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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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5,510회 작성일 21-10-04 07:12본문
열어주소서! ‘귀Ⅺ’
눅10:38-42
2021. 10/3. 11:00
현대인의 병증
현대 영성학자 글렌 힐슨(Glann Hinson)은 현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분주함’이다. 너무 바빠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겪고 있는 대표적인 유혹 가운데 하나가 ‘바쁨’이다. 레비라는 랍비가 하루는 길을 걷고 있는데 어떤 사내가 바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보시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오?’ 달리던 사내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행운을 잡으러 갑니다!’ 그러자 랍비가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자구먼. 행운이 자기를 붙잡으려 뒤쫓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잡겠다고 달리다니. 결국 더 멀리 도망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바쁘다보면 자칫 소중한 것을 놓칠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한자 바쁠 ’망’(忙)자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마음 ‘심’(心)과 죽음(달아날) ‘망’(亡)자로 되어 있다. 바쁘면 마음이 죽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특히 성도에게는 경건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즉, 기도에 대한 마음, 찬양에 대한 마음, 예배에 대한 마음, 섬김에 대한 마음이 죽게 된다. 영적인 일에 대한 마음이 죽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가? 자연스럽게 말씀을 사모하여 듣고자 하는 마음도 죽게 된다. 그러면 결국 자기 근본을 잃고, 인생의 우선순위를 잃고, 주님까지 잃게 된다.
둘째는 ‘산만함’이다. 산만함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무심결에 일어나는 산만함이고, 다른 하나는 근본적인 산만함이다.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산만함이다. 근본적인 산만함은 집중력 결여이고, 집중력의 결여는 흥미결여를 의미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부분에, 소중히 여기고 마음이 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좀처럼 산만하지 않다. 주일예배 시간은 잊어버려도 좋아하는 TV프로그램과 그 시간은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산만함 때문에 잘 듣지 못한다는 것은 말씀에 대한 관심결여, 말씀에 대한 흥미결여, 그래서 이것이 말씀에 대한 집중력 결여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몸은 예배의 자리에 있어도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에게 말씀은 즉시 사단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우리가 영적으로 곤비한 상태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쁘고 산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집중하여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중에 있었던 사건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한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마을은 예루살렘 동쪽 3km 떨어진 감람산 기슭의 베다니라고 한다. 여기서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접을 받아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고 나사로의 동생이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 만에 주님의 도움으로 살아난 일이 있었고, 마리아는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일이 있었다. 그 만큼 이들 가족은 주님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때 마르다와 마리아의 대조적인 모습이 드러나는데,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에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였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 듣는 일에 열중하였다. 여기서 무심한 마리아에 대한 마르다의 불평이 터졌지만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말씀 듣는 태도를 지지하셨다.
문제는 이 사건을 주님은 몸으로 섬기는 것과 같은 활동적인 섬김보다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은 관조적(정신적)인 섬김을 더 기뻐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온 몸으로 섬기는 이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였다. 이런 설교를 듣고 나면, ‘나 이제 식당봉사 차량봉사 그만두겠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당시 사회는 직업의 귀천을 따졌고, 또한 직업에 따라 사람을 차별했다. 예를 들어 당시 유다사회에서 세리나 목자, 어부와 같은 직업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주님은 직업적 편견을 무너뜨리고 어부도 세리도 제자로 삼으셨다. 이렇게 직업적 편견을 넘어선 주님이신데 음식을 준비한 것보다 말씀 듣는 것을 귀하게 보셨다고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게다가 바쁜 언니의 일손을 도우려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주님 발아래 앉아 듣고만 있는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까지 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안 되는 부분이다.
배움에는 차별이 없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사회-문화적인 해석’이다. 주님 당시 유다사회에서 여성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랍비 엘리에제르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아버지가 딸에게 율법지식을 전해주는 것은 음행을 가르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라.’ 이런 시대에 도전을 주는 말씀이 누가복음이다. 누가복음의 중요한 특징이 남성과 여성을 대등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요셉과 마리아, 사가랴와 엘리사벳, 시므온과 안나, 나아만 장군과 사렙다의 과부, 가버나움 백부장과 나인성 과부, 바리새인 시몬과 죄 많은 한 여자, 겨자씨를 가진 남자와 누룩을 가진 여자,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남자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자 등등. 모두 27쌍이 나온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가리켜 ‘여성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들 기사와 사건에서 남자만 등장해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 이는 당대의 관습 및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특별한 일이다. 이러한 누가복음의 배열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주님의 생각을 잘 반영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마리아를 옹호하는 주님의 모습은 여성의 배움을 지지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이 말씀을 배울(들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게다가 주님께서 마르다를 책망하신 것도 그녀의 일이 아니라 여성의 배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그녀의 말과 태도였다. 그녀의 이와 같은 말과 태도는 당시 유다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녀를 책망하신 것이다. 대신 배움에 목말라 주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태도를 칭찬하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 칭찬 받는 신앙생활의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기회 있는 대로, 부지런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이 최상의 섬김이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인 해석’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누가복음에는 남성과 여성을 대등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과 기사가 27쌍이나 나오고 있다. 학자들은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 역시 바로 앞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와 한 쌍이라고 주장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남성’ 이야기이고,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은 ‘여성’ 이야기다. 그래서 신학자 탈버트(C.H. Talbert)는 이 구조에 따라 두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였다. ‘이 두 사건은 27절에 나오는 두 큰 사랑의 계명을 교훈적인 형태로, 그러나 역순으로 해설한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것이고,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것이다.’ 즉,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의 해석이고,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교훈하는 사건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주님께 마리아의 섬김을 ‘좋은 편’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마리아의 섬김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주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렇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사람들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해석을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하고 실제적이다. ‘듣는 것’,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법에 있어서 주님의 파격적인 교훈이다. 당시 사람들은 마르다처럼 더 많이, 더 화려하고, 풍성하게 차려놓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르다는 당시 사람들의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그들은 성전을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압도할 만큼 장엄한 예배의식을 가졌고, 각종 예물을 산처럼 바쳤다. 이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은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것은 간소하게 해도 괜찮고, 더 중요한 것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무엇이 중한 디!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배움)에 있어서 남녀차별이 엄연했던 시대에 차별이 없다는 것, 곧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히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을 서랑하고 섬기는 일에는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것과 하나님을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주님과 그 일행을 위한 ‘음식 준비와 환대’ 역시 당연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능가할 수 없다. 제임스 에드워드(James R. Edwards)는 ‘다른 모든 것, 환대마저도 복음 앞에서는 상대화된다.’고 했다. 이 말은 복음은 인생의 우선권을 재설정한다는 뜻이다. 즉, 그 무엇도 복음에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복음을 듣는데 우선권을 두었다. 이것이 그녀가 주님께 칭찬을 받은 이유다. 말씀을 듣는 것이 모든 가치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듣는 것은 믿음의 문제, 곧 생명의 문제다. 다른 모든 것은 생명을 확보한 이후의 문제다. 그러므로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고 항상 고백해야 한다. 말씀을 듣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 성도는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잘 섬기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중한 일을 바쁘고 산만하여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잘 듣지 못한 일이 왕왕 일어나고 있다. 말씀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품어 말씀에 마음이 죽지 않도록 하여 말씀을 집중하여 잘 듣는, 그래서 주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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