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32. ‘與主同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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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1건 조회 13,997회 작성일 12-09-16 16:04본문
복의 통로32. ‘與主同行’
창5:21-24
2012. 9/16. 08:00 11:00
이럴 때 혼자라는 것이 싫다.
인생여정에는 항상 따듯한 봄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혼자 견디기 힘든 추운 겨울도 있다. 그래서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추운 겨울을 함께 할 수 있는 동행이 있다면 훨씬 든든하고 따뜻하게 인생길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인터넷 독신자 사이트에 누군가가 ‘이럴 때 혼자라는 것이 싫다’며 올린 글이라는데 공감이 많이 갔다.
1. 코믹영화를 혼자 보러갈 때
2. 깊은 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3. 많이 아플 때
4. 자장면 먹고 싶어 주문을 했더니 1인분은 배달이 안된다고 할 때
‘뭘 이런 것을 가지고’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사람은 사소한 것에 낙심하고, 사소한 것 때문에 힘들어 하고, 사소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상하고, 사소한 것에서 무너지는 법이다. 그리고 삶의 행복 또한 어떤 거대한 일보다는 소소한 일상이 더 크게 작용한다. 이런 작은 행복이 쌓여 큰 행복을 부르고, 인생의 심각한 고비들을 즐겁게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약하지만 버팀목이 있는 나무는 강한 바람에도 쓰러지지 않지만 강해도 혼자인 나무는 쉽게 넘어진다. 그래서 즐겁게 웃으면서 영화를 보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아플 때 곁을 지켜주고, 어느 때든지 거절당하지 않고 무엇이든 시켜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이것이 동행의 기쁨이고 행복한 동행이라 생각한다. 사람과의 동행도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데 주님과의 동행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 시간은 복의 통로 서른 세 번째, ‘與主同行’(주님과 함께 다님)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에녹,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성경은 주님과 동행하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고, 성경의 인물들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서 가장 탁월하게 이 생활을 실천했던 사람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에녹’이다. 에녹은 아담의 7대 손(孫)으로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고(22), 구약의 인물 중에 엘리야와 함께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옮겨진 사람이다(24). 그래서 에녹은 우리 찬송가(430장 4절)에서처럼 모든 신자들이 닮고 싶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에녹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히11:5~6, 유:14). 비록 기록은 적지만 우리에게 신앙적인 감동과 삶의 모범이 되는 영적 거인이다. 특히 본문에는 동행의 의미와 방법, 그리고 동행의 복이 잘 나타나고 있다.
동행의 ‘의미’, 동행은 주님께 제물처럼 드려진 삶이다.
에녹이란 이름은 ‘봉헌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에녹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에녹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동행이 단순히 ‘함께 걷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 것을 뜻한다. 그리고 22절에서, “무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22)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일상을 벗어나 깊은 산이나 사막으로 들어가 별난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자녀들을 낳았으며”)에서 평생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뜻이다. 즉 삶이 예배이고, 기도이고, 찬양이고, 간증이고, 증거였다는 뜻이다. 사실 이것은 바울이 가장 꿈꾸던 신자의 생활로, 이런 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영적 예배’라고 했다(롬12:1).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주님께 제물처럼 온전히 드려진 삶을 의미한다. 주님께 온전히 드려진 삶이라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고,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다. 에녹이 이와 같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11:5)고 기록한 것이다.
자녀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자녀들 중에는 부모의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되고 아픔이 되는 자녀가 있고,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고 위로가 되는 자녀가 있다. 신자도 아픔이 되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위로가 되는 신자가 있고, 근심이 되고 걱정이 되는 신자가 있는가 하면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신자가 있다. 주님의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신자는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온전히 주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린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땔감을 요구하지 않고 제물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시간이나 물질이나 재능보다 우리 자신을 요구하신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하기를, 함께 걷기를 원하신다.
동행의 ‘조건’, 동행을 위해서는 주님과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흔히 동행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뜻’이다(암3:3). 뜻이 같아야 함께 할 수 있고, 함께 갈 수 있다. 신앙생활에 적용하면 믿음이다. 같은 믿음을 가져야 같은 길을 갈 수 있다. 둘째는 ‘방법’이다. 뜻도 같고 방향(목표)도 같은데 함께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것은 서로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뜻을 가지고 서울이라는 같은 방향을 가지만 어떤 사람은 승용차로, 혹은 고속버스로, KTX로, 비행기로 갈 수 있다. 그러니 방법이 같아야 같이 갈 수 있다. 그리고 셋째는 ‘거리’(속도)다. 걷다보면 혼자서 훌쩍 앞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항상 뒤처져 멀찍이 따라오는 사람이 있다. 둘 다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 속도를 맞추고 거리를 좁혀 함께 걸어야 한다. 에녹이란 이름에는 ‘봉헌하다’는 뜻 외에 ‘(거리, 간격)을 좁히다’는 뜻이 있다. 주님과의 거리(간격)를 좁히는 것, 이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거리(간격)를 좁히는 것이다. 그래야 주님과 교제도 가능하고, 동행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22절, “무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이란 말씀을 보면 에녹도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무드셀라를 낳은 후에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는 무드셀라의 탄생이 그의 삶에 무언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 이유를 찾게 되었는데, 그것을 무드셀라라는 이름에서 찾았다. 사실 성경에서 지명이나 인명은 단순히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양에서도 ‘명전기성’(名詮其性, 이름에 모든 것이 있다는 뜻)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름을 소중히 여겼다. 이름에는 중요한 신앙(학)적인 정보가 담겨 있다. 무드셀라도 마찬가지다. 무드셀라는 ‘그가 죽으면 무너지리라.’는 뜻이다. 이는 곧 심판에 대한 경고 메시지다. 그가 죽으면 무너진다는 말은 그가 죽으면 세상이 끝난다는 뜻이다. 실제로 무드셀라가 죽은 다음 해에 노아의 홍수가 시작되어 세상이 끝장났다. 에녹은 무드셀라의 탄생과 더불어 이러한 경고를 듣고 이 때부터 하나님과의 거리(간격)를 좁히는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거리를 좁혔을까? 그 근거를 유다서에서 찾을 수 있다. 유다서에 따르면 이 때 에녹은 ‘증거’하는 생활(:14)에 했다고 한다. 즉 무드셀라가 죽으면 세상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했다는 것이다. 사실 전도는 주님과 동행하는 확실한 보장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28:16~20)에서 제자들에게 선교명령(至上命令)을 하셨다. 그러면서 보장의 말씀을 주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0). 증거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과 주님이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주님과의 거리를 좁혀서 동행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동행의 ‘복’, 동행(同行)하면 동행(同幸)하게 된다.
죄수들의 어머니로 불린 미국의 캐서린 로즈여사가 있다. 캐서린은 평생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쏟아 부었다. 1937년 어느 날, 그녀는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 소식이 교도소에 알려지자 죄수들은 교도소장에게 캐서린 여사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 간청을 듣고 교도소장은 몹시 고민하였지만 평소 캐서린 여사의 헌신을 잘 알고, 또한 죄수들이 그녀를 무척 존경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600명 죄수 전원에게 외출을 허락했다. 600명의 죄수들은 한 줄로 캐서린 여사의 운구행렬을 뒤따랐는데, 그 길이가 무려 800미터에 이르렀고, 그들은 지나가면서 들꽃을 하나씩 따서 한 송이씩 들고 여사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날 저녁 600명의 죄수 모두가 교도소로 돌아왔다. 존경하는 캐서린에게 누를 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욕망을 위해서는 양심도 버린 죄수들이지만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죽어서도 산 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캐서린의 삶이 참으로 놀랍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대로 주님 안에 거함으로 주님과 친밀한 ‘연합’, 철저한 ‘의존’, 풍성한 ‘교제’를 누리고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이런 사람은 주변에 아름다운 향기를 드러내게 되고,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또한 주님과 ‘동행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주님 안에 거하니까 자연스럽게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께 기쁨이 되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하나님과 삼백 년을 동행했던 에녹 역시 엄청난 은혜와 복을 받았다. 창세기 5장은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족보인데, ‘낳고 낳았으며 죽었더라.’가 하나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이 곧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에녹에게 와서 이 구조가 깨진다(‘낳고 낳았으며 살았더라.’). 이는 에녹이 인간의 숙명인 죽음의 문제를 극복했다는 뜻이다(26). 이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누리게 되는 복이다. 누구든지 주님과 동행하면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고 생명의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 즉 치유와 회복, 나아가서 영생을 얻게 된다. 사람도 좋은 사람, 훌륭한 사람과 동행하면 여러 유익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생의 복은 주님께 있고, 주님과 동행함에 있다. 주님과 ‘同行’하면 ‘同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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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식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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