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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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530회 작성일 19-01-06 16:20본문
해가 돋았다.
창32:24-32
2019. 1/6. 11:00(신년 및 개당기념주일)
낮과 밤의 구분법
어느 물리학 교수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낮이 끝나고 밤이 시작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누가 대답해 보세요.’ 이 질문에 학생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죽여 가며 키득키득 웃었다. 해가 뜨면 낮이고, 해가 지면 밤이라는 사실쯤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대학 물리시간에 이런 질문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날씨가 너무 더워 지루한 강의시간을 좀 참신하게 하기 위해서 교수님이 재치문답 같은 것을 요구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수의 이런 질문에 가장 재미있게 대답을 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한 학생이 일어나 대답했다. ‘낮과 밤의 구별은 멀리 떨어진 동물이 개인지 고양이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썰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웃어주었다. 또 다른 어떤 학생은 멀리서 걸어오는 대머리 교수님이 물리 교수님인지 화학 교수님인지를 분간할 수 있을 때라고 큰 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교실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학생들의 목소리로 난장판이 되었다. 가만히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교수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할 학생이 없는 것 같군요. 그러면 하는 수없이 제가 답을 말해야겠어요. 여러분, 각자 자기 주변에 있는 학우의 얼굴을 보세보요.’ 학생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주변에 있는 학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변 학우의 얼굴이 낯선 얼굴이 아니라 친밀한 나의 형제, 나의 자매로 보일 때가 바로 낮입니다. 주변 사람의 얼굴을 형제와 자매로 볼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시간은 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시간은 낮인가요? 아니면 밤인가요?’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거리며 바라보았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교수의 이 대답에 절반만 동의한다. 물론 내가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를 하겠지만 믿는 사람이기에 절반만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나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낮과 밤의 구분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그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은 빛 속에 거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주님이 곧 빛이시기 때문이다(요1:4). 또한 온 세계가 우리 주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역사를 BC와 AD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예다. 주님의 탄생이 역사의 분기점이 되었듯이 우리 개인의 삶도 주님이 분기점이시다. 그러니 우리 인생의 낮은 주님을 알고 그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주님을 모른 세월은 밤인 것이다. 낮과 밤의 구분은 휴머니티(humanity)가 아니라 믿음이 그 기준이다. 본문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밤이 지나고 밝은 아침을 맞이하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다.
야곱의 귀향
본문은 31장에서부터 시작된 야곱의 귀향과 관련된 사건 일부다. 야곱은 집을 떠난 지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설레기보다 무겁기만 했다. 20년 전 집을 떠날 때 형(에서)에게 큰 고통을 주었는데, 그 형이 지금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만약 형이 보복이라도 하는 날이면 자신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평안이 집에 돌아가기 위해선 형과의 화해가 가장 큰 숙제였다. 32장에 야곱의 이런 고민이 구체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귀향을 주도하셨기 때문(31:3)에 여러 번 야곱에게 안전한 귀향을 보장하는 말씀을 하셨다(32:1,2,12). 그렇지만 야곱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고민했다(32:7,11). 그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32:3~5, 11~23).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강을 건너지 못하고 홀로 남았다. 이를 보면서 사람마다 현실적인 문제가 너무 크고 어려우면 믿음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놀라운 것은 안전한 귀향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에도 이렇게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단 한 마디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왜 그렇게 믿음이 없냐고 호통을 치실 법도 한데 그저 그가 하는 대로 지켜보실 뿐이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워 가시는 방법이고,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본문의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홀로 남았더니
기도해도 두려움은 여전했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은 야곱은 가족을 모두 강을 건너게 한 후 망연히 홀로 남아 있었다. “홀 남았더니”(24). 야곱의 심정을 잘 표현해 주는 말씀이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 두렵고 고통스러운 마음,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여기에 다 들어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에게 씨름을 걸어와 날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씨름이 좀 특이하다. 대개 씨름은 상대를 먼저 넘어뜨린 사람이 이긴데, 이 씨름은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끝까지 붙잡고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특이한 씨름이다. 야곱이 날이 새도록 이 사람을 놓아주지 않자 이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래도 놓아주지 않자 야곱의 승리를 인정하고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개명(改名)하여 주었다(28).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다. 그러니 밤새 그가 씨름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던 것이다.
야곱이 홀로 강가에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그래서 홀로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홀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을 만났다. 엘이야가 이세벨을 피하여 홀로 동굴에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주님도 사역하시는 동안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야곱에게 씨름을 걸어오셨다. 이것은 그냥 씨름이 아니라 기도의 특징과 중요성을 보여준 것이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주님을 붙잡는 것이다. 야곱은 말 대신 날이 새고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붙잡고 있는 한 주님은 붙잡혀주시는 분이고, 끝까지 붙잡고 있는 한 우리에게 손을 들어주시는 분이다. 사실 주님은 우리가 붙잡는다고 하여 붙잡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주님께서 붙잡혀주시니까 붙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했다는 뜻이다. 기도는 야곱처럼 절실한 심정으로 주님을 끝까지 붙잡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28)는 복을 주신다. 결국 우리로 영적 승리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다.
브니엘의 해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과의 감격스러운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의 얼굴’이라 뜻이다. 그리고 그가 그곳을 지날 때 ‘해가 돋았다’(31).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야 인생의 낮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는 야곱이 20년 전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상황과 정반대의 표현이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창28:10,11). 브엘세바는 아버지의 집이 있는 곳이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해가 졌다’는 것이다. 장차 하란에서 야곱의 삶이 밤처럼 어둡고 힘들 것을 암시한 것이다. 실제로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하란에 있는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밤 같이 어두운 눈물의 세월을 보냈다(창31:40~42). 그렇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해가 진다(눅15:). 그런데 20년이 지난 다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때 해가 돋았다. 주님 떠나면 밤이고 주님 안에 있어야 낮이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여기서 ‘해가 돋았다’는 것은 야곱이 변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어 33장에 나온 야곱의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어제 저녁만 해도 그가 맨 마지막에 있었는데(32:24), 해가 돋은 이 아침에는 맨 앞에 있었다(33:3).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그리고 형 에서에게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33:10)라고 했다. 눈(관점과 시각)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야곱의 이 말을 아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생명을 경험한 사람은 야곱의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 찬송가 가사처럼 구원의 생명을 가지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된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내가 변하니까 내 마음이 변하고 내 눈이 변하니까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전에는 형이 형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넘어야 할 장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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