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사람들의 조상,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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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937회 작성일 12-12-02 13:01본문
경건한 사람들의 조상, ‘셋’
창4:25-26
2012. 12/2. 08:00, 11:00
가인(Cain)의 후예(後裔)
아담이후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들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아담의 장남 ‘가인’의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아담의 세 번째 아들 ‘셋’(Seth)의 후손이다. 이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가인은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듯(창4:13,14) 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떠나 에덴의 동쪽 놋 땅으로 간다(16). 하나님이 가인을 추방하신 것이 아니라 가인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추방시켜 버린 것이다. 여기서 에덴의 동쪽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곳, 스스로 하나님을 거절한 곳을 뜻한다. 하나님의 눈과 돌보심을 배제하고 인간이 홀로서기를 하는 곳이 에덴의 동쪽이다. 그리고 이 에덴의 동쪽 땅 ‘놋’(Nod)은 ‘동요하다’, ‘흔들리다’, ‘방황하다’는 뜻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안달’, ‘초조’, 참지 못하는 ‘경박성’, 정신의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불안’이다. 바로 이 놋은 가인의 존재상태, 즉 스스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난 그의 삶을 반영한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성(城)을 쌓는 것이었다(17). 흔들리는 자신의 존재를 든든하게 세우기 위한 자구책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들어주셔야 인생은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설 수가 있다. 아무튼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이 쌓은 성을 더 의지하는 가인과 그의 후손이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가인의 후손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라멕의 노래’(23,24)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 시(詩)는 ‘칼의 노래’라고도 말하는데, 이것은 두발가인이 만든 날카로운 칼을 들고, 유발이 제작한 악기로 노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라맥은 하나님이 세우신 일부일처(一夫一妻) 결혼제도를 파괴한 최초의 사람으로 그의 노래는 대략 이런 뜻이다. ‘누군가 내게 상처를 입혀서 나는 그를 죽여 버렸다. 하지만 내가 소유한 이 무기는 하나님이 가인에게 주신 표보다 더 확실하게 나를 지켜줄 것이다.’ 살인을 예찬하고, 하나님의 보호보다 자신의 칼(힘, 무력)을 더 의지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가인의 후손들이 보여준 공통점이다. 또한 이것은 자기의 힘과 능력과 지혜를 과신하여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떠벌리는 교만한 현대인의 전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때 가인의 후손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악인과 그 후손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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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Seth)의 후예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망가지고 부서지고 상처받은 곳을 사람을 통해 치료하고 회복하고 세우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후손에 의해 망가지고 부서지고 상처받은 세상을 치료하고 회복하고 세우기 위해 사용하신 사람들이 셋과 그의 후손이다. 셋은 형에 의하여 허무하게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이다(25). 그와 그의 후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경건한 길을 걷게 된다. 자기를 위해 성(城)을 쌓은 가인과는 달리, 셋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법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가인의 후손은 인간적인 능력을 확장시키는 일에 집중하였으나 셋의 후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장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이와 같은 차이는 이들의 5대손에 이르러 분명한 대조를 드러낸다. 가인의 후손 라멕은 부도덕과 살인을 예찬하고, 오만하게 하나님까지 대항한 인물이고, 셋의 후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간 사람이다. 한마디로 가인은 경건치 못한 사람들의 조상이 되고 셋은 경건한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셋의 후손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다(창6:2). 특히 누가복음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족보에 셋을 두 번째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다(3:38). 이렇게 셋이 경건한 사람들의 조상이 된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셋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세상이 어떤 곳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아들 ‘에노스’라는 이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에노스’(אנוש)는 히브리어의 ‘이쉬’(איש)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이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나쉬’(אנש)에서 왔다. 아나쉬는 ‘깨지기 쉬움’, ‘연약함’, ‘썩음’, ‘고통’, ‘슬픔’, ‘상처’, ‘질병’, ‘재난’ 등을 뜻한다. 여기서 유래한 ‘에노스’는 ‘연약하여 깨지기 쉽다.’, ‘고칠 수 없다.’, ‘부패하다.’는 뜻이다. 즉 인간의 부패함과 연약성, 나아가서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이름이다.
성경에 나온 지명이나 사람의 이름은 대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에노스란 이름도 마찬가지다. 학자들 간에는 이 에노스의 이름을 놓고 고유명사(사람의 이름)로 봐야한다는 사람과 일반명사(그 시대와 사람들의 특징을 지칭하는 이름)로 봐야한다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의 이름을 ‘고칠 수 없다.’, ‘부패하다.’란 뜻으로 지어주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특정한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시대적인 특징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함정이 있다. 이를 근거로 성경의 인물을 실재적이고 역사적인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신화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위 두 주장을 포함하는 고유명사이면서 일반명사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는 에노스라는 이름에서 셋이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살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자신도 사람들도 세상도 모두가 ‘에노스’라는 것이다. 부패했고, 썩었고, 그래서 무엇으로도 고칠 수가 없는 절망적인 존재, 절망적인 시대라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인식과 태도는 너무 중요하다. 지난 주일에 말했듯이 참된 신앙, 참된 예배는 철저한 자기부정, 자기절망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는 신앙의 길,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셋이 경건한 사람들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고,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장시키는데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신자는 먼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 또한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한다. 즉 자신과 세상이 썩고 부패하고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에노스’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신뢰, 세상에 대한 소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둘째는, 구원을 하나님에게서 찾았다.
에노스는 신자들이 대게 놓치고 지나가는 인물이다. 그래서 대부분이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본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는 말씀은 이때부터 비로소 예배가 공식적, 정규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전에도 예배가 있었다(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그 예다). 그러나 공식적 정규적으로 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한 것은 에노스 때부터다. 왜 이때부터 예배가 공식화되고 정규화 되었을까? 앞에서 말한 대로 그의 이름에 그 비밀이 있다. 사람에게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절망, 세상이 썩고 부패하고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그 절망이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이 임하시는 그릇이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런 의미에서 셋이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은 것은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겠다.’는 자기고백이고, 자손들을 위한 당부이다. 인간도 세상도 썩고 부패하고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절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절감한 사람들, 특히 셋의 후손들이 이때부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거룩한 반응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인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그는 하나님께 악한 사람들, 악한 세상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소연했다(14). 이는 가인 역시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악하고 부패하고 절망적인 곳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보장하시겠다는 표를 주셨다(15). 그렇지만 가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놋 땅으로 가서 자기를 위하여 성을 쌓았다(16).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 길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든든한 성을 쌓고 강력한 무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셋과 가인,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 또한 이것이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다. 신앙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느끼고, 세상에 대하여 절망을 느낄 때 주님을 찾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래서 주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게 된다. 주님을 일등으로 삼는 주님 중심의 삶을 살게 된다.
살다보면 때때로 깊은 수렁에 빠지기도 하고, 사건사고에 휘말리기도 하고, 실패의 늪에서 허우적대기도 하고, 질병의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래서 깊은 좌절과 절망 속에서 탄식할 때가 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를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닫는 기회, 붙잡고 있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신뢰의 줄을 끊는 기회, 나아가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연약함이, 그 한계가, 그 실패가, 그 절망이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이것이 경건한 사람들의 조상 셋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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