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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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3,512회 작성일 21-10-11 08:12본문
열어주소서! ‘귀Ⅻ’
요20:24~31
2021. 10/10. 11:00
청각적인 독서
옛 수도자들은 ‘독서’(lectio)와 ‘들음’(auditio)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동시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도자들에게 독서는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읽는 수행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귀 기울여 듣는 수행이었다. 장 르끄레르는 이를 가리켜 ‘청각적인 독서’라고 하였다. 베네딕토 역시 수도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거듭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계속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빛을 향해 눈을 뜨고,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외치며 훈계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 모임이나 예배에서, 또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듣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말씀이 우리에게 머무르지 못하고 마치 길가 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사라지게 됨을 종종 체험한다. 이것은 말씀을 읽고 귀를 기울여 듣는 일이 잘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우리 안에서 메아리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일이 깊어질 때, 성경의 어떤 말씀이든지 우리를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우리 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흔히 기도를 대화라고 한다.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것이 기도라고 한다. 좋은 대화는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것이다. 좋은 기도도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하나님께 설득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말만 늘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기도에는 더 이상 들음이 없다.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나님을 향해 쏟아내는 것으로 끝이다. 그래서 심각한 영적 불통이 생기게 된다. 사실 훌륭한 기도자는 자기가 말하는 시간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오랜 시간을 기도로 보낼 수 있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듣는 것이 먼저다!
애덤 맥휴(Adam S. McHugh)라는 사람이 쓴「경청, 영혼의 치료제」란 책이 있다. 이 책에 이런 말이 있다. ‘듣는 것이 먼저다. 자기도 모르게 인생에 가장 먼저 시작되는 일은 듣기다.’ 사실 태아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태어나서도 부모가 자기에게 말하고 속삭이고 노래해 주는 소리를 듣다가 어느 날 그대로 따라하게 된다. 성장기 대부분을 가정에서 부모형제의 말을 듣고, 학교교실에서 선생님의 말을 듣고, 또래집단에서 친구의 말을 듣고 자란다. 사람은 듣는 것으로 시작하여 들으면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된다.
성경도 보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천지의 첫 반응이 ‘듣는 것’이다. 먼저 창1:1,2절은 천지창조에 대한 해설자의 해설이고, 이어서 혼돈하고 공허한 천지(2)를 향한 ‘빛이 있으라.’(3)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그런데 혼돈하고 공허한 천지에 귀가 있기라도 하듯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천지가 빛을 내었다(3). 듣는 것이 혼돈과 공허의 수면을 몰아내고 질서와 조화를 가져온 것이다..... 이는 빛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들음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듣는 행위로 창조된 세상에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을 창조하셨는데, 그들이 맨 처음 한 일도 듣는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이는 소위 ‘선악과 명령’으로, 여기에는 들음이 전제되어 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들음에 실패했다. 이것이 타락이고, 불행의 시작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애덤 맥휴가 말한 ‘경청이 영혼의 치료제’라는 말에 동의한다. 들음의 실패가 불행의 시작이었으니까 들음의 성공은 행복의 시작, 회복의 시작, 치료의 시작이다.
잘 듣는 사람이 제자다!
예수님은 치료자로 회복자로 이 땅에 오셨다. 죄라는 영혼의 병을 치료해 주셨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리를 다시 회복해 주셨다. 이 사역의 시작을 위해 먼저 하신 일이 제자를 부르신 일이었는데, 제자됨의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나 많은 배움도 아니고, 화려한 이력이나 좋은 직업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들음’이었다. 제자가 되려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반응한 사람이 제자가 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그랬고, 요한과 야고보가 그랬고, 마태가 그랬다.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던 일을 비롯하여 생계의 수단, 심지어는 부모형제까지 뒤로하고 주님을 따랐다. 들음의 결과로 그들은 위대한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복된 제자의 삶
본문은 실증주의자 도마에 대한 일화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다.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집 안에만 있었는데, 그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19). 문제는 그때 거기에 도마는 없었다(24). 도마는 뒤 늦게 주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으나 자신이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했다(25). 그리고 여드레 후,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다(26). 그때는 도마도 함께 있었다. 그리고 주님은 도마의 주장대로 부활을 직접 확인하도록 하셨다(27). 비로소 도마는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했다(28). 도마의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
도마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사람의 전형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은 도마의 믿음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주님을 직접 보지 못한 이들을 격려하는 말씀이다. 사실 여기서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이다. 우리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부활을 보지 못했으나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듣고’ 믿는다는 뜻이다. 물론 일상에서는 듣는 것이 보는 것보다 정확하지 못하거나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진리에서는 듣는 것이 최선이다. 여기서 보는 것이 개인이 직접 확인한다는 뜻이라면 듣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다는 뜻이다. ‘보는’ 신앙은 지금 여기서의 개인적인 실존적 경험을 중시한다. 그래서 ‘보는’ 신앙을 개인영성, 혹은 실존적 영성이라고 한다. 성령체험을 강조하고, 구원의 확신을 강조한다. 주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도마처럼 무엇이든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 특징이다. 유럽의 각성운동, 미국의 부흥운동은 전반적으로 직접적인 경험에 무게를 두었고, 한국교회도 이런 경향이 강하다.
반면에 ‘듣는’ 신앙은 교회역사에 무게를 둔다. 그 역사에 성경이 있고, 신조가 있고, 신학이 있다. 그래서 공동체영성, 혹은 역사적 영성이라고 한다. 보지 못하고 믿는다는 것은 교회의 역사가 전해주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신앙을 말한다. 교회에는 두 가지 신앙이 존재한다. 본문이 말하듯이 ‘보고’ 믿는 것과 보지 않고 ‘듣고’ 믿는 그것이다. 보고라도 믿을 수 있다면 좋다. 예수님도 도마에게 손을 넣어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람직하고 복된 신앙은 보지 않고 듣고 믿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개인적인 강한 체험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일반적이지 않고 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보지는 못했고,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들은 말씀을 믿게 되었다면 이보다 큰 복이 없다. 그러니 구체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보는 것에 집중하다보면 자칫 보는 것에, 특히 현상에 매일 수가 있다. 반대로 ‘들으려고’ 해야 한다. 잘 들으려고 해야 한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무엇을 우리에게 전승해주고 있는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부활의 주님은 이제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즉,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만나주신다. 그래서 듣는 것이 중요하고, 듣는 것이 믿음을 결정짓는다. 잘 듣는 것이 복된 제자의 삶이다.
들어야 복이 된다.
토미라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할 수 있는 치료를 다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담당의사는 토미 어머니에게 아이를 집에 데리고 가서 편안한 임종을 준비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퇴원 후, 결국 토미에게 임종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때 토미가 엄마에게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죽음이 뭐예요. 무서운 거예요?’ 엄마는 토미의 질문에 정말 신중하게 대답을 해줘야 된다고 생각했다. ‘나도 잘 모르니까 하나님께 물어보고 대답해줄게.’ 그리고 엄마는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하염없이 울면서 대답할 말을 달라고 기도했다. 잠시 후 눈물을 씻은 엄마는 토미에게 가서 말했다. ‘토미야, 네가 건강했을 때 밖에서 놀다 들어와서 소파에서 잠이 들면 아침에 어디에 있었지?’ ‘아빠가 나를 침대에 옮겨 눕혀 주었어요.’ ‘그래. 네가 잠을 자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시켜 너를 천국으로 옮겨주시는 거야. 그것이 죽음이야!’ 그러자 토미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그러면 나는 편안히 잘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천국으로 옮겨주실 테니까요!’
이토록 중요한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죽음의 의미도 바꿔버린다. 죽음이 절망적인 끝이 아니라 죄와 질병과 고통과 눈물 많은 이 세상에서 죄도 질병도 눈물도 고통도 슬픔도 없는 영원한 나라로 옮겨가는 것, 곧 장소의 이동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의 의미도 바꿔버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이 복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 믿음의 말을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소망의 말을 들으면 소망이 생기고, 감사의 말을 들으면 감사가 생기고, 사랑의 말을 들으면 사랑이 생긴다. 이 모두를 포함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의 말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을 들려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복이다. 잘 들어야 복이 된다. 또한 복이 되도록 말씀을 부지런히 잘 들려주어야 한다. 이것이 부모의 사명, 교사의 사명, 성도와 교회의 사명이다. 말씀을 잘 들음으로 복을 받고, 잘 들려줌으로 복을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iEpLGcJmSx4 12866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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