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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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602회 작성일 21-09-27 11:13본문
열어주소서! ‘귀Ⅹ’
잠1:1~9
2021. 9/26. 11:00
군자(君子)는 소통의 달인이었다.
공자의 사상을 잘 모르지만 논어(論語)를 읽으면서 갖게 된 생각이다. 물론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공통점이 ‘인간됨’이긴 하지만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 역시 ‘인간됨’이라 생각했다. 잘 아는 대로 논어는 배움의 즐거움에 대한 말로 시작을 한다. 시간을 내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그리고 ‘삼부지’(三不知)로 끝을 맺고 있다. 천명(命)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不知命이면 無以爲君子也요), 예(禮)를 알지 못하면 세상에 당당히 나설 수 없고(不知禮면 無以立也요),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없다(不知言이면 無以知人也니라)고 했다. 즉, 참 사람됨은 천명을 알고(知命), 사람이 사는 도리를 알고(知禮), 그리고 말하는 법을 아는데(知言)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와 근거가 ‘배움’(學)에 있고, 배움의 목적은 ‘인간됨’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배움으로 시작하여 참 사람됨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말하는 법’(知言)을 맨 나중에 두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관계(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같다. 사실 동양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군자(君子)는 바다처럼 태산처럼 수(포)용성이 큰 사람이고, 누구와도 화목하게 잘 지내는 사람(和而不同)을 뜻한다. 한 마디로 ‘소통의 달인’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곧 공자가 배움을 통해서 추구하는 인간상이다. 이 배움의 출발이 곧 ‘들음’이고, 그런데 문제는 잘 듣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누군가 ‘말하는 것은 3년이면 배우지만 듣는 것은 80년이 걸려야 배운다.’고 했다. 잘 듣는 일은 평생이 걸린다는 뜻이다. 공자가 나이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귀를 열고 순하게 잘 듣는 것이 쉽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누구의 말에도 마음을 활짝 열고 잘 들어주고, 그래서 깊이 소통하는 것이 군자의 삶이라면, 잘 들어주면서 소통하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사람됨의 출발로서 ‘들음’
사람에게 있어서 말은 참으로 중요하다. 한 사람의 인격과 내면을 드러내는 외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은 인간의 본질을 ‘살아있는 로고스’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말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말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사는 존재가 인간이다. 따라서 말은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서 단어와 단어의 조합이 아니라 삶의 경험, 지혜, 지식을 나누며 관계를 구축한다. 말로서 서로를 세워주고,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위로와 소망을 준다. 반면 아첨하고, 자랑하는 말잔치, 비웃고, 속이고, 험담하고, 모욕하고, 혐오하고, 배제하고, 비방하는 것도 말에 있다. 아무튼 사람은 말의 세계를 떠나 살 수 없다. 그래서 말의 창조력과 파괴력 사이에서 배회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와 성도가 건강하고 지혜로운 말로 자아 정체성과 공동체성을 구현하려면 어디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오래되었지만, 날로 새롭게 적용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점을 강조하고 있는 책이 ‘잠언’이다. 본문은 잠언의 기록 목적을 말하고 있는데, 꽤 장황하게 이를 설명하고 있으나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사람됨’(7)이다. 여기에는 참 사람됨의 정의와 함께 조건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참 사람됨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인간관이기도 하다. 논어와 잠언은 닮은 점이 많다. 물론 의미는 다르지만 ‘참 사람됨’이란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그 방법으로 배움을 강조하고 있는 점, 그리고 배움의 출발로 들음을 강조한 것도 그렇다. 이와 같이 잠언의 핵심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사람됨’의 첫 출발은 ‘들음’이다. 사람이 태어나 듣고 말하듯,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사람됨을 위해서도 ‘들음’이 먼저다. 그래서 잠언은 ‘들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명령형 ‘들어라’로 시작되는 구절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4:10, 8:34, 13:1,8, 19:20, 23:19,22, 25:10 등). 하나님의 대리자 혹은 말씀의 대언자로서 부모(혹은 스승)의 훈계와 법을 부지런히 ‘들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사람됨에 이르게 된다.
제자됨의 조건으로의 ‘들음’
들음과 관련하여 잠언에서 눈여겨 볼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들음이 ‘제자됨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잠언에서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은 ‘부모’이고, 가르침을 받는 대상은 ‘아들’이다(8). 그래서 ‘내 아들아!’(8a) 라는 호명이 23회나 나온다. 이런 호명이 10장 이후부터 훈계를 받는 모든 이를 지칭하게 된다. 즉, 미성숙한 젊은이뿐만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에게까지 확장이 된다. 단순히 생물학적인 부모와 자식 관계를 넘어서 지혜집단의 스승과 제자 사이에 사용되는 호칭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내 아들아’는 스승이 제자에게 말하는 방식인 셈이다. 동시에 이는 가정이라는 삶의 자리와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대리자 혹은 말씀의 대언자로서 부모의 훈계와 법(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일상화된 가정은 지혜의 수원지다. 실제로 부모는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만나는 최초의 스승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가 잘 듣는 것이다. 들음이 곧 자녀됨의 조건, 제자됨의 조건이다. 그래서 ‘들어라’는 명령형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들음은 지혜자의 삶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지혜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 ‘듣는 마음’(לב שומע)이란 뜻을 가진 단어도 있다. 지혜가 ‘듣는 마음’이라면 지혜자는 당연히 ‘듣는 마음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겸손하게 듣는 것을 좋아한 사람, 누구에게나 듣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지혜자다. 본문에서도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오묘한 일을 깨달으리라.’(5,6). 여기서 지혜 있는 자와 명철한 자는 동의어이고, 명철한 자 다음에 ‘듣고’라는 동사가 생략되었다. 들음을 통해 지혜 있는 자는 더욱 학식이 더하게 되고, 더 높은 지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자의 말과 세상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지혜자의 삶의 태도는 들음이고, 들음을 통해 지혜자의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반면 지혜로운 자와 반대편에 거만한 자가 있다. 이 둘의 차이는 ‘들음’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지혜로운 자는 부모의 훈계를 듣지만(13:1a) 거만한 자는 부모의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13:1b). 들음이 지혜로운 자와 거만한 자를 결정지은 것이다. 왜 거만한 자가 듣지 않는 자인지를 ‘거만한 자’란 히브리어 단어의 뜻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거만한 자를 히브리어로 ‘레츠’(לֵ֗ץ)라고 한다. 이는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수다쟁이’이나 ‘조롱하는 자’를 뜻한다. 부모의 말을 듣는 지혜로운 아들과 반대로 부모의 꾸지람을 듣지 않는 거만한 자는 ‘조롱하는 수다쟁이’라는 것이다. 부모의 교훈을 조롱하며 자기 말만 늘어놓는 수다쟁이가 어떻게 부모의 교훈을 들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결국은 말씀을 거역한 악인이 되는 것이다. 듣기를 좋아할수록 배움과 지혜에 다가서게 되고,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 듣는 것은 잠언이 제시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사람됨의 출발이고, 제자됨의 조건이며, 지혜자의 지혜로운 삶의 태도다.
온 몸으로 들으신 주님
한 심리학자는 가정문제의 대부분은 배우자, 특히 남편이 경청만 배워도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어느 남편이 집에 와서 여자가 남자보다 하루에 갑절이나 많은 말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남자는 1만 5천, 여자는 약 3만 단어의 말을 한다고 함). 그러자 아내가 왜 그런지 아냐고 물었다. 그 이유를 남편이 묻자 아내가 대답했다. ‘남편들이 아내들로 같은 말을 두 번씩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편이 뭐라고 했을까?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이것이 남편들의 병증이다. 자신은 도번 말하는 것을 질색한다면서 다른 사람에게 꼭 말을 두 번 시킨다. 듣는 것은 겸손히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는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이 곧 사랑이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랑의 첫째 의무는 경청하는 것이다.’고 했다. 사랑은 이웃의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헨리 나우웬이란 영성가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예수님은 온 몸이 귀였다.’ 그가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도 했는데, 이 보다 더 멋지고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은 온 몸이 귀였다는 말은 주님은 사람들의 소리를 온 몸으로 들으셨다는 뜻이다. 혼신을 다해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도 듣지 못한 세미한 소리까지 다 들으셨다(열 두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의 이야기). 주님은 온 몸이 귀였을 뿐만 아니라 온 몸이 눈이었다. 주님은 온 몸으로 듣고, 온 몸으로 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주님은 모든 소리를 다 들으시고, 모든 상황을 다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성가에서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성도는 주님을 따르는 ‘주님 따르미’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주님을 닮아야 한다. 우리 또한 주님처럼 온 몸으로 듣고, 온 몸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자 지혜를 얻는 지혜자의 삶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사람됨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잘 듣고, 잘 들어주는 사람, 그가 바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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