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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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377회 작성일 18-11-18 13:09본문
은혜를 기억합시다.
신6:10~15
2018. 11/18. 11:00(추수감사주일)
은혜를 모르는 사람
어느 마음이 착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빈민촌을 방문했다. 그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보고 한 사람을 후원하게 되었다. 매월 10만원을 그에게 생활비로 보조해 주었고, 그 일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한 달은 경제적으로 사정이 몹시 좋지 않아 10만원을 보내지 못하고 겨우 5만원만을 준비하여 그 사람에게 보냈다. 그러자 며칠 후 그 사람으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선생님께서 매월 꼬박꼬박 10만원을 보내주셨기에 이달에도 그 10만원을 사용할 계획을 다 세워놓았습니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5만원만 달랑 보내시면 어떡합니까? 선생님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이라도 져야한단 말입니까? 이번에 보내주지 않은 돈 5만원을 속히 보내주십시오!’
이 이야기를 읽고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염치도 없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접어 생각해보니 이것이 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기보다 현재의 부족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실 받는 데만 익숙하다보면 이렇게 될 수가 있다. 감사는 사라지고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오히려 주다가 그치면 그동안 받은 것에 감사하기보다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괜한 기대심만 갖게 하고 그쳤다고 원망한다. 때문에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산수(算數)문제가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이다.’는 격언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은혜를 구하기보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게 하소서! 채워달라고 떼쓰기보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소중히 여기며 감사하게 하소서!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헤아릴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애굽 땅 종 되었던 집
본문은 모세가 모압평지(광야)에서 자기 백성에게 했던 설교다. 얼마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을 차지하고(10),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들로 가득 찬 집을 얻고, 파지 않은 우물을 마시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여 배불리 먹게 될 때(11), 꼭 기억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12). 둘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라(13). 셋째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14). 오늘이 감사주일이고 하니 이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 내용에 대헤서만 생각해 보겠다. 사실 이 첫 번째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결정한다.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않으면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게 되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면 사면 백성이 섬기는 신들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라.’(12)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씀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의 상태(황)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 그들의 신분은 종이었다. 이방나라에서 비참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본래성’(originality)인데, 이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출애굽 사건)를 베풀어주셨다. 이 ‘본래성’을 기억하는 것이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사람은 풍요함와 편함에 익숙하다보면 어려웠던 시절을 쉽게 잊어버린다. 이런 사람은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고, 마치 맡겨두기라도 한 것처럼 더 달라고 떼를 쓰고, 더 안준다고 불평하며 화를 낸다. 현재의 풍요함과 편함에 익숙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민족에게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노력하지 않고 성도 집도 전답도 우물도 포도원도 갖게 되는 광야생활에서 경험하지 못한 풍요와 편함을 경험하게 될 텐데, 그 풍요와 편함 때문에 자신의 본래성을 잊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려운 시절에 도우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항상 은혜 속에 머물면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감사해야 그 은혜를 계속 유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이를 가장 잘 실천했던 사람을 꼽는다면 다윗일 것이다. 다윗은 베들레헴의 촌부(村夫) 이새의 막내였다. 사무엘서를 보면 이새는 다윗이라고 이름을 말하지 않고 ‘말째’라고만 했다(삼상16:11). 말째를 뜻하는 히브리어 ‘학카톤’(הקטון)에는 서열과 등급의 의미가 있다. 서열로는 ‘막내’이고, 등급으로는 ‘최하급’을 뜻한다. 그래서 이 단어에는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란 뉘앙스가 있다. 이는 당시 다윗이 그의 부모와 가족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직접 찾아올 정도의 중요한 가족행사에 끼지도 못하고 들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것도 그가 학카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부모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 놀라운 은혜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왕이 된 이후 그의 태도다. 누가 보더라도 가장 존귀한 자, 최고(רשת)가 되었는데도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이새의 아들, 곧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사람(הקטון)이라 사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던 것이고, 기억하니까 평생감사의 사람이 된 것이다.
너는 조심하여
그러면 어떻게 해야 다윗처럼 자신의 본래성을 끝까지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은혜를 잊지 않고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12절에 그 비결의 열쇠가 되는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그것은 ‘조심하여’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솨마르’(שמר)라고 하는데,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가 본래 의미다. 또한 ‘마음을 감시하고 관찰한다.’는 뜻도 있다. 종합하면 ‘마음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는데 필요한 행동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시 울타리를 치고 깨어서 지켜야 잃어버리지 않게 되고, 또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빼앗기지도 않게 된다. 이것을 내면화시키면 마음에 두고, 마음으로 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가시 울타리를 치고 경계하여 마음에 두고, 마음으로 품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린다. 반면에 마음에 새기고, 마음으로 품고 있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잊혀 질 수가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이것이 조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신다고 했고, 항상 바라보면서 기억하신다고 했다(사49:16). 우리를 마음에 두고, 마음으로 품기 위해서다.
감사 불감증
맥스 루케이도는 감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감사란 삶을 고맙게 받아야 할 선물로 산다는 뜻이다. 진정한 감사는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쁜 일과 슬픈 일,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 삶 전체를 끌어안는다. 우리가 삶 전체를 끌어안는 까닭은 모든 사건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기 때문이다.’ 맥스 루케이도에 따르면,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삶을 고맙게 받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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