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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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236회 작성일 21-09-06 08:10본문
열어주소서! ‘귀Ⅶ’
행17:10~15
2021. 9/5. 11:00
마음의 그릇
한 스승이 어느 청년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 제자는 모든 일에 웬 불만이 그렇게 많은지 늘 투덜거렸다. 어느 날, 스승은 제자를 불러 소금을 한줌 가져오라 하여 소금을 물 컵에 털어 넣게 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게 했다. 제자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그물을 마셨다. 스승이 물었다. ‘맛이 어떠냐?’ ‘짭니다.’ 스승은 다시 소금 한줌을 가져오라 하더니 근처 호수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소금을 쥐고 제자의 손을 호수에 담그고 휘휘 저었다. 잠시 뒤, 호수의 물을 한 컵 떠서 제자에게 마시게 했다. ‘맛이 어떠냐? 소금 맛이 느껴지냐?’ ‘아니요.’ 스승이 말했다. ‘인생의 고통은 소금과 같다. 하지만 짠맛의 정도는 소금을 담는 그릇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네가 고통 속에 있다면 네 마음이 컵처럼 작기 때문이다. 작은 컵이 되지 말고 스스로 넓은 호수가 되라. 그늘이 넓은 나무에 새들이 모이듯 마음이 넓어야 사람이 모인다.’ 마음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쉽게 짜증을 내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걸핏하면 화를 내고, 탓을 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이유가 마음의 그릇 때문이란 것이다. 마음의 그릇이 컵처럼 너무 작아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마음이 왕지연못 정도만 되어도 소금을 한 트럭 실어다가 부어도 짠맛이 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크기를 결정짓는 것은 키나 몸무게와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이다. 마음이 크고 넓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그리고 마음의 크기를 결정짓는 것은 포용력, 혹은 수용성이다.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능력이 그릇의 크기를 결정한 것처럼 말이다. 작은 연못이나 보는 비가 오면 금방 물이 넘치고, 둑이 터져서 쓸모가 없게 된다. 하지만 바다는 세상 모든 물을 다 받아준다. 맑은 시냇물이든 더러운 오수나 폐수든, 심지어는 각종 쓰레기까지 차별하지 않고 다 받아서 품고 정화시키는 것이 바다다. 태산(太山)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흙을 다 받아주어 태산이 된 것이다. 세상에 이런 바다가 없고 산이 없다면 사람은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우선 온갖 쓰레기에 파묻히고, 오폐수에 잠겨 죽고 말 것이다. 산이 바다가 이런 것들을 다 받아주고 품어주고 정화시켜 주어서 이렇게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마음의 그릇이 큰 사람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받아주고 품어준다. 세상이 아직은 살만한 곳인 이유가 바다처럼 산처럼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성도가 바로 그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은 무슨 말이든 무슨 일이든 잘 들어주고 너그럽게 이해해준다. 이와 같이 수용하고, 포용하는데서 잘 들음도 나온다. 본문은 이런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다. 늘 그렇듯이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과 기도처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3주) 동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설교를 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곧 예수님이라고 증거했다(2,3). 바울이 전한 이 복음을 듣고, 데살로니가에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이 믿고자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유대인의 시기로 핍박과 방해를 받아 그곳에 더 머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바울 일행은 급히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데살로니가 남쪽 80km 지점 Wardar 평야에 위치한 마케도니아의 한 성읍으로 오늘날에는 ‘베리아’로 불린다. 농업과 금속 세공업 등이 발달하여 비교적 부유하고 번화함)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복음을 통해 많은 사람이 믿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이 베뢰아까지 쫓아와 복음사역을 방해했다. 이에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을 인도하여 아테네로 피하게 하였다.
바울의 복음전파로 데살로니가에서도 베뢰아에서도 구원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이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너그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과연 이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본문은 설명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으나 베뢰아에서 더 큰 역사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난 것일까? 그것은 말씀을 듣는 태도 때문이다. 같은 말씀이라도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반응을 결정짓는 것이 듣는 태도다. 바로 이것을 베뢰아 사람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어떤 태도(자세)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었기에 성공적인 들음을 갖게 된 것일까? 11절 말씀에 그 답이 나온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더 너그러운 베뢰아 사람들
‘더 너그러워서’ 이는 베뢰아 사람에 대한 본문의 첫 번째 평가다. 개역성경에서는 이를 ‘더 신사적이어서’ 라고 번역을 했는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은 ‘더 너그러워서’라고 번역을 하였다.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더 고상한’, ‘더 마음이 트인’,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데살로니가에 거주한 유대인이 보여준 모습과 비교한 것으로 베뢰아에 있는 유대인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훨씬 진지하고 호의적이었다는 뜻이다. 동시에 데살로니가에서 당한 소동이 만만치 않았음을 우회적으로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말씀에 열린 마음을 가진 베뢰아 사람들을 강조한 것이다. 사실 살전2:13절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말씀을 듣는 자세가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이 더 탁월했다는 뜻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호감을 갖게 된 베뢰아 사람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날마다 바울 찾아가 듣고 공부했다. 놀라운 일이다. 이들에게는 예의바른 진지함과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감정에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과정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듣고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면서 복음의 세계로 한걸음씩 들어간 것이다. 이와 같은 그들의 태도를 함축한 단어가 ‘너그러움’이다. ‘너그럽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관대하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수용하는 고상한 성품을 의미한다.
‘너그러움’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유게네스’(εὐγενὴς)라고 한다. 그 뜻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편견이 없는 확 트인 고결한 마음이다.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열린’ 마음이다. 즉,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적극 수용하는 태도다. 열린 마음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편견과 반대의 뜻이다. 편견이 ‘미리 정해진 판단’이라면, 열린 마음은 ‘규정하지 않는 마음’이다(☛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규정하지 않으니까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다 받아들일 수가 있고, 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열린 마음은 크고 넓은 마음이다. 아무튼 있는 그대로 듣고,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대하는 것이 열린 마음이다.
달리 말하면, 열린 마음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듣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때문에 있는 그대로 듣고, 보고,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듣고 보고 생각하니까 걸림이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니까 어떤 것도 거르지 않고 그대로 통과시킨 것이다. 다 받아주고 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들음에 대해서 계속 설교를 하고 있는데, 들음의 중요한 원리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열린’ 마음이다. 넓은 마음이다. 마음이 열려야 귀가 열린다. 귀가 열려야 잘 듣게 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열려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다. 설교자에게 마음이 열려야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의 입장이 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넓히려면
벵겔이라는 학자는 ‘열리는 것과 넓어지는 것은 밀접히 관련된다.’고 했다. 그렇다. 열려야 넓어지고, 넓어져야 열리게 된다. 즉, 귀가 열려야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이 넓어져야 귀가 열리게 된다. 상호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넓힐 수 있을까? 그래서 열린 마음, 크고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고대 교부 크리소스톰은 ‘그의 마음을 넓힌 것은 사랑이었다.’고 했다. 사랑이 마음을 넓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바울이 말한 사랑의 정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보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우리 마음을 쪼그라들게 하고, 좁아지게 하고, 닫히게 만드는 편견과 같은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장애물이 다 제거되니까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품어주는 크고 넓은 마음이 된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란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자란 사람을 비교했더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공감능력이 훨씬 떨어졌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나 슬픔, 기쁨에 공감을 잘 못했다. 뿐만 아니라 감정표현이 서툴고,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다보니 마음이 열리지를 않은 것이다. 흔히 사랑하면 상대방의 결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인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콩깍지 현상’이라고 한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선 마음의 모든 규정이 사라져버린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은 넘치는 물과 같다고 생각한다. 물이 넘쳐 잠기면 모든 경계가 사라져버린다. 주암댐을 막기 전, 지금의 상사호(湖)에는 여러 마을과 많은 사람이 살았다. 그곳에 많은 집과 전답이 있었고, 그것들마다 경계가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물이 가득차자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커다란 호수로 변했다. 물이 그 모든 것을 다 품어 버린 것이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다. 사랑으로 채워지면 마음에 있는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크고 넓은 마음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면 진지한 경청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 베뢰아 사라들처럼 말씀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크고 넓게 열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열리도록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모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인 복음에 귀를 기울여 잘 듣고 수용하는 스펀지와 같은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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