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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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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8,472회 작성일 22-11-2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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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소망

146:1~5

2022. 11/27. 11:00

에포(EPOH)와 호프(HOPE)의 차이

잭 캔필드(J. Canfield)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는 책에 나온 이야기다. 암전문의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둘은 친구인데, 전이성암환자에게 똑같은 약을, 똑같은 양으로, 똑같은 스케줄에 따라, 똑같은 용도로 처방을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환자의 생존율이 22%밖에 안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74%나 되었다. 약을 나눠주는 사람만 다를 뿐인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일까? 그들이 처방해서 환자에게 나눠준 약은 에토포사이드(Etoposide), 플라티눔(Platinum), 온코빈(Oncovin), 하이드록쉬리아(Hydoxyurea)이다. 치료효과가 낮은 의사는 약을 환자에게 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어제도 먹은 에포(EPOH)입니다(네 가지 약 이름의 첫 자를 따면 ’EPOH‘가 됨). 잘 드십시오.’ 반면에 치료효과가 높은 의사는 환자에게 약을 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호프(HOPE)입니다(EPOH를 뒤집으면 ’HOPE‘가 됨). 잘 드시면 당신에게도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은 처방에 따라 그냥 약만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희망을 말하면서 약을 주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이토록 큰 차이로 나타났다. 한 사람은 10명 중에 7명이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10명 중에 7명이 살았다. 절망적인 사람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소망의 말 한 마디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다.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공기가 없어도 1분을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없으면 1초를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은 소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 그렇다소망은 영혼의 산소와 같다

 

 

인간은 소망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소망이 없다면 살았으나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M.T.Cicero)삶이 있는 한 소망도 있다’(While there's life, there's hope)고 했다. 삶에 대한 긍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나는 소망이 있는 한 삶도 있다(While there's hope, there's life)고 바꾸어 말하고 싶다. 소망이 있어야 삶다운 삶, 참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테(A.Dante)는 그의 신곡에 나온 지옥문 위에 여기로 들어오는 자는 모두 희망을 버릴지니라.’고 적어놓았다. 소망이 없는 곳, 그곳이 지옥이라는 뜻이다. 소망이 없는 삶은 살아도 사는 삶이 아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어떤 상황에 절망한 이유는 그 상황 자체보다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롤로 메이(Rollo May)라는 심리학자는사랑과 의지라는 그의 책에서 사람이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데에는 세 단계가 있는데, 그 첫째가 소망이라고 했다. 소망이 있어야 자기 삶의 방향을 찾아갈 수가 있다. 소망이 곧이 이정표와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소망은 삶의 절대적인 요소인 산소와 같고, 올바른 삶을 지향하는 이정표와 같다. 이 시간에는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열두 번째 소망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산 소망이신 예수님

본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치는 할렐루야 시편 중에 하나다. 도울 힘도 없는 허무한 사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고, 사람에게 소망두지 말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내용이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5). 그런데 여기에 나온 소망이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는 티크바’(תקוה)인데, 여기서는 세베르(שבר)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세베르에는 희망이란 뜻도 있지만 주로 곡식’, ‘양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를 보면, 극심한 흉년에 이집트에 곡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그의 자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שבר)이 있다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42:2). 여기에 나온 곡식이 세베르다. 이를 뜻하는 오켈(אֹכֶל), 레헴(לֶחֶם) 등의 단어가 있는데, 굳이 세베르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소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소망은 살기 위해 매일 먹는 양식과 같다는 것이다. 야곱 가족에게 양식은 단순히 허기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 소망(שבר)을 두는 자란 하나님을 자기 양식(שבר), 곧 삶의 양식,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 자를 뜻한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한 이유는 먹고 마시고 배고프지 않는 영원한 양식’(שבר)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신약에서 예수님과 신비하게 연결이 된다. 주님은 오병이어 사건에 이은 유명한생명의 양식설교(6:)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6:36,48). 주님 자신이 (שבר)이라는 선언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떡, 산 떡이라는 것이다. , 주님이 소망이라는 말씀이다. 베드로의 표현을 빌리면 산 소망(벧전1:3)이란 뜻이다. 주님은 산 소망이시다. 산 소망이란 이런 뜻이다. 첫째, 산 소망은 살려주는(살게 하는)소망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살리는(혹은 살려주는), 살게 하는 것이 소망이다. 그렇다. 소망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살고자 하는 의욕을 주고, 용기를 주고, 이유를 준다. 그래서 산 소망은 살리는(살게 하는) 소망인 것이다. 소망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개의 경우 능력이 없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해서 실패한다. 그래서 성공의 비결로 가장 많이 듣는 답이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함은 이런 이유에서다. 소망이 있으면 어떤 환경도 상황도 역경도 질병도 넘어설 수가 있다. 주님이 그렇다는 것이다. 주님이 곧 살리는, 살려주는, 살게 하는 분이시다. 이 주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고, 이런 사람이 주님께 기쁨이 된다.

 

 

둘째, 산 소망은 살아있는소망이라는 뜻이다. 산 소망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소망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있는 소망, 곧 영생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산 소망은 살게 하는 소망이면서 살아있는 소망이다. 단지 세상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사업을 성공하게 해주는 것을 넘어 영생을 얻게 해주는 영원한 소망인 것이다. 베드로의 소망에 대한 정의가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3~4). 소망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유업)인데, 썩지도 손상되지도 시들지도 않는 것이다. 성도의 삶이란 이것을 바라보고 기대하며 사는 것이다. 주님은 썩지 않고, 손상되지 않고, 시들지 않는 하늘의 유업을 잇게 하시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다. 이렇게 주님은 먹고 마시고 배고프지 않는 영원한 양식’(שבר)으로 이 땅에 오셨다. 신앙생활이란 이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것, 이 주님을 마음에 품고 바라보며 기대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다.

 

 

주님을 소망한다는 것

주님은 먹고 마시고 배고프지 않는 영원한 양식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를 살게 하고, 살아있는 산 소망이 되셨다. 중요한 것은 이런 주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그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 또한 소망에 있다. 소망이란 의미로 흔히 사용되고 있는 티크바(תקוה)란 단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 ‘인데, 카바(קוה)라는 동사에서 왔다. 이는 끈이나 줄로 함께 단단히 묶다.’,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다.’, ‘참을 성 있게 기다리다.’, ‘사모하다.’ 등의 여러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소망한다는 것, 혹은 주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3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산 소망이신 주님께 대한 중요한 태도로 다리고, 대하고, 도하는 것이다.

 

 

구원의 소망상급의 소망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참을 성 있게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신앙생활은 한마디로 말하면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주님께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5). 소망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끝까지 참고 기다리게 한다. 또한 소망은 믿음이 주님께서 약속하셨다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확신을 가지고 기대하게 한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곧 오게 될 것이라고, 더 좋고, 더 나은 것을 우리로 기대하게 한다. 주님의 말씀과 약속, 능력과 축복을 믿고 그것에 대해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이 소망이다.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병든 사람은 치료를 기대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은 도우심과 해결을 기대하고위기에 처한 사람은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다림과 기대는 우리를 자연스럽게 기도로 이끈다. 기다림과 기대를 품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만든다. 그래서 기다림과 기대, 그리고 기도, 이 세 가지를 ‘3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기다리고 기대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가리켜 주님께 묶인 사람, 주님에 단단히 붙잡힌 인생이라고 말한다. 주님을 소망하고,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을 주님께서 기뻐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상에서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기대하고, 참을 성 있게 주님을 기다리며,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는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묶이고, 사랑에 묶이고, 능력에 묶이고, 사명에 묶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을 소망하고, 주님께 소망을 둔 사람의 태도다. 때문에 주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루어지는 소망

산 소망은 이루어지는소망이다. 소망이 아무리 좋아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소망이 아니다. 이뤄지지 않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산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소망이다. 어느 작가는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없는 것이다.’고 했다. 세상소망에 대한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세상소망은 망상이고 신기루 같은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소망을 말하면서 절망하는 것이다. 이 점이 세상소망과 산 소망의 결정적인 차이다. 산 소망은 살리는, 살려주는, 살게 하는 소망이고, 살아있는 영원한 소망이고, 반드시 이뤄지는 소망이다. 마치 배의 닻과 같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고, 새의 날개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시련의 풍랑에도 부서지지 않고, 환난의 밤에도 방황하지 않고, 의지하는 것이 무너져도 추락하지 않고, 비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의 절기 대강절 첫 주일이다. 이 소망의 절기에 산 소망이신 주님으로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기대하고, 참을 성 있게 주님을 기다리며,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는 생활에 정진하여 주님께 더욱 단단히 묶인 삶이 되자. 성도와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다. 그러니 소망의 바이러스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절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산 소망을 주는 사람,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산 소망을 주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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