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34, ‘하나님의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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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235회 작성일 12-09-30 20:31본문
복의 통로34, ‘하나님의 옷’
왕하5:1~14
2012. 9/30. 08:00 11:00
교만 vs 겸손
교만은 모든 악의 뿌리이고, 우리가 극복하기 가장 힘든 악덕 중의 악덕이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은 늘 교만의 덧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앙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교만은 다음과 같은 장애를 유발한다.
첫째, 청각장애이다. 교만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늘어놓고, 들어도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그래서 남의 말을 잘 듣지 못하고, 듣되 잘못 듣게 된다.
둘째, 시각장애이다. 교만은 자기 확대이다. 끝없이 자기를 확대하여 자기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이 교만이다. 그리고 자기를 확대하다보니 자기 이외의 것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또한 보아도 자기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에 잘못 보게 없다.
셋째, 언어장애이다. 교만은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격려하는 말이나 칭찬의 말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고 거친 말투, 감정적인 비방으로 언어의 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는 ‘겸손’이다. 겸손은 자기 말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자신을 낮추고 축소시켜 주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고, 나아가 겉은 물론 속까지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된다. 또한 부드럽고 상냥한 말, 친절하고 호의적인 말, 은혜로운 축복의 말로 주변을 격려하고 키워주게 된다. 겸손은 그 사람의 내적 깊이와 됨됨이를 가늠하는 척도다. 무르익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과시나 허세가 심하고, 그래서 드러내고 떠벌이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안으로 알차게 익은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다. 7세기 어느 수도사는 겸손을 ‘하나님의 옷’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겸손은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생겨난다.’고 했다.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면 겸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서 교만이 생기고, 교만에서 남에 대한 단죄가 생긴다. 아무튼 신자는 늘 겸손해야 한다. 겸손해야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복을 주신다.
성공 뒤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
인생에 큰 성취와 성공을 거뒀지만 그것을 삼킬 만큼 심각한 아픔을 가진 사람이 있다. 나아만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현재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아람나라의 군대 장관이었다. 왕의 두터운 신임과 막강한 권력,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는 나병환자였다. 본문은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그는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더라.”(1). 이는 다 가진 것 같은데 뭔가 결정적인 결핍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진데, 이것이 인생의 비극이다. 항상 ‘~이나’(그러나)가 문제다. 나아만은 큰 용사이나(그러나) 나병환자더라! 성경에 비슷한 사람들이 또 나온다. 바디메오는 아버지가 지역 유지이나(그러나) 그는 소경거지였고(눅18:35~43), 삭개오는 부자이나(그러나) 멸시를 받는 세리였다(눅19:1~10). 이전이 아무리 좋아도 ‘~이나’(그러나) 이후 때문에 망가지고 비참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고, 기도하게 된다. 나병이 들지 않았다면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을 이유가 없고,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지 않았다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갈 일이 없었을 것이다. 결핍이 있었기에 선지자를 찾고, 예수님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결핍이 고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를 주님께 인도는 소중한 ‘손’인 것이다. 여기서 그 유명한 바울의 ‘가시’신학이 나온 것이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7,9).
겸손을 통하여 복을 받다.
조명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짙게 드러나는 것처럼 장점이 많고 클수록 약점 또한 크고 강하게 드러난다. 나병이란 자체도 당시로선 불치병으로 심각한 것이었지만 나아만이 가진 그 좋은 장점들이 이를 더욱 심각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왕의 신임이 두텁고 백성들의 지지가 커갈수록 병에 대한 좌절과 절망도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치유의 역사는 아주 의외의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 땅에서 붙잡아온 한 소녀의 말에서 시작이 되었다(3).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무시할 수 있는 포로소녀의 말에 그가 귀를 기울였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가 ①그만큼 자신의 병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치유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었다는 것과, 또한 ②병으로 그의 마음이 겸손하게 낮아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간절함과 겸손이 절망적인 병을 극복하게 만든 것이다.
우선 치유를 받은 나아만의 모습에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겸손하게 듣는 귀’다. 나아만은 주변 사람들의 말을 겸손하게 잘 듣는 복된 귀를 가지고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포로소녀의 말을 듣고 왕의 칙서를 들고 선지자 엘리야를 찾아 이스라엘 왕에게 갔고(4~7, 이 일로 이스라엘 왕궁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스라엘 왕의 무지 때문이다. 외국에 포로로 끌려간 어린 소녀도 엘리사의 존재와 능력을 알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왕은 이를 모르고 있었다), 엘리사의 무례와 성의없는 처방(10)에 화를 내며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종들의 만류와 권면을 들은 것이다(13). 잘 듣는 것, 겸손하게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 구약은 지혜를 ‘듣는 마음’(왕상3:9)이라고 했다. 겸손하게 잘 듣는데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듣는 것을 ‘믿음의 출발’(롬10:17)이라고 했다. 주님은 들음의 중요성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셨다. 나아만처럼 겸손하게 듣는 귀가 우리에게 복을 부른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의 모습에서 본문이 강조하는 또 다른 것은 ‘겸손한 순종’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실망을 하거나 화를 내게 된다. 나아만은 선지자 엘리사가 자신을 맞아 일정한 치료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병을 고쳐줄 것으로 기대했다(11). 그런데 집까지 방문한 그를 엘리사가 나와 보지도 않고, 그것도 사환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만 했다(10). 이것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당장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엘리사의 태도에 이렇게 반응을 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이 치료를 받으러왔지 대접을 받으러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치료는 환자가 기대하는 방법대로 행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나아만은 엘리사로부터 환대를 기대했고,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치료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 기대에 어긋나자 이렇게 화를 낸 것이다. 다행히 수행하고 있던 종들이 그가 엘리사를 찾아 여기까지 온 이유를 상기시켜 줌으로 진정할 수 있었다(13). 그러자 마치 말 잘 듣는 온순한 아이처럼 그는 엘리사의 말대로 순종하였다. 누구의 말이든 겸손하게 듣고, 또한 들은 대로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 이것이 나아만의 장점이고, 자신의 상처로 별이 되게 한 비결이다.
하나님의 치료는 인간적인 행위에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종의 입으로 선포된 말씀을 순종하는 데 있다. 그래서 엘리사가 나와서 그에게 치료행위를 하지 않은 것이고, 그저 요단강에 일곱 번 씻으라고 한 것이다(여기서 ‘일곱’은 요단강의 물이나 씻는 행위가 치유와 관계가 없음을 뜻한다. 만약 물이나 씻는 행위에 능력이 있다면 굳이 일곱 번을 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번으로 치유가 되거나 나을 때까지 계속 씻으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곱 번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순종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나아만의 치료는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으로 향하는 순간 시작되었고, 그가 일곱 번째 씻고 물에서 나올 때 치료가 완성된 것이다. 여기서 겸손한 순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가 있다. 겸손하게 순종해야 변할 수 있고, 달라질 수 있고, 겸손하게 순종해야 하나님이 고치신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만져주심으로 기대해야 하고, 주님의 방법대로 하시도록 나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이다.
신자의 모드(mode)는 겸손이다.
어느 군부대에 주일마다 예배당 입구에 서서 장병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며 주보를 나눠주는 장군이 있었다. 계급으로 말하는 군대사회에서 장군이 솔선하여 겸손한 모습으로 섬기니 처음에는 병사들이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장군에게 인사 한번 받아보자는 심정으로 예배에 참석했다가 장군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결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부대가 복음화가 되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겸손한 한 사람을 통해서 이런 큰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겸손하면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고, 귀하게 쓰시고, 또한 그를 통하여 복을 주신다. 자신은 물론이고 그가 속한 공동체까지 복을 주신다. 겸손은 신자의 모드다. 신자는 겸손이라는 주님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막에는 물이 없지만 수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것은 이슬 때문이다. 심한 일교차로 인해 생긴 이슬이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 된 것이다. 그런데 동물이나 곤충들이 이슬을 먹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자세가 있다. 낮은 자세 곧, ‘겸손’이다. 뱀은 몸을 돌려 최대한 굽힌 후 자신의 몸에 내려앉은 이슬을 핥아먹고, 개구리는 고개를 숙여 떨어지는 이슬을 두 손으로 받아 마신다. 손이 없는 곤충들은 개구리와 같은 방법으로 최대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에 내린 이슬을 입으로 흐르게 하여 마신다. 겸손은 사막의 생물들에게 중요한 생존법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사막과 같다.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건강한 신자로서의 생존법 또한 겸손이다. 겸손하게 듣는 귀, 겸손한 순종이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치유하고 복이 되게 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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