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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롭게,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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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330회 작성일 23-01-15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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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롭게, ‘

왕하6:14~17

2023. 1/15. 11:00

감각적인 시력 

최근(지난해 1229) 축구황제 펠레가 죽었다. 그는 열다섯 살에 프로축구팀에 발탁되어 축구와 함께 한평생을 살았다. 양말로 둥글게 말아서 만든 공을 맨발로 차야했던 가난한 시절을 보낸 그는, 이런 어린 시절을 겪고 축구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치료할 수 없는 근시였다는 것이다. 눈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그 나쁜 눈을 가지고 어떻게 축구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이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근시 때문에 지장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내게는 말초적 감각 즉, 감각적 시력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각적 시력을 흔히 집중력, 혹은 정신적인 눈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인 눈이 열리니까 자신의 한계(근시)를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끔 드라마나 영화을 보면 눈을 가리고 칼싸움을 하고 활을 쏘는 장면이 나온다. 골프에서 홀인원을 하거나 활을 백발백중 과녁에 맞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홀과 과녁이 크게 보였다고 한다. 집중하니까 감감적인 눈이 열리게 된 것이다. 농구선수, 야구선수, 권투선수도 비슷한 말을 한다.

 

본다는 것(시력)은 참으로 중요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눈을 아인’(עין)이라고 했는데, 아인이라는 말은 눈외에 또 다른 뜻이 있다. 그것은 ’, ‘원천이라는 뜻이다. 이는 아주 중요하다. 본다는 것이 우리 생각과 모든 경험, 혹은 지혜의 샘이고 지혜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그리고 무엇을 보느냐?’ ‘어디를 보느냐하는 것이 우리 운명을 결정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6:22-23). 눈의 소중함을 말씀해 주신 것이다. , 눈이 밝아야 한다고. 눈이 어두우면 생활전부가 어둡게 되기 때문이다. 밝히 보고, 밝게 깨닫고, 밝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하며 많은 말씀을 들었고, 많은 기적을 보았고, 많은 능력을 함께 했지만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을 받고 팔아넘겼다. 이유는 간단한다. 예수님에 대한 눈이 어두워서, 돈에 눈이 멀어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 눈이 멀면 생명이신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멸망을 향해 가면서도, 죽을 짓을 하면서도 그것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우리의 눈이 새롭게 열렸으면 좋겠다. 그래서 망할 짓 죽을 짓 복을 쫒아내는 짓을 멈추고, 형통하고 살리고 복을 부르는 짓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영적인 눈

본문은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의 사역 중에 하나다.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전쟁이 빈번했다. 특히 아람이 이스라엘을 자주 침범했는데, 그들의 전략이 사전에 노출이 되어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8~10). 그러자 아람 왕은 자기 나라에 이스라엘과 은밀히 내통하는 스파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당장 그 스파이를 잡아내라고 했다(11). 이때 한 신복이 말했다. 그 이유는 스파이 때문이 아니라 선지자 엘리사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엘리사는 왕이 침상에서 하는 말까지 다 듣고 있다고 했다(11,12). , 왕의 은밀한 계획까지도 다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제거하기 위해 엘리사가 거하고 있는 도단으로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냈다(13,14). 본문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다.

 

아침에 엘리사의 사환이 일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엘리사가 거주하고 있는 성읍을 아람 군사가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이에 놀란 사환이 이 사실을 엘리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렇지만 엘리사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그들과 함께 하는 자보다 많으니라.’(16). 그리고 기도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16). 여러분, 여기서 엘리사와 엘리사를 돕는 사환의 차이가 무엇인가? 둘 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고, 같은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사환은 놀라며 당황했으나 엘리사는 전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그저 평온했다. 이런 차이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보는 것의 차이. 사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람의 말과 병거와 군사만 보았고, 엘리사는 아람의 말과 병거와 군사는 물론 그 배후에서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보낸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 어디를 보고,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현상만 보면 사환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상을 넘어 하나님의 군대를 보면 엘리사처럼 평온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현상을 넘어 그 배후까지 보려면 눈이 열려야한다. 영적으로 눈이 열려야 한다. 엘리사가 사환을 위해 기도했을 때 그의 눈이 열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문제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우리 편에서, 우리를 도우시려고 항상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새해에는 새롭게 우리의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현상 넘어 있는 영적인 세계를 더 많이 더 자주 보고,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영적 가치에 대한 눈

더불어 영적 가치에 더욱 우리의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사실 눈의 가치는 보는 것이다무엇을 보는가에 따라서 눈의 가치가 달라진다보는 것이 지식이 되고보는 것이 인격이 되고보는 것이 삶에 중요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 눈은 봄으로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어떤 사람에겐 삶의 불평거리삶의 핸디캡이 어떤 사람에겐 은총의 도구가 되고,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있다이에 대한 가치의 눈이 열리면 이렇게 된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이 사실을 감동적으로 고백한 사람이 성경에 나온다사도 바울이다그에게는 심각한 핸디캡이 있었다그는 이를 육체의 가시곧 사단의 사자’(고후12:7)라고 했다물론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고 있진 않지만 그의 사역에 심각한 장애로 작용한 질병으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그는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했다(:8). 여기서 3이란 단순히 숫자 3이 아니라 완전을 뜻하는 상징의 수다육체의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뜻이다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이랬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9). 가시가 은혜라는 것이다. 가시가 은혜라면서 그의 간절한 기도에도 고쳐주시지 않은 것이다그리고 그는 이 육체의 가시를 통해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게 되었다그것은 가시가 핸디캡이 아니라 교만을 막는 안전장치고또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육체의 가시를 은총의 도구로축복의 통로로 알아보는 눈이 그에게 활짝 열린 것이다그래서 그는 응답해주시지 않음에 대해 도리어 크게 기뻐하였다. 이런 기쁨은 깨달은 자의 기쁨, 혹은 영적 가치에 눈이 열린 사람의 기쁨이라고 한다.

 

물론 사람마다 가치의 기준은 다르지만 사람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그래서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그의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돈이나 시간이나 열정의 사용처를 보면 그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가 있다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물질도 시간도 열정과 재능도 투자하기 때문이다주님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어떤 불이익,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고 섬긴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예배를 통한 주님과의 교제를 중요하게 여긴 사람은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예배를 사수한다주님의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모든 일에 우선순위가 주님의 나라다. 마찬가지로 이런 일에도 눈이 열려야 한다. , 이와 같은 영적인 가치들에 눈이 열려야 한다. 그래야 주님을 소중히 여기고, 주님의 나라와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말씀을 밤낮으로 읊조리고, 기도에 집중하게 된다. 영혼구원에 헌신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경건한 사람들의 중요한 기도제목이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19:19). 말씀에 기록된 영적 가치에 대하여 눈이 열리게 해달라는 기도다. 새해에는 이와 같은 영적 가치들에 우리의 눈이 새롭게 열리기를 바란다.

 

천국의 가치에 대한 눈이 열리게 하소서!

예배의 가치에 대한 눈이 열리게 하소서!

기도의 가치에 대한 눈이 열리게 하소서!

섬김의 가치에 대한 눈이 열리게 하소서!

말씀의 가치에 대한 눈이 열리게 하소서!

영혼의 가치에 대한 눈이 열리게 하소서!

 

잘 믿는다는 것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다. 무척 감동이 되어 소개한다. 어느 집사님이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랜 후에 은혜를 받았는데, 은혜를 받고나니 눈이 싹 바뀌었다. 눈이 바뀌면서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이 남편이 그렇게 예쁘게 보이기 시작하는데 정신을 못 차리게 예뻤다고 한다. 눈을 봐도 예쁘고, 코를 봐도 예쁘고, 먹는 것도 예쁘고, 말하는 것도 예쁘고, 앉아있는 것도 예쁘고, 걷는 것도 예쁘고. 너무너무 예뻐서 잠자리에 들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 불평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 이렇게 예쁜 얼굴 좀 보면서 자게 만들지 왜 눈을 감고 자게 만들었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그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우리교회 1등 성도요!

 

여러분,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주님에 대한, 교회에 대한, 다시 말하면 영적 가치에 대한 태도의 변화, 사람에 대한, 그리고 주변 세상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뜻한다. 이런 태도의 변화는 눈이 바뀌고, 눈이 열려야 일어난다. 그러므로 잘 믿는다는 것은 눈이 바뀌는 것이고,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남편의 얼굴이 견딜 수 없이 예쁘게 보이면 잘 믿는 것이다. 아내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이면 잘 믿는 것이다. 자녀를 보나 세상을 보나 아름답게 보이면 잘 믿는 것이다. 믿는 지체를 만날 때 주님을 뵙는 것처럼 좋으면 잘 믿는 것이다. 교회 가는 것이 소풍처럼 신나고, 예배드리는 것이 콘서트나 운동경기처럼 즐겁고 행복하면 잘 믿는 것이다. 내 신앙의 수준이 높은 것이다. 상대방이나 주변은 그대로인데,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그 사람이나 환경에 대해 내 눈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천사와 같고 세상이 천국처럼 보인다면 내 눈이 영적으로 새롭게 열렸다는 뜻이다. 주님 안에서 눈이 바뀌고 눈이 열리면 사람도 산천도 초목도 모두가 아름답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새해에는 우리의 영적인 눈, 영적인 가치에 대한 눈이 새롭게 열리기를 기도하자! 그래서 가정과 교회, 일상에서 천사들과 함께 천국을 누리는 복된 한해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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