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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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602회 작성일 21-08-23 10:11본문
열어주소서! ‘귀Ⅴ’
창19:12~15
2021. 8/22. 11:00
들어주었을 뿐인데
제리 에이커프라는 미국 자연식품 회사 판매왕의 일화다. 그가 판매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잘 들음’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날, 그는 알로에 제품의 효능을 어느 고객에게 소개하였다. 하지만 고객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고객의 표정을 살피다 베란다에 놓인 분재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화재를 바꿨다. ‘귀한 분재네요. 어디서 구하셨나요? 이런 분재는 본 적이 없어요.’ 이 말을 들은 고객은 그에게 집중하며 자신의 분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고객의 관심사로 대화를 이끈 것이다. 고객은 신이 나서 자신의 얘기를 계속했고, 그가 한 일은 그저 듣는 것뿐이었다. 분재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던 고객은 마침내 그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가 소개한 제품을 구매하겠다고 했다. 결국 그는 듣는 것만으로 고객의 마음을 얻어 매상을 올린 것이다. 그래서 ‘들어라. 또 들어라!’ 영업의 귀재들이 하는 충고다. 사실 듣는 것은 단순한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일종의 마케팅 수단이다.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듣고 있으면 내가 이득을 얻고, 내가 말을 하고 있으면 남이 이득을 얻는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말을 많이 해야 내게 득이 되고, 주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말을 하는 사람이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고, 주도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감동을 주기는 힘들다. 때로는 묵묵히 들어주는 것이 더 큰 감동을 주고,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이청득심(以聽得心)이란 말이 있는 것이다. 듣는 것으로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다. 마음을 기울여 상대방의 말을 들음으로 공감하게 되고, 그 과정에 신뢰가 쌓여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징키스칸의 말이다. ‘배운 것이 없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잘 듣는 것이 유익하게 현명하게 하는 비결이란 뜻이다. 덤으로 상대방의 마음까지 얻게 되니 일거삼득(一擧三得)이 아닐 수 없다.
농담으로 여겼더라!
안타깝게도 본문에는 들음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롯의 예비 사위들이 그 주인공이다. 롯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조카로, 그는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이국만리(異國萬里) 가나안 땅까지 왔다. 덕분에 그도 큰 부자가 되었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그가 택하여 간 곳이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동산처럼 기름진 곳이었으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사무쳤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을 심판하시기로 마음먹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롯과 관련된 사람들을 먼저 구출하고 심판하려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이 사실을 롯에게 알려 가족을 그곳에서 탈출하도록 지시하셨다. 그때 롯은 자신의 두 딸과 정혼한 예비 사위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떠나자고 했다. 그런데 두 사위의 반응이 의외였다. 본문은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4).
불신이 문제다.
롯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데, 사위들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한 일이다. 본문은 엄중한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이런 반응을 통해 듣기의 장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불신’이다. 불신은 지난주일 말씀드린 교만과 함께 들음의 심각한 장애 중에 하나다. 우선, 롯의 사위들은 그의 장인 롯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장인이면 굉장히 어렵고 조심스러운 사이인데, 그것도 예비 장인이니까! 그런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이는 그들이 롯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그동안 롯이 사위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존경하거나 신뢰하는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닮고 싶어 하고, 그가 한 말은 귀를 기울여 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롯의 사위들은 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 신뢰가 무너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안 믿는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신뢰가 무너지면 당연한 것도 믿지 않는 다는 것, 당연한 것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수사학에서 설득의 3요소로 ‘로고스’(Logos)와 ‘파토스’(Pathos), 그리고 ‘에토스’(Ethos)를 말하였다. 그는 이들 중에서 설득에 가장 중요한 것이 에토스라고 했다(에토스 60%, 파토스 30%, 로고스 10%).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의 도덕성(인격과 성품)을 의미한다. 즉, 말하는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이 설득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격과 성품은 신뢰와 존중의 바탕이다. 그러니까 결국 신뢰와 존중이 설득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말하고, 누구의 말이냐에 따라 듣는 태도가 달라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듣는 태도를 좌우한다. 이것이 곧 롯의 문제였다. 때문에 그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사위들이 듣기를 거부한 것이다. ☛아무튼 본문에서 먼저 믿는 사람의 무거운 책임을 느낀다. 우리의 삶이 가족을 비롯한 우리 주변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어느 설문조사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믿지 않는 사람 60%가 성도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40% 정도가 남아있으니 안도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점점 롯을 닮아가는 성도의 모습에 진지한 성찰과 마음을 쪼개는 회개가 요구된다. 적어도 성도는 신뢰의 아이콘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통해 전해지는 복음에 사람들이 귀를 열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롯의 사위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롯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밝혔는데도 그들이 이런 태도를 보였다. 이는 그들이 롯을 우습게 여긴 것을 넘어 하나님까지 우습게 여긴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전혀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보다 말씀 자체에 무게를 둔다. 고넬료처럼 말씀 때문에 전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고 존중하게 된다. 롯의 사위들에게는 말씀을 전하는 롯에 대한 신뢰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도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런 불행을 낳게 된 것이다. 신앙 안에서는 말한 사람에 대한 신뢰도 중요하지만 말씀 자체에 대한 신뢰가 더 중요하다. 말씀은 그 자체가 존중의 대상이고, 신뢰 대상이기 때문이다. 말씀의 권위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공부할 때, 그리고 설교를 들을 때 가져야 할 중요한 전제다. 이런 전제 없이 그저 일반 책을 읽고, 강연을 듣고, 강의를 듣듯이 말씀을 대하니까 올바른 들음에 실패하게 된 것이다. 롯의 사위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록 장인은 신뢰할 수 없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면 심판의 불구덩이에서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말씀을 가르치거나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씀을 들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가꿔야겠지만 듣는 사람 또한 말씀 자체에 권위를 두고 들어야만 한다.
불신은 사단의 주요 무기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사단’이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불신을 갖도록,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도록 혈안이 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처음 사람 ‘하와’사건이다. 뱀으로 위장한 사단은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신뢰,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를 갖지 못하도록 했다(창3:1~5). 그러자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서 먹게 했다(:6). 신뢰가 무너지니까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 죄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불신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예수님의 시험도 비슷한 경우다(마4:1~11). 주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려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주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주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신적인 능력을 자신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사용한 못난 인간(첫 번째 시험),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용한 세속적인 영예에 목마른 속물(두 번째 시험),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야망실현에만 눈이 먼 사람(세 번째 시험)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사단의 의도를 아시고 멋지게 물리치시므로 사단이 주님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신을 품게 하여 아담과 하와를 무너뜨리고, 주님까지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무너뜨리려했던 사단의 공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를 성공적으로 막아서는 비결은 주님의 말씀처럼 ‘깨어있는 것’(막14:38)이다. 그리고 여호사밧의 권면처럼 적극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대하20:20). 그래서 주님께 대한, 주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를 굳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들음에 성공하는 비결이다. 믿음 안에 굳게 서는 비결이고, 형통의 비결이다.
잘 들어준다는 것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데, 상대방이 감동을 받고 마음까지 내어준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행위만 아니라 여러 중요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들어준다는 것은 ‘신뢰와 존중의 증거’다. 성경이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강조한 한 것도 이 때문이다(삼상15:23). 주님의 말씀을 간절히, 열심히, 자주, 많이 듣는 것은, 곧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신뢰한다는 증거다. 누구를 불문하고 존중하고 신뢰하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소중히 여기고 신뢰하는 것에 집중하여 듣게 된다. 아울러 잘 듣고 집중해서 들으면 존중과 신뢰를 얻게 된다. 이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훔치는 비결이다. 즉, 주님의 마음을 훔치는 비결도 들음에 있다. 모쪼록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 항상 듣기에 성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며, 또한 듣기에 성공하여 주님의 마음까지 훔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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