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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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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8,758회 작성일 22-10-23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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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헌신

7:36~50

2022. 10/23. 11:00

만남과 선택, 그리고 가치

흔히 인생을 만남의 존재라고 한다. 신앙생활도 만남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신앙생활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만남 자체는 의미있는 사건을 만들지는 못한다. 만남에 이어 선택이 있어야 만남이 사건이 된다. , 주님을 만나야 하고, 만남이 중요한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한다. 복음서에서 많은 사람이 주님을 만났으나 그 만남을 특별한 사건을 만들지 못한 경우를 본다. 그저 만남 자체로만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남을 결실이 있는 아름다운 사건으로 만든 사람에게는 선택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주님의 12제자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을 만난 다음 그들의 생계도구였던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주님을 만난 다음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 , 생계를 결정짓는 생업과 부모까지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는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 가치. 선택을 좌우하는 것이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에 시간도 열정도 재능도 물질도 투자하여 그것을 선택한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생업까지 포기하고 주님을 선택하여 따랐다는 것은 그들이 생업을 포기해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주님께 가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버려두어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신이 가치를 두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게 된다. 지난주일 65명 전교우가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순교했던 순교지 영광 야월교회를 다녀왔다. 그들이 목숨을 내어놓고 주님을 선택한 것도 주님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지 않겠다는 말 한 마디면 목숨을 살릴 수 있었는데, 그 말 한 마디를 못해서 그랬다. 우리 또한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믿고 있는 이 신앙, 내가 따르고 있는 예수님의 가치가 얼마만큼이나 되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께 기쁨이 되는 삶, 일곱 번째로 헌신’(희생)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대조적인 두 사람

본문에는 대조적인 두 사람이 나온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사람은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이다. 바리새인이 예수님과 식사를 하고 싶어 주님을 초대했다. 이는 그가 생활도 넉넉하고 종교적인 열심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 두 사람의 태도가 극명하게 나뉜다. 그는 주님을 초대해놓고 정중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아마도 주님을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어떤 분은 바리새인의 이런 태로를 씁쓸한 모욕이라고 표현했다(케네스 E. 베일). 주님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주님께 발 씻을 물도(44), 입맞춤도(45), 그 흔한 감람유도(46) 드리지 않았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손님이 오면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는 물과 올리브유를 먼저 내왔다. 그 이전에는 식사를 시작할 수 없었다. 바리새인이라면 성경만큼 소중히 여기는 탈무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더러운 사람이 성전예배에 적합하지 않듯, 더러운 손은 식전기도에 적합하지 않다.’ 바리새인은 그 당연한 일을 자신이 초대한 손님에게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감격과 사랑, 헌신을 꽃피우다

반면에 죄인으로 소문난 이 여인은 주님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무엇보다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렸다. 학식과 많은 재물을 가진 바리새인보다 오히려 죄 많은 여인이 주님께 예를 갖췄고, 주님을 높여드렸다. 왜 이 둘의 모습이 이토록 차이가 난 것일까왜 바리새인은 주님을 초대해 놓고 주님께 책망을 들을 만큼 이렇게 홀대했을까? 또한 죄인이라 불리는 여인은 주님께 아낌없는 헌신을 했을까? 바리새인에게는 없는 두 가지가 여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이 여인에게는 주님을 만난 감격이 있었다. 그녀는 주님의 발 곁에 서서 하염없이 울었다. 눈물의 이유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설명이 필요 없는 감격의 눈물이다. 그리고 그 감격은 순간의 감상이 아니었다.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다.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41,42), 죄인을 찾아오신 은혜, 죄인을 끌어안으신 은혜, 죄를 사하여주신 은혜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은혜를 받은 자로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 여인이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여인의 헌신 이유를 바리새인에게 비유를 통해 설명하셨다. 500데나리온을 빚 진자와 50데나리온 빚 진자가 있는데, 이 둘이 빚을 모두 탕감(蕩減)받은 이야기다. 하나님 앞에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를 채무를 이행하지 못해 발생한 빚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 중 누가 더 탕감해준 자를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셨다. 말해 뭐하겠는가! 당연히 더 많은 금액을 탕감 받은 자가 더 감사하고, 더 사랑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많은 탕감이 아니라 많이 탕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과 달리 죄 사함을 깊이 경험한 여인이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헌신의 동기가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랑은 헌신의 강력한 동기다. 사랑하면 아깝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할 때만큼은 막 퍼준다. 보상도 필요 없다. 하지만 사랑이 식으면 아깝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줬던 것을 다시 거둬가기도 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도 이와 같다. 주님께 다 드리고 싶다. 그러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중요한 것이 생기면 태도가 바뀐다. 주님은 뒷전이고, 지금 당장 사랑하고 있는 것에 헌신을 쏟아 붓는다. 결국 이 감격과 사랑이 두 사람의 차이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감격과 사랑, 이 둘을 은혜의식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은혜의식이 주님께 감격하게 만들었고, 또한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 은혜의식이 영혼이라는 밭에서 헌신을 꽃피우게 만든다. 헌신하지 않고는 살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여인은 자신의 전부와도 같은 향유를 주님께 쏟아 부었다. 그 향유는 곧 자신의 생명줄이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쏟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주님을 만나 너무 좋았고, 그 주님을 애타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침묵, 헌신의 미덕

주님을 만나 감격하고, 주님을 사랑한 사람은 헌신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헌신의 태도 역시 차이가 있다. 본문은 여인과 바리새인을 교차적으로 보여주는데, 여인은 행동을 하고, 바리새인은 말만한다. 여인은 행동으로 헌신을 보여주고, 바리새인의 말뿐인 허울이 대조된다. 요란한 것은 바리새인이었지만 주님께 무엇 하나 하지 않아 질책을 받았다. 본문에는 이 여인의 말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여인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지만 큰 칭찬을 받았다. 그렇다. 참된 헌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입이 아니라 손과 말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적인 삶으로 하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여인이 보여주었듯, 진정한 헌신은 또한 사람이 아닌 주님을 주목하게 만든다. 사람의 이름이 아닌 주님의 이름을 드러나게 한다. 내가 철저히 부정되고 가려진다하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 헌신 그 자체가 즐거움이자 축복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디언에게 평생을 바쳐 복음을 전한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 Brainerd)는 주님 앞에서의 겸손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만일 내게 긍휼을 베푸신다면 내가 아무리 오랫동안 괴로워하며 신앙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할지라도 그것은 순전히 그분의 은혜일뿐이다.’ ‘내가 온갖 의무를 행하고 부르짖고 눈물을 흘린다 해도 하나님이 내게 긍휼을 베푸실 의무는 전혀 없으시다.’ 신앙의 의무를 수행한 것 역시 은혜이기 때문에 그 어떤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러니 깊은 은혜의식에서 비롯된 헌신은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된다. 주님께서 아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헌신하고도 침묵을 지킨 것이다. 이 여인처럼 말이다. 우리는 주님께 요구가 참 많다. 물론 주님께 요구하지 못할 것은 없다. 어린 아이처럼 마구 요구해도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유아적 신앙에 머물 수 없다. 은혜를 안다면 감격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헌신하며 살 수밖에 없다. 이런 헌신이 있는 삶이 향기로운 인생이다.

 

향기가 있는 인생

냄새라는 책의 저자 바위치(Ann Sophie Barwich)의 말이다. ‘냄새는 감정적·정서적으로 우리를 움직이도록 부추긴다.’ 맛있고 기분 좋은 냄새는 사람의 마음과 몸을 이끈다. 향수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설에 의하면 사람이 향수를 뿌린 이유가 자신의 냄새를 감추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감추기보다 사람을 끌기 위함이다. , 자신의 냄새를 감추면서 다른 사람을 감정적·정서적으로 움직이기 위함인 것이다. 꽃들이 향기를 퍼뜨리는 이유도 벌과 나비를 부르기 위함이다. 식물은 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번식을 통해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면 벌이나 나비와 같은 다른 존재를 이용해야 한다. 그 방법이 향기다.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렸을 때, 이와 같은 여인의 헌신을 통해 향유는 향기로 퍼져나갔고, 그 방은 향유의 향기로 가득했을 것이다. 그 향기는 소리도 형체도 없었지만 함께 있는 자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 , 함께 있던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를 요동하게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주님께서 그 향기를 내뿜는 여인을 주목하시고, 크게 칭찬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요구가 아닌 헌신의 향기로 구원 받은 자의 독특함을 드러내자.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주님께, 주님의 교회에, 주님께서 지으신 세상에 헌신하자. 향유와 같은 시간, 물질, 재능, 열심, 생명까지 아낌없이 드리자. 이런 헌신이 있는 곳에 향기로 가득하게 된다. 그 향기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럽고 추하고 악한 사망의 냄새를 제거하고 생명의 냄새를 드러나게 한다. 또한 그 향기는 우리가 거하는 곳을 살맛나게 만들고,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고, 그래서 성도의 선한 영향력을 확장시켜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시도록, 우리를 기뻐하시도록, 우리를 칭찬하시도록 만들어준다는 사실이다. 바리새인이 많은 말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여인이 주님의 칭찬과 주목을 받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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