 신자가 곧 주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신자와의 친밀하고 강한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신 말씀이다. 나무에게 있어서 가지만큼이나 주님과 신자의 관계가 친밀하다는 뜻이다. 이런 말씀을 근거로 바울 역시 교회를 주님의 몸으로, 신자를 그 몸의 지체로 비유했다. 몸 없는 지체가 존재할 수 없고, 지체 없는 몸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주님과 신자, 신자와 신자 간의 관계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특별하고, 일치와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둘째는 ‘철저한’ 의존성이다.

가지는 나무에 철저히 의존되어 있다. 가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스스로 단 한 방울의 물도 공급할 수 없고, 단 한 송이의 꽃도 피울 수 없고, 단 하나의 열매도 맺을 수 있다. 오직 나무에 붙어있어야만 가능하고, 나무에서 떨어진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

 

가지는 나무에 절대의존하고, 나무는 가지에 대하여 전적인 책임을 진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서는 아무 힘도 능력도 존재가치도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도 우리는 완전히 무력하고, 무능하고, 무식하고, 무가치한 존재이다. 주님께 대한 절대의존, 이것이 생명력이 넘치는 풍성한 삶의 비결이고, 열매가 풍성한 삶의 비결이고, 사역에 있어서 모든 능력의 비결이다. 가지는 나무가 주는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가질 수도 없다. 우리도 주님께 받고 얻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가진 것이 없고, 가질 수도 없다. 그리고 가진 것 역시 주님께 받은 것인즉 자랑할 수도 없다. 우리의 생명은 물론 모든 것이 주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의 삶에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은혜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앞에서 ‘위함’보다 ‘거함’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는 ‘풍성한’ 교제(교통)이다.

연합과 일치에 역동적인 힘(생명)과 그 힘을 유지하는 영양을 공급해 주는 것이 ‘교제’다. 교제가 끊기면 비록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도 죽게 된다. 분명히 나무에 붙어있는데 죽은 것이다(2). 교제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교제를 통한 생명의 공급, 영양의 공급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신자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 주님께 붙어있는데, 신앙생활은 하고 있는데 열매가 없다. 소위 ‘불임’(不姙)신자다. 교제는 연합을 통한 풍성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께 기쁨이 되도록 해주는 내적인 힘이다. 그 방법과 내용이 본문에 소개되어 있다. 그것은 ‘기도’이다(7). 기도는 의식적으로 갖는 주님과의 관계이다. 이 기도가 주님과의 교제를 풍성하게 해준다. 다음은 ‘계명’이다(10). 계명(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이 주님과 풍성한 교제를 유지하는 길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숨’(呼吸)에 날숨(呼)과 들숨(吸)이 있는 것처럼, 교제에 있어서 들숨과 날숨은 말씀과 기도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씀과 기도를 강조하는 것이다(딤전4:5). 그리고 ‘사랑’이다(12). 사랑은 지켜야 할 계명의 내용이고 핵심이다. 주님은 이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다. 특히 본문에서 강조한 것은 ‘서로’ 사랑이다. 신자 상호간의 사랑이 막히면 주님과의 교제도 막히게 된다. 바로 이 세 가지는 교제의 방법이면서 동시 교제의 내용이다.

 

거함의 영성(spirituality of dwelling)

수도원을 입회할 때 갖는 서약들 중에 ‘정주서약’(定住誓約)이란 것이 있다. 여기서 정주라는 말은 ‘항상 같은 마음’, ‘참고 견디는 마음’이란 뜻이다. 이는 본문의 ‘거함’이란 말과 같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거룩한 자리, 곧 수도원에서 일생동안 거주하겠다는 서약이다. 오늘날 임직서약이나 결혼서약도 일종의 정주서약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수도원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주님 앞에서 한 번 정한 마음을 끝까지 바꾸지 않겠다는 믿음의 다짐이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처음 그 마음으로 끝까지 변치 않고 주님의 거룩한 인도하심에 나를 맡겨 평생을 살겠다는 신앙적인 결의이고, 인내의 선언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약을 하고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나오자 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 생긴 수도원이 있는데, 바로 봉쇄수도원이다. 봉쇄수도원은 인간의 약함을 핑계로 주님을 떠나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수도자들이 스스로 만든 제도적 장치다. 자원하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유폐시키고 차단시키면서 고집스럽게 정주생활을 해나간 것이다. 이렇게라도 거룩한 생명 가운데 평생을 머물겠다는 서약이 정주서약이고, 이것이 곧 ‘거함의 영성’이다.

 

평생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고 차단시켰던 봉쇄수도사들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결심과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친밀한’ 연합, ‘철저한’ 의존, ‘풍성한’ 교제를 누리는 거함의 영성이다. 이를 통하여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께 기쁨이 되는 복된 신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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