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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기쁨’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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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354회 작성일 18-12-1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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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서 기쁨의 주님

15:11

2018. 12/16. 11:00(대강절 셋째 주일)

웃는 놈이 인간이다.

한 가정의 주부가 저녁밥상을 차려놓고, 밥을 먹으려고 둘러앉은 자리에서 가족에게 질문을 했다. 먼저 아들에게 물었다. ‘엄마는 이렇게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착한데 음식솜씨까지 좋단 말이야! 이런 경우를 사자성어로 어떻게 표현하지?그러자 아들 녀석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자화자찬’(自畵自讚). 그때 엄마의 주먹이 바로 아들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딸에게도 했다. 딸도 대답했다. ‘과대망상’(誇大妄想). 딸은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이번에는 무심히 밥만 먹고 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첫 자를 금자로 시작하는데......라고 힌트까지 주면서. 한참 뜸을 들이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금자로 시작한다고? 금시초문’(今始初聞).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오래 전에 들은 유머다.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흔치 않는 일이지만 밥상머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을 수 있는 가정이라면 분명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일 것이다. 모든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가족의 식사장면이다. 대부분이 고급스럽고 잘 차려진 식탁에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마치 묵언수행을 하는 사람들처럼 조용히 밥만 먹고 연기처럼 사라진다. 가끔 한두 마디 말이 오가긴 해도 메마르고 상투적인 말뿐이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건강한 삶, 건강한 가정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웃음이다. 옛말에 세 가지 소리가 담을 넘을 때 그 가정은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라고 했다. 글 읽는 소리, 다듬이 소리, 웃음소리다. 어느 선교사가 아마존 유역을 탐험하다가 온몸이 털로 덥힌 인류를 만났다. 어떤 놈이 원숭인지 인간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그랬더니 본국에서 답신이 왔다. ‘웃는 놈이 인간이다!그렇다. 웃음은 인간됨의 표시다. 또한 건강한 삶의 표시이고, 건강한 가정의 표시다. 그리고 기쁨의 샘이 마르지 않았다는 증거다.

 

기쁨은 선물이다.

전도서를 보면 인생을 두루 경험해본 전도자는 세상 모든 일을 한 마디로 헛되다고 정의했다. 영화를 누린 것도, 많은 재물을 갖는 것도, 고운 것도, 건강도, 수고도, 재능도, 지식도 모두가 헛되다고 했다. 이렇게 헛된 세상에서 그나마 유익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했다(3:13, 5:18). 기쁨이 있는 삶, 즐거움이 있는 삶, 웃음이 묻어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이 지어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3:13). 하나님이 주셔서 기쁨이 있는 삶, 즐거움이 있는 삶, 항상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도 기쁨과 즐거움을 이와 비슷하게 이해했다. 기쁨과 즐거움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한자어 환희’(歡喜)를 풀이해보면 알 수 있다. ()은 두루미가 먹이를 앞에 두고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고(기쁨의 원천), ()는 북치고 장구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기뻐하는 모습). 이를 통해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동양적 이해 역시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상황이나 환경)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환경이나 상황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말씀한다. 본문 또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그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대강절 세 번째 주일로 기쁨의 빛으로 오신 주님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기쁨을 주시는 분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 사역의 특징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는 사역이었다. 복음서에서 주님이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으로 애달픈 사연을 가진, 기쁨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귀신에게 붙잡혀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지는 아들을 가진 아버지, 한창 재롱을 부릴 나이에 죽을 병에 걸려 죽어가는 딸을 바라보아야 하는 아버지, 건장한 젊은 아들을 잃고 그 슬픔에 피를 토하는 홀어머니, 집안의 기둥과 같은 오빠를 잃고 절망적인 슬픔에 쌓인 여동생들,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 중풍으로 평생 침상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사람, 일곱 귀신에 붙잡혀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한 여인 등. 이들의 삶 어느 한 자락엔들 웃음이 깃들고 기쁨이 자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주님께서 이들을 찾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항상 먹는 문제, 질병의 문제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종교적으로 소외받은 세리나 창기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을 웃게 하셨다. 그들에게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해 주셨다. 헬라어로 복음(Ευανγελιον)이란 말 자체가 기쁨의 좋은 소식인데, 주님 자신이 복음이 되신 것이다. 복음 자체이신 주님이 탄생하신 성탄절을 기쁜 날, 즐거운 날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믿음이 주님의 선물이듯 기쁨 또한 주님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주님 자신이 기쁨이시고, 기쁨의 원천이시다. 그래서 기쁨은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표시). 마치 군대에서 장성이 부대 안에서 근무하고 있으면 장성의 깃발을 세워놓는 것과 같다(왕궁이나 성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반사적으로 기쁨이 드러난다. 기쁨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홀로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매일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 시간은 겨우 2~3분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 연고가 없는 분이라 문병을 온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병상에서 항상 싱글벙글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어느 간호사가 물었다. ‘할아버지, 찾아온 사람도 없는데 무엇이 그리 기쁩니까?그랬더니 이분이 말했다. ‘매일 찾아오는 방문객 때문이라오. 그분은 내가 믿는 예수님이신데, 매일 같은 시간에 찾아오셔서 내게 인사를 건네고 가신다오. 오실 시간이 다가오면 만남이 기대가 되어 기쁘고, 오셨다가 가시면 감사해서 기쁘다오.이 이야기가 곧 주님이 그 마음에 계신 사람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Know Jesus, Know Joy. No Jesus, No Joy.라는 말이 있다. ‘예수님을 알면 기쁨을 알고, 예수님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는 뜻이다. 주님이 기쁨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우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다. 우리가 사모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기쁨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4:17). 우리 안에 기쁨이 있으면 우리는 이미 주님의 나라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나라는 기쁨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쁨이 없으면 주님의 나라가 없는 것이고, 주님의 나라가 없으면 주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미안하지만 기독교라는 종교의 종교인이지 주님을 믿는 성도는 아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화평을 만드는 삶과 같은 성도로서 마땅히 살아내야 할 삶 또한 기뻐하는 삶에서 비롯된다. 주님 때문에 기쁘고, 주님의 나라 때문에 즐거우면 주님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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