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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써 말하는 사람, ‘아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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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721회 작성일 12-11-2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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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써 말하는 사람, ‘아벨’

창4:1~4, 히11:4

2012. 11/25. 08:00, 11:00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성경을 해석할 때 1차적 독자(성경이 기록될 당시 대상)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누구이고, 어떤 상황에 있는 사람들인가를 알면 내용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저자의 의도나 목적을 더 잘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다(천지의 시작, 인류, 죄, 국가와 민족, 언어, 언약, 구원 등). 그리고 그 대상은 430년 동안의 종살이를 끝내고 얼마 전에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모세가 단순히 위에서 열거한 것들의 기원을 밝히자고 창세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이시고, 자신들은 그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 특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요셉을 조상으로 한 영광스러운 선민(選民)이라는 것을 밝히는데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예배공동체로 선택된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의 ‘신앙고백서’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보면 모세가 왜 이 끔찍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창세기의 첫 머리에 기록해 놓았는지 그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예배공동체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느냐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잘못된 예배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경고이다. 7절에 “선을 행하면”이라는 말씀이 있다. 이는 도덕적 의미보다는 종교적인 의미이다. ‘선을 행하다’를 히브리어로 ‘테티브’(תטב/thetib)라고 하는데, 이는 ‘야티브’(יטב/yatib)란 단어에서 유래했다. ‘야티브’는 ‘제물을 옳게 드리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테티브’와 ‘야티브’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제물을 옳게 드리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니 ‘선을 행하다’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예배)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헝클어졌던 삶의 질서가 제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실패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고, 관계단절은 삶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아무런 예배나 받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반드시 정한 장소와 정한 시간, 정한 방법에 따라 드려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상세하게 소개한 것이 레위기다. 즉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모세는 앞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이 레위기에 기록된 대로 드려야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의 삶이라는 것이다(지난 11/11일 설교 참조).

 

제물로 증거된 아벨의 믿음

 ④제물에는 드리는 사람의 신앙과 고백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11:4)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는 말씀은 그 예물에 담긴 아벨의 믿음을 하나님이 친히 인정하셨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 드린 아벨의 제물이 그의 믿음을 증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학자들은 헌금을 ‘돈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라고 한다. 그리고 헌금행위를 ‘생명을 바꾸는 사건’(exchanging life)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아벨이 드린 제물은 아벨의 믿음을 증거하고, 가인이 드린 제물은 가인의 믿음을 증거한다. 그런데 아벨이 드린 제물은 그의 믿음을 증거하였으나 가인이 드린 제물은 그의 믿음을 증거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것이다. 그러면 아벨이 드린 제물이 증거하는 그의 믿음 어떤 것이었는가? 4절 말씀에 이것이 잘 나타나고 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4).

 

1. ‘첫’ 것을 드리는 믿음이다.

여기서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은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드렸다(3)는 것과 비교가 되는 표현이다. 가인은 단순히 땅의 소산으로 드렸는데, 아벨은 여러 양 중에서 단순히 한 마리가 아니라 첫 새끼로 드렸다. 이는 아벨과 가인의 헌신의 차이. 나아가서 믿음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첫 것’은 우선순위를 뜻한다. 그러므로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그에게서 우선순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첫 번째인 것을 고백한 것이다. 가인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마음이다. 이것이 후일에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3:9)는 명령으로 기록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먼저(첫째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 대한 우선순위를 요청하신 것이다.

 

믿음이란 곧 우선순위 문제다. 내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좋은 믿음, 훌륭한 믿음이란 하나님이 내 삶에서 항상 일등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나님 중심의 삶이다. 이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삶이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일등으로 모실 수가 있고, 모든 일에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제물을 통해 드러난 아벨의 믿음이고, 아벨은 이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내 삶에서 주님이 일등이 되고 있는가? 주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고 있는가? 항상 확인해야할 문제다.

 

2. ‘좋은 것’을 드리는 믿음이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함께 그 ‘기름’을 드렸다고 본문은 말씀하신다. 여기서 기름은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의 모든 제사에서 제물의 기름은 반드시 태워서 하나님께 드렸다. 특히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제사를 집례한 제사장이 함께 먹을 수 있는 화목제사의 경우도 고기는 나눠 먹을 수 있지만 기름은 태워서 하나님께 드렸다. 기름은 하나님의 몫이었던 것이다. 이는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의미에서다. 물론 지금처럼 영양과잉 섭취시대에는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지만 지구촌의 가난한 지역에서는 아직도 지방섭취를 위해 기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사실 저도 어렸을 때 집에서 고기를 먹게 되면 기름이 제 차례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했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기름은 좋은 것의 상징이고, 아벨은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아벨이 제물을 드림에 있어서 가인과 또 다른 점이다.

 

‘첫 것’이 우선순위 문제라면 ‘기름’은 사랑의 문제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좋은 것’, ‘귀한 것’을 주고 싶어 한다. 교육상 그렇지 않는 부모도 있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자식을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철없는 자식들은 우리 부모는 생선의 머리와 꼬리만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우리 엄마는 싸구려 화장품만 좋아하고, 못생긴 과일만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은 자식에게 주고 당신은 좋지 않는 것만 먹고, 입고, 가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는 시가 바로 이런 자식의 모습을 깨우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을 주고 싶고 귀한 것을 주고 싶은 마음, 이것이 사랑이다.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일등이었다는 뜻이고, 그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 이것이 제물을 통해 드러난 아벨의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가인의 제물에는 이것이 빠졌던 것이다. 그래서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사랑을 보시기 위해서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배를 비롯한 모든 헌신에서 이것이 드러나야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의 이름

가인과 아벨의 이름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 올바른 예배자의 태도를 보여준다. 가인이란 이름은 ‘얻다’는 뜻이다. 많은 신자들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예배의 자리로 나온다. 흔히 기복적인 신앙이란 바로 이런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인은 이런 기복적인 신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아벨의 이름은 ‘허무하다’, ‘텅 빈’, ‘티끌’ 등의 뜻이다. 예배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내가 티끌 같은 존재, 텅 빈 존재구나. 내가 허무덩어리구나. 그래서 내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구나.’ 이런 것들을 예배 때마다 확인하는 것이 참된 예배의 출발이다. 아벨은 이와 같은 예배자의 자세, 신앙인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사람이 예배에 성공할 수가 있다.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을 믿음의 열조들 중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가 비록 허무하게 죽었으나 오히려 믿음으로써 말을 한다고 기록하였다. 아벨은 가인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었다. 그렇지만 그 아벨은 지금도 믿음으로써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아벨의 제사는 단순히 형식을 갖춘 제의(祭儀)가 아니라 그의 삶, 존재, 행동양식 전체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창(窓)이다. 성경은 이 창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존재, 행동양식을 돌아보고,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 창을 통하여 우리의 삶과 존재, 행동양식을 돌아보고, 나아가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 그래서 우리도 믿음으로써 말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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